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73화 (72/174)

73화

"이거 재질이 보통 재질이 아닌데?"

윙슈트를 타고 건너편 산 아래에 도착하였다.

펼쳐졌던 윙슈트를 접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알아보네요? 전투용 윙슈트에요. 애들 타는 거 말고, 오크들과 싸울 때 착용하는 거요. 자, 이걸 이렇게 매 보세요. 겉옷에 딱 붙여서."

샤아아아악, 척!

"오!"

감긴다.

마치 내가 입고 있던 옷과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이렇게 하면 웬만한 오크들의 무기들로부터 등을 보호해 줘요."

심장을 보호하는 호신갑을 등에 착용한 것과 같은 이치다.

대단하다.

알면 알수록 이들 드워프의 기술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것도 챙겨 가야겠다.

나와 골디는 어제 건힐드가 쏜 천궁의 화살이 정확히 세 발 박혀 있는 과녁까지 확인했다.

이젠 놀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과녁 정중앙에 꽂힌 세 발의 화살을 보니 또 아찔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천궁도 챙긴다.

아! 챙길 게 너무 많아.

* * *

"형, 점심 먹으러 가요."

우리 집으로 골디가 왔다.

녀석은 내가 그리도 좋은 모양이다.

볼 때마다 싱글벙글이다.

그런데…….

"뒤에 뭘 숨기고 있는 거야?"

"형, 그게요……."

녀석이 미안한 얼굴로 허리 뒤에 숨겼던 것을 쓰윽 내밀었다.

"이, 이건……."

"마을 사람들이 형 외모 때문에 말들이 많나 봐요. 아! 욕하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고요. 너무 가엽다고. 불쌍하다고… 그래서 건힐드랑 원로들이 상의해서 이걸 형에게 주라고……."

수염이다.

가발이 아닌 가염(假髥).

"휴우, 어쩔 수 없지."

가짜 수염을 턱에 붙였다.

불편할 줄 알았는데, 역시 기우였다.

가짜 수염조차 진짜와 같은 느낌이 나게 만들 수 있는 드워프들이다.

수염을 붙이고 거울을 봤는데.

오! 멋있… 개뿔!

역시 이상하다.

그런데…….

"형!"

"어? 왜?"

"너무 멋있어요."

골디 이 녀석, 눈에서 별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나를 본다.

그리고 점심 식사 자리에서 만난 마을의 드워프들.

"오, 너무 멋있군!"

"이렇게 잘생긴 줄은 몰랐는데?"

"어머, 정말 남자답고 멋있어요. 호호호."

하나같이 칭찬 일색이었다.

역시 이곳 미의 기준은 수염인가 보다.

* * *

내 집 뒷마당.

세인트 스워드에 적응하기 위해 검법을 수련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부우우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우웅.

커다란 호각 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오크가 침입이라도 했나 싶어 서둘러 마을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마을의 드워프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촌장인 건힐드와 골디도 있었고.

하지만 그 어떤 경계 태세도 갖추지 않고, 다들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싶어서 나도 봤는……. 허걱!

"저… 저건, 용 아니야?"

놀란 나에게 골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용은 저것보다 최소 열 배는 더 커다랗다고 해요. 저건 지난번에 제가 말했던 와이번(Wyvern)이에요."

곧이어 커다란 와이번이 이곳 서도토리촌의 중심으로 날아 착지했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륵.

추아아아아아앙.

그 거대함만큼이나 커다란 바람을 일으키며 착지.

놀랍게도 와이번의 등에 한 명의 드워프가 타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위엄.

화려한 옷에 왕관……. 어? 왕관?

곧바로 모든 마을 드워프들이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의 앞으로 다가간 마을의 촌장 건힐드는 아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까지 숙였다.

그러자 그가 건힐드를 향해 말했다.

"술 먹고 망치로 내 뒤통수를 때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예의를 차려요? 얼른 일어나세요, 건힐드."

"다들 쳐다보잖아. 대충 받아라, 왕아."

"아, 네. 어험, 서도토리촌의 촌장은 일어나시오."

"예, 국왕 폐하."

다 들렸다.

여기저기서 마을 드워프들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원에서는 절대 나타날 수 없는 군신의 관계일 테다.

뭐, 여긴 중원이 아니니.

그보다 바로 그다.

그가 드워프의 왕 아르네 도토리다.

건힐드가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자, 그는 곧바로 시선을 나에게로 향했다.

키가 훌쩍 크니, 대번에 나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네군. 정말… 진짜로 인간이야."

놀란 얼굴로 나에게 다가오며 그리 말하는 도토리 국왕.

나도 허리를 숙여 정중히 예를 갖추었다.

"나태한이라고 합니다, 폐하."

"말도 할 줄 아네?"

이런 미친!

"네, 뭐 할 줄 압니다."

"수염도 멋지군. 책에서 봤던 인간 중에는 수염이 없는 기괴한… 음, 가짜 수염이었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때 건힐드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친위대는 어쩌고 혼자입니까?"

"아! 그놈의 대신들이 어찌나 이곳에 오겠다는 걸 막는지. 할 일이 태산이에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궁금해 죽겠는걸. 그래서 몰래 도망쳐 왔지요. 얼른 돌아가 봐야 해요."

"큭큭. 왕이 되니 더 고생이 많군."

"그러게요. 그냥 젊었을 때처럼 건힐드 뒤나 따라다니며 오크 사냥할 때가 좋았는데요."

"나도 늙었어. 이젠 망치 들기도 힘들어."

"어이쿠, 퍽이나 그러시겠네요. 하하."

"들어가자고. 보는 눈이 많으니, 국왕 체통도 생각해야지. 차나 들며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태한, 시간 괜찮지? 함께 가자. 널 보러 일부러 왕께서 오셨는데."

"네, 영광입니다."

그렇게 나는 아르네 도토리 국왕과 함께 건힐드의 집으로 향했다.

* * *

"맞다, 아르네. 혹시 궁전 무기고에 성력이나 마력이 깃든 보검이 있나? 드래곤 본으로 만든 검이라던지."

"그건 왜요?"

건힐드의 집에 돌아와서는 아예 반말을 하는 건힐드였고, 아르네 도토리 역시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태한이가 차원 이동을 해서 이곳으로 왔는데……."

건힐드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아르네에게 해 주었고.

"음, 드래곤 본으로 만든 검이나 창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다 다른 무기로 바꾸었어요. 그 귀한 걸 그냥 무기고에 썩혀 둘 수는 없잖아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럼 다른 검은?"

아르네가 건힐드에게 대답하는 대신 나에게 말했다.

"자네 검을 줘 보게."

난 아르네 국왕에게 세인트 스워드를 건넸다.

"음, 성자기사단이 쓰던 검이군. 훌륭한 검이지. 이 검이라면 나이트 언데드는 쉽게 물리칠 수 있겠어. 다만……."

"다만, 뭐요?"

"고스트 언데드와 싸울 때는 많이 힘들 수 있어. 물론 태한 자네의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야."

"그럼 혹시라도 휴먼 언데드를 만나면요?"

"일반의 세인트 스워드로는 그들을 죽일 수 없어. 자네가 소드 마스터라면 모를까."

"그럼 어떻게 해요?"

그때였다.

아르네 국왕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이번에 우리 왕국에서 비무 대회를 연다네. 4년에 한 번 있는 큰 축제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행사지. 어떤가? 자네도 한번 참가해 보는 게."

"비무 대회요?"

"응."

아! 뭔가 낚이는 느낌인데.

안 낚일 수도 없고.

"상이 있나 보죠?"

"있지. 드워프들이 우승하면 황금을 잔뜩 주겠지만, 자네가 우승한다면 궁전 무기고의 무기 중 원하는 건 모두 주겠네."

"제가 원하는 검이 있나 보죠?"

"있지, 있고말고. 성자기사단의 단장이 쓰던 그랜드 세인트 스워드도 있고, 신과 소통하는 능력이 있던 성녀의 검까지 있다네. 그 검들이라면 휴먼 언데드가 아니라 데몬 언데드까지 죽일 수 있다네."

내가 슬쩍 건힐드를 보았다.

그러자 건힐드가 아르네 국왕의 설명을 덧붙였다.

"사실이야. 역사에 그리 기록되어 있어. 데몬 언데드를 죽인 건 우리 드워프가 아닌 인간이었고. 그때 쓰였던 검이 각각 그랜드 세인트 스워드와 성녀의 검이었다고."

다시 아르네가 나섰다.

"모르지 않나? 이미 휴먼 언데드나 데몬 언데드가 자네 인간들 틈에 섞여서 사악한 일을 꾸미고 있을지. 성녀의 검은 사람과 똑같은 휴먼 언데드를 구분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네. 어떤가? 구미가 당기지 않나?"

"비무 대회 우승요?"

"응, 아마 자네가 참가한다고 하면, 대호황을 이끌 수 있을 걸세. 대륙 전역의 대워프들이 모두 구경하러 올 거라고. 하하."

"우승하면… 검 두 자루 다 주실 수 있어요?"

"말하지 않았나. 두 자루가 아니라, 무기고에 있는 인간과 엘프들이 쓰던 검 모두를 주겠다고."

"두 자루면 돼요."

"약속하지, 국왕의 이름으로."

"참가…하겠습니다."

"석 달 뒤라네. 열심히 수련해야 할 거야. 우리 드워프 전사들이 만만치 않거든. 뭐, 건힐드가 도우면 우승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건힐드?

그냥 늙은 촌장 아니었어?

어쨌거나 그렇게 비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 아! 낚였다.

어쩔 수 없이 낚여야만 했다.

두 자루의 검을 위해.

* * *

"대륙 최강의 전사 다섯 명이 각각 서도토리촌, 동도토리촌, 북도토리촌, 남도토리촌, 상도토리촌의 촌장이 되었어요. 10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그 최강의 다섯 전사를 능가하는 젊은 드워프는 아직 한 명도 나오지 않았고요."

"그럼 건힐드가 젊었을 적에 최강의 전사 드워프였다는 말이야?"

"네, 몰랐어요?"

"몰랐지, 아무도 말을 안 해 줬는데."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제가 말해 줬어야 하는데."

"아르네 국왕도 그때 오크 사냥을 함께 다녔다고 하던데."

"유명했죠. 지금도 전설로 통해요. 용감한 어린 왕자와 다섯 명의 최강 전사들의 오크 사냥. 여섯 명이서 잡은 오크가 수만 마리에 달하고, 수백의 트롤들이 죽었으니까요."

"오! 건힐드가 그런 대단한 전사였을 줄은……."

"형은 좋겠어요. 건힐드에게 직접 검술을 배울 수 있어서요."

"골디."

"네, 형."

"같이 배우자."

"제, 제가요?"

"응."

"하지만 저는……."

"너는 뭐? 최강의 전사는 날 때부터 최강이었나? 내가 건힐드한테 말해 볼게. 어차피 이곳의 생활이 아직도 이것저것 네 도움 없이는 많이 어색하고 서툴러. 네가 나를 도와줘야 해."

"저야 그렇게만 해 주면 정말 고맙죠."

"그래, 가자. 건힐드한테 바로 말해 보자."

건힐드는 내 부탁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내 부탁도 부탁이었지만, 골디가 평소 워낙 착해서 건힐드가 좋게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 바로 건힐드에게 검술을 배우게… 아! 검술이 아니라 망치술이다.

그런데 이거.

엄청 살벌했다.

늙은 건힐드가 제대로 힘을 드러내자, 무슨 수를 써도 감당이 안 됐다.

무림에서의 경지에 비유하기는 적절치 않을 수 있으나 굳이 비교하자면 초절정의 고수쯤 되시겠다.

그는 망치로.

나는 세인트 스워드로.

골디까지 함께.

우리는 석 달 동안 정말 열심히 수련에 임했다.

"이봐, 태한."

"네, 건힐드. 헉헉."

"자네가 아무리 인간이라도, 우리 서도토리촌을 대표해 나가는 거야. 그러니까 절대로 패해서는 안 돼. 이건 서도토리촌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네. 꼭! 꼭! 이길게요. 반드시 그래야만 해요."

"그래, 좋아! 다시 오라고!"

"넵!"

건힐드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2갑자가 넘는 내공과 많은 기연으로 인해 자신감이 넘쳐났던 내가, 실로 너무나 부족한 무인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잡기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지!"

퍽!

"으악! 넵!"

"상대의 의도를 읽으라고 몇 번을 말하나!"

퍽!

"으악! 넵!"

"이러다가 골디한테도 역전당하겠어! 아니, 됐어! 이번 비무 대회는 네가 아니라 골디가 참가한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럼 이걸 막아야지!"

퍽!

"으악!"

"검과 정신이 하나가 되는 게 전부가 아니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벌써 100번을 말했잖아!"

"넵!"

퍽!

"으악!"

드워프에게서 신검합일(神劍合一)의 무리를 배우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맞으면서 배웠다.

망치로 열나게 맞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신검합일은 배운다고 배워지는 게 아니다.

깨달음이 따라야 한다.

불행히도 나는 그걸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결국…….

퍽퍽퍽!

"으아아아아악!"

퍼퍼퍼퍼퍼퍽!

"으아아아악! 그만 때려요! 비무 대회 참가도 하기 전에 죽겠어요!"

퍼퍼퍼퍼퍼퍼퍽!

"그만 때리라고, 늙은 난쟁이 새끼야!"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아! X팔.

난 신검합일을 머리나 마음이 아닌 몸으로 배웠다.

그것도 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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