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76화 (75/174)

76화

"레이프."

건힐드가 비무 대회 준우승자이며, 자신의 조카이자, 자신의 망치술을 80년 동안 전수해 준 레이프를 끌어안았다.

"염려 마세요, 건힐드. 꼭 해낼 테니까요."

모두가 엄숙한 분위기다.

오크의 영역에 들어온 지 석 달.

여전히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다.

오크들의 숫자는 몇 배로 늘어나 우리를 포위했고.

아무리 최강의 전사들이라 한들, 수만에 달하는 오크와 트롤들의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결국, 드워프의 본대를 불러야 했다.

그 역할을 레이프가 맡기로 한 것이다.

사실 골디 다음으로 가장 많이 다친 게 레이프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의 몸 상태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또 일부러 목소리에 힘까지 주어 우리를 위로했다.

"아르네 도토리 국왕을 살아서 만날 것입니다. 그러니 다들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꼭 살아서 다시 만나요."

우리는 일일이 레이프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친구를 넘어 전우가 된 레이프다.

수만 마리의 오크와 트롤이 포위한 곳으로 녀석을 보내려니, 눈물이 났지만 억지로 삼켜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보낼 최강의 드워프 전사들이 아니다.

"다들 준비됐지?"

"물론이지!"

"가자! 가서 한 드워프 당 1,000마리 오크의 머리를 부수는 거다."

"가자!"

"와아아아아아아!"

모든 준비, 사실 준비랄 것이 없다.

드워프들에게 남은 건 망치 한 자루.

나에게는 두 자루의 검이 전부다.

우리는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며 땅굴을 빠져나갔다.

우리가 파 놓은 땅굴 입구의 반대편.

그곳에서 튀어나와 입구 쪽을 포위하고 있는 오크들을 향해 돌진했다.

콰콰콰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꾸웨에에에에엑!"

"크아아아아아아앙!"

다시 엄청난 혈전.

말 그대로 피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고, 다시 커다란 강이 되어 흐르는 끔찍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그렇게 오크들의 눈과 귀를 가리는 사이, 레이프는 서도토리촌으로 떠났다.

먼 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지나온 만큼, 그 길 위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가 살아서 서도토리촌에 도착할 확률은 영에 가깝다.

그래서, 그래서 조금이라도 레이프 녀석이 살길 바라며.

"으아아아아아악! 죽어라! 죽어라, 오크 괴물들아!"

난 정말 미친놈처럼 싸우고 또 싸웠다.

* * *

"아버지. 아버지! 흑흑흑. 아버지!"

"내가 곧… 곧 자네 뒤를 따라감세."

발더 시니어가 죽었다.

발더 주니어는 통곡을 했고, 평생의 맞수였던 건힐드는 뜨거운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레이프가 서도토리촌으로 떠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우리를 포위하고 있던 오크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아르네 국왕이 이끄는 드워프 군대를 막기 위해 병력을 분산한 것이다.

그 말인즉, 레이프가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발더 시니어가 용맹하게 선두로 치달았고. 수만 마리에 달하는 오크들을 통으로 박살 내며 길을 뚫었다.

그 결과, 우리는 불의 화산에 매우 근접할 수 있었다.

대신 발더 시니어를 잃어야 했다.

* * *

불의 화산에 도착했다.

하늘 높이 솟은 불의 화산 봉우리에서 엄청난 화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코리가 죽었고, 발더 시니어가 죽었으며, 며칠 뒤 바드와 하콘까지 오크들에 의해 생명의 끈을 놓아야 했다.

남은 건 나와 건힐드, 발더 주니어 그리고 이제는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골디가 전부다.

그리고 불의 화산에는…….

젠장!

오크의 왕 푸르케와 그가 이끄는 10만의 오크 군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팔찌의 힘 때문에 더욱 강력해진 오크들.

다행인 건.

저 멀리, 아주 멀리에 있지만, 국왕 아르네 도토리가 드워프 군대 수십만을 이끌고 이곳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수십만에 달하는 오크들이 드워프 군대를 막고 있지만,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가 지나온 길에는, 전설의 최강 드워프 전사인 발더 시니어와 코리, 바드, 하콘의 용맹함이 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가 곧 지려 하고 있군."

건힐드가 불의 화산을 지키고 있는 십만의 오크 대군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오늘이다.

도토리국 천문관들이 1,000년 동안 연구하여 예측한 마왕 현세의 날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해가 지면 절대 팔찌는 발동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 마왕이 이 땅에 현신한다.

그러면… 모든 게 끝이다.

아르네의 군대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

"가죠."

발더 주니어가 망치를 꼭 쥐며 말했다.

"그러지."

건힐드가 여전히 담담하게 답했고.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온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골디까지 눈을 부릅떴다.

"휴우. 여기까지 왔는데, 어쩔 수 없죠. 저 오크들 죄다 도륙하고, 절대 팔찌인지 뭔지, 그냥 박살을 내 버리자고요."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떨렸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똥꼬에 힘을 꽉 주며 두려움을 이겨 냈다.

"가자!"

"죽어라, 오크들아!"

"으아아아아아악!"

우리 넷은, 그렇게 십만의 오크 군대를 향해 불의 화산을 뛰어 올라갔다.

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베고, 박살 내고, 싸우고, 죽이고, 다시 베고.

끝도 없다.

그래도 다시 베고, 박살 내고, 죽이고.

계속 그렇게.

오크들의 피를 뒤집어쓰며 불의 화산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갔다.

"해가 지려고 한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건힐드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오크들을 물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한계다.

내 내공도, 외공도.

이미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건힐드와 발더 주니어 역시 마찬가지다.

불의 화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이젠 몰려드는 오크들을 상대하는 것조차 버겁다.

쉬이이이이익.

푸우욱!

"혀… 형……."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는데.

X팔.

골디가.

우리 골디가.

그 착한 녀석이.

오크의 칼에 심장을 관통당해 쓰러져 있다.

"X새끼들아!"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분노에, 슬픔에,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원기까지 끌어내 검강을 마구 퍼부었다.

수백의 오크들이 육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고.

나는 곧바로 쓰러진 골디를 향해 달려가, 녀석을 와락 끌어안았다.

"미… 미안해요, 형. 끝까지… 끝까지 형과 함께하고 싶었는……."

골디가 죽었다.

녀석만큼은 살리고 싶었는데.

X팔!

오크 개새끼들.

다 죽인다.

다 죽일 거다.

마왕이고 지랄이고.

오늘 너희 다 죽이고, 나도 죽는다.

생명의 근원.

원기를 모두 끌어 올렸다.

저기 보인다.

불의 화산 봉우리에 서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우릴 보며 웃고 있는 오크의 왕 푸르케.

놈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내 검강으로 인해 일시 주춤했던 오크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한 번도 실전에서 써 본 적 없는데.

뭐, 지금 안 쓰면 쓸 기회도 이젠 없다.

난 몰려드는 수만의 오크들을 보며 조용히 읊었다.

"블랙 스톰(Black Storm)."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땅 이곳저곳에서 흑룡이 치솟아 올랐다.

내 원기를 모두 쏟아부은, 아니 나의 마지막 생명을 모두 쏟아부은 블랙 스톰이다.

검은 용의 회오리 수십 개가 그런 오크들을 일시에 덮쳤다.

회오리에 휘말리자마자 수백 수천의 육편이 되어 찢기는 오크들.

난 지체하지 않고 달렸다.

그런 내 옆을 건힐드와 발더 주니어가 바싹 쫓아오며, 나를 공격해 오는 오크들을 도륙했다.

난 앞만 보고 달렸다.

오크의 왕 푸르케.

놈을, 놈을 죽인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인간과 건힐드를 구하라! 발더 주니어를 도와라! 우리가 왔다!"

아르네 도토리가 이끄는 정예.

본대는 아직 저 멀리 있지만, 아르네 왕이 직접 지휘하는 도토리 왕국의 최강 군대 수천 명이 불의 화산 아래에 도착하여, 오크들을 도륙하며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덕분에 우리를 뒤쫓던 오크들의 일부가 산 아래로 향했고.

나와 건힐드, 발더 주니어는 더욱 빠른 속도로 오크의 왕을 향해 달릴 수 있었다.

"드워프만 어리석은 줄 알았더니, 인간 역시 어리석은 존재였군. 크흐흐. 죽여라!"

오크의 왕 푸르케는 여전히 우리를 비웃고 있었고.

그의 주위에 있던 고작 200마리의 오크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지금까지 상대한 오크들과 기세부터 다른, 범상치 않은 오크들이다.

아마 우리에게 전설의 최강 전사 다섯 드워프가 있다면.

오크들에게는 저놈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강하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놈들의 기운이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젠장.

이건 오크의 왕에게 퍼부으려고 했던 건데.

마지막 힘.

정말 마지막 한 방이다.

이걸 끝으로 나도 죽는다.

마지막 원기다.

"아이언 스노우(Iron Snow)!"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에서 검은 눈이 내렸다.

벽력을 머금은 쇠의 눈이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이는 곧 최강의 오크 200마리에게 쏟아졌고.

놈들은 순식간에 곤죽이 되어 땅과 흙 위에 흐르는 핏물이 되었다.

털썩.

결국.

나도 무릎을 꿇었다.

걸을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아니, 숨을 쉴 힘조차 없다.

"태한아!"

건힐드가 그런 나를 보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젠 방법이 없다.

원기는 회복할 수 없다.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나는 것이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복구가 되지 않는다.

"오크의 왕을… 죽이고……. 쿨럭."

피를 한 사발 토했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힘겹게 다시 고개를 들어 건힐드와 발더 주니어를 향해.

아! 두 드워프의 상태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해야 한다.

"절대 팔찌를… 소멸… 소멸시키세요."

털썩.

결국 나는 쓰러졌고.

건힐드와 발더 주니어는 뜨거운 눈물을 붉은 피와 함께 쏟아 냈다.

"고맙다, 태한아. 쉬고 있어라. 절대 팔찌를 부수고… 돌아오마."

난 쓰러진 상태로 두 드워프의 뒷모습을 보았다.

한없이 용맹하고 커다란 난쟁이들의 등이 내 눈으로 들어왔다.

이내 두 드워프는 수십의 오크들을 순식간에 부숴 버리고.

오크의 왕 푸르케의 머리통마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푸르케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폭발했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건힐드와 발더 주니어가 수십 장 밖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이건, 이건 오크의 힘이 아니다.

다시 급하게 고개만 간신히 들어 오크의 왕 푸르케를 봤는데.

놈의 몸에서 검은빛이 뿌려지고 있다.

세상을 모두 암흑의 빛으로 뒤덮을 것 같은… 젠장!

놈이! 놈이 절대 팔찌를 차고 있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암흑의 빛이었다.

하늘을 보니, 이미 어두워졌고.

우리가… 늦었다.

마왕이 오크의 왕 푸르케의 몸을 통해 현신하고 있는 것이다.

"태한아!"

급히 누군가 나를 향해 다가왔는데.

아르네 도토리다.

그와 그의 정예 병사들이 오크들을 도륙하며 피를 뒤집어쓴 상태로 이곳까지 올라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툭.

아르네 역시 이를 깨달은 모양이다.

하늘이 무너진 것과 같은 얼굴을 하며, 목숨만큼 소중히 생각하는 그의 망치마저 땅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른 드워프들 역시 같은 상태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이제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이 세상은, 마왕의 세상이 되었…….

- 태한이 형, 죽었어?

뭐지?

내가 죽었나?

환청이 들린다.

아직 안 죽었는데?

- 태한이 형, 아직 안 죽었으면 조금만 더 살아 있어.

뭐냐고?

이건 분명… 골디의 목소리인데?

골디는 죽었……. 아! 저건… 저게… 저건 그건데.

- 죽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우리 드래곤 일족이 저 마왕 새끼를 어떻게 족치는지 구경하면서.

곧이어.

내 머리 위 하늘에.

하늘을 뒤덮을 엄청난 크기의 골드 드래곤이.

아!

수십 종의 드래곤이… 하나, 둘, 셋… 수천 마리가 불의 화산 하늘 위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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