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무언가 기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는 드워프들.
아! 부담스럽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부담스럽다.
진심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마왕이라니.
장난해?
개미핥기도 아니고, 신성제국이나 흑야제국의 군대도 아니다.
마왕.
마계의 왕이라는데.
분명 마왕도 신에 속하는 존재라 하지 않았나?
나보고 신과 싸우라고?
내가 지금 드워프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있지만, 등으로는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흐른다.
행운석아! 행운석아!
이번엔 나가도 너무 나갔다.
이건 진짜 아니라고!
그때.
아르네 국왕이 시중에게 말했다.
"가지고 와라."
곧, 시중을 드는 드워프들이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돌아왔다.
그걸 다시 아르네 왕이 나에게 건넸다.
"받게. 그랜드 세인트 스워드와 성녀의 검일세."
"비무 대회에서 떨어졌는데……."
"상관없어. 처음부터 줄 생각이었네. 그리고 마왕과의 싸움……."
"……."
"부담 갖지 말게. 수천 년 동안 드워프와 인간이 함께 싸웠다고, 자네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네. 수천만 명의 드워프들이 마왕의 손에 죽어 나가더라도, 자네는 신경 쓸 필요 없지. 뭐, 그래도 도와준다면… 다들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겠지만 말이야."
젠장!
이건 협박이다.
수천만 드워프의 생명을 담보로 한 협박.
"함께…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
여기저기서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잘 생각했어, 태한. 자네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하하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발더 주니어에게 처발린 나를 죽일 듯한 눈으로 노려보던 건힐드까지 환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자, 다들 앉지. 본격적인 대책을 구상해 보자고."
그렇게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나도 앉고.
아! 도망가고 싶다.
그래, 받은 게 있으며 갚아야지.
우리 집 가훈 아니겠나.
"그런데 폐하, 혹시 이번 축제를 예년과 다르게 성대히 치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동도토리촌의 촌장이 물었다.
"그렇소, 혹시 어딘가 있을지 모를 마왕 첩자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할 많은 드워프를 모아야만 했소. 그래서 이번 축제를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또 아르네가 나를 쳐다보며 웃는다.
역시, 다 속셈이 있었던 거였어.
"인간인 태한이 나타나 이를 홍보했고, 덕분에 이렇게 많은 드워프가 수도로 모이게 된 것이오."
"역시 복덩이였군. 하늘이 마왕을 막기 위해 인간을 보내 주신 거였어. 허허허."
여기저기서 촌장들과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 더 부담된다.
큰일이다.
아니, 도대체 마왕과 어떻게 싸울 생각이지?
"본격적으로 계책을 세워야 하오. 발더 시니어의 말대로 가장 좋은 방법은 마왕이 현신하기 전에 절대 팔찌를 부수는 것이오."
발더 시니어가 물었다.
"절대 팔찌의 위치를 알고 계십니까?"
"불의 화산이오."
순간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크들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어렵겠군요."
북도토리촌의 촌장이 말했고, 건힐드가 그 뒤를 이었다.
"불의 화산이면 오크들의 성지 아닙니까? 우리 서도토리촌에서 서쪽 땅끝에 있는 곳이요. 그렇다면 오크들과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데, 마왕과 싸우기도 전에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렇소, 그 문제를 나도 오랫동안 고민했고."
잠시 아르네 왕이 말을 멈추고는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런 후 작심한 듯.
"팔찌 원정대를 꾸릴 생각이오. 오크들의 눈을 피해, 절대 팔찌를 부술 최고의 전사들로 구성된 팔찌 원정대."
음, 이거 뭐.
어.
응.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아닌가?
착각이겠지?
팔찌 원정대.
응, 그냥 넘어가자.
아! 젠장.
그럼 나도 팔찌 원정대의 일원이 되는 것이잖아?
엿됐다.
"좋은 생각입니다. 제가 이 늙은 몸을 불사르겠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폐하!"
"내가 빠질 순 없지!"
서로 팔찌 원정대에 참가하겠다고 난리 법석이다.
응, 난 조용히 있었다.
"자! 조용. 조용. 다들 진정들 하시오."
아르네의 말에 다들 다시 자리에 앉았고.
"팔찌 원정대의 책무가 매우 중요하나, 혹시 모를 사태에 원정대를 지원할 대규모 드워프 군대도 이끌어야 합니다. 원정대가 실패할 경우나 혹은 위험에 처할 경우, 남은 드워프 모두가 마왕과 오크들을 물리치기 위해 불의 화산으로 진격할 것이오. 이를 이끌 장수들이 필요하오."
이번에는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보고, 또 아르네의 눈을 피하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크고 작은 전투 경험이 꽤 있습니다. 병법을 깊이 익혔고, 실제 20만에 달하는 군대를 통솔하여 100만 대군과 싸워 물리친 적도 있습니다."
아하!
팔찌 원정대에서 빠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하지만…….
모두의 표정이 어둡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몇몇은 벌레를 보는 듯한.
젠장!
그래도 내가 인류의 자존심을 짊어지고 있는데.
그래.
은혜는 갚아야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리요.
아!
이거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짜증 나는 말이다.
난 지옥 가기 싫다고.
하지만 분위기가 어쩔 수 없다.
"그런 제 경험을 토대로… 몇 가지 중요한 병법을 남겨 드리겠습니다. 드워프 군대를 이끌 장군님께 도움이 되게요."
"……."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전, 저는……."
아! 말하기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눈물을 삼키고.
"저는 팔찌 원정대에 꼭 끼워 주십시오. 여러분께 받은 은혜에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
짝짝짝짝짝!
"내가 저럴 줄 알았지. 역시 멋진 인간이야."
"그럼, 우리 태한이가 얼마나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하하하!"
"인간 최고! 영원한 우리 드워프의 친구다! 하하하!"
결국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다시 앉아야 했다.
나, 팔찌 원정대가 됐다.
* * *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팔찌 원정대가 꾸려졌고.
수도의 군대와 전국에서 축제를 보기 위해 몰려든 드워프 전사들이 군대에 합류하였다.
다시 나머지 드워프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의 군대를 소집한 후 빠르게 서도토리촌으로 몰려들 것이다.
뭐,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우리 팔찌 원정대가 은밀히 수도를 벗어나 서도토리촌으로 향했다.
나와 전설의 최강 전사 드워프 다섯 명.
그러니까 건힐드, 발더 시니어, 바드, 코리, 하콘.
거기에 이번 비무 대회 우승자와 준우승자인 발더 주니어와 레이프.
마지막으로 골디가 포함되었다.
골디 녀석은 내가 팔찌 원정대가 됐다는 말을 해 줬더니, 울고 불며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겠다며,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다.
그래서 혹시 몰라 건힐드에게 말했더니, 건힐드는 매우 긍정적으로 이 부분을 왕에게 전했다.
아무래도 내가 인간이고, 여전히 이곳의 신무기를 다루는 것과 드워프의 전술 등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해 골디를 동행에 허락한 모양이다.
그렇게 팔찌 원정대 아홉 명이 꾸려졌고.
짙은 어둠이 내린 한밤중에 변장까지 하고 몬토를 빠져나와 서도토리촌에 도착, 다시 우리는 오크들의 땅으로 넘어갔다.
아! 도망가고 싶다.
아니다.
팔찌만 부수면 된다.
그러면 마왕과 싸울 필요 없다.
오크들 따위는 두렵지 않고.
그래, 얼른 팔찌만 부수고 돌아오자.
* * *
"크아아아아앙!"
오크의 영역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났다.
지금껏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이번엔 진짜 위험하다.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 만났던 오크들이 아니다.
더 강하고, 더 빠르다.
더 흉포하고, 더 잔혹하다.
그들은 심지어 동료들의 시체까지 이용해 우리를 공격했다.
오늘은 놈들이 파 놓은 함정에 걸리고 말았다.
3,000마리에 달하는 오크들이 밀려들었고.
우리는 어제와 같이 또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한계다.
기관연사궁은 이미 화살이 바닥났고, 망가져 버렸다.
돌아오는 손도끼도 모두 사라졌고.
아르네 왕이 직접 나에게 준 갑옷도 찢어졌다.
윙슈트는 오래전에 넝마가 되어 버렸고.
무엇보다 내 몸이 지쳤다.
내공도 바닥이 났다.
다른 드워프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모두 크고 작은 상처들을 수십 개나 달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원정대 무리에서 낙오돼 홀로 수백의 더 강력해진 오크들에게 포위되었다.
하지만 저 녀석!
저 녀석이 오크들의 수장이다.
저놈만 죽이면, 어떻게든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앙! 죽어라, 인간아!"
궁지에 몰린 나를 보며 자신만만하게 거대한 칼을 휘두르며 덮쳐 오는 오크들의 수장.
나는 체념한 듯하다가, 피우우우우우우우웅!
극소 기관연사궁을 발사했다.
정확히 놈의 사혈만을 조준한 발사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탓!
명중이다.
그것도 50발 중 스무 발 이상이 놈의 사혈에… 어?
"어리석은 인간. 이런 장난감으로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진짜로 죽어라!"
X팔!
안 통한다.
분명 사혈을 맞췄는데.
결국, 이렇게 죽는가 보다.
"네 이놈!"
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내가 막 오크의 칼에 목이 베이려 할 때.
건힐드와 전설의 드워프 전사들 그리고 발더 주니어와 레이프, 골디가 나를 구해 주러 왔다.
콰콰콰콰콰쾅!
"꾸에에에에에엑!"
다시 엄청난 혈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형! 형! 정신 차려요!"
피투성이가 된 골디가 오크들을 망치로 부수며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정신은 계속 차리고 있어.
내공이 바닥나서 그렇지.
됐다.
일어나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나에겐 최강의 외공이… 아! 벌써 다섯 시진째 싸우고 있다.
몸이 너덜너덜하다.
그래도 나는 오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날 우리는 총 일곱 시진 동안 싸워야 했고, 4,500마리가 넘는 오크들과 열세 마리의 트롤을 죽였다.
* * *
땅굴에 숨었다.
드워프는 땅을 파는 기술 역시 기겁할 수준이었다.
순식간에 땅을 깊이 파고, 입구를 위장한 후 한숨 돌리는 중이다.
엿새 전 오크에게 발각되어 첫 전투를 벌인 후,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다.
우리가 오크의 영역에 들어온 지는 이미 두 달이 되어 가고 있다.
절대 팔찌를 통해 마왕이 현세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가 지쳤지만, 그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으로 인해 초조했다.
"형,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이거, 극소 기관연사궁."
"그게 왜요?"
"사실 내가 살던 곳에는 혈도라는 개념이 있거든. 그래서 이 작은 침 중 하나만 그 혈도 중에서 사혈이라는 곳을 찌르면 즉사하게 돼."
"그런 게 있어요? 신기하네요."
"그런데 이상하게 오크에게는 통하지 않아. 다른 종족이라 그런가? 벌써 몇 번을 시도했지만, 하나같이 다 통하지 않았어."
내 말에 골디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아주 오래전, 태초에는 인간과 엘프 그리고 우리 드워프가 같은 종족이었다고 해요."
"그래?"
"네, 수십만 년이 지나서 종족이 갈렸지만, 그 뿌리는 하나라는 것이죠. 하지만 오크는 아니에요. 처음부터 우리와 같은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아요. 그것 때문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다. 애초에 인간과 다른 종족에게 혈도의 개념으로 공격하려 했던 내가 멍청했어."
"뭘 또 그렇게까지 생각해요. 제가 보기엔 굉장히 용감한 시도였는데요."
"그래, 오늘도 네 덕분에 위로가 된다. 고맙다, 골디야."
녀석도 많이 지쳤다.
아니, 지친 정도가 아니라 우리 무리 중 가장 약한 녀석이 골디다.
가장 많이 다쳤고, 나보다 열 배는 더 많이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그래도 매번 기적처럼 살아났고, 그렇게 살아나면 자기보다 나를 먼저 챙겼다.
고마운 녀석이다.
이 녀석은 어떻게든 끝까지 살리고 싶다.
아! 내가 살아야 이 녀석도 살릴 텐데.
건힐드가 그랬다.
불의 화산에 접근할수록 절대 팔찌의 힘이 오크들에게 전이해 더 강한 오크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사실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오크들은 강해졌고, 또 놈들에게 빌붙은 홉 고블린이란 녀석들의 전술은 언제나 우리의 허를 찔렀다.
나는 이곳의 지형도 모르고, 이들의 전술 역시 모르며, 오크들을 상대해 효과적으로 싸우는 방법도 모른다.
내가 그토록 열심히 배웠던 『손자병법』이 별 쓸모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오크들과 수백 년 동안 싸워 온 최강의 드워프 전사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어?
"코리! 코리! 정신 차려! 이 늙은이야! 아직 죽을 때 안 됐어! 엄살 떨지 말고 일어나라고! 코리!"
전설의 최강 전사 드워프 코리가 죽었다.
치명상을 입었는데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건힐드보다 먼저 달려가 오크들의 머리를 박살 냈고.
발더 시니어보다 더 많은 트롤을 부숴 버린 코리가.
죽을 위기의 나를 무려 열세 번이나 구해 준 코리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