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촌장의 집은 작았다.
다른 드워프의 집보다 컸지만, 내가 반듯하게 설 수 없을 만큼 천장이 낮다.
이곳에서 어떻게 1년을 살까 걱정이었다.
"무슨 생각 하나?"
"아, 아니에요."
"그럼 대충 이야기는 됐고. 오늘은 이만 쉬게.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지."
"네."
"골디, 네가 태한이를 안내해 줘라. 지금쯤이면 다 지어졌을 테다."
지어?
뭘 지어?
"가요, 태한이 형."
"어, 그래."
초장과 원로 그리고 누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촌장의 집을 벗어났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연신 미소를 짓는 골디를 따라 마을의 끝자락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한창 수십 명의 드워프들이 뚝딱뚝딱 망치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집이었다.
인간인 내가 지낼 수 있는 커다란 집.
"오! 인간, 마침 잘 왔어. 자네가 지낼 집을 지었어. 보라고. 어떤가? 살다 살다 이렇게 커다란 집을 짓게 될 줄은 몰랐네. 하하하!"
고작 한두 시진 만에 저걸 만들었다고?
얘들은 진짜 뭐 하는 종족이야?
남녀노소 죄다 손에 망치를 들고 다니고.
사진이란 걸 찍지 않나.
아! 그때 오크들과 싸울 때 그 기관연사궁(Gatling bow)은 정말 충격적이었지.
그런데 이젠 집까지 뚝딱 지어 버렸다.
"형, 고맙다고 해 줘요. 다들 형을 위해 수고했는데."
"아! 그렇지. 저기…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이 정도 가지고 감사까지야. 어서 들어가 봐. 가구들까지 아까 이미 다 들여놨어. 자네 키에 맞춰서 만들었으니, 지내는 데에 불편함은 없을 거야. 골디, 네가 보여 줘라."
"네, 히네프 아저씨."
그렇게 드워프들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떠났고.
난 다시 골디의 뒤를 따라 내 집으로 들어갔다.
대단하다.
몇 달 전부터 준비해도 이렇게까지는 못 만들 거다.
대단함을 넘어 완벽하다.
거실과 침실 그리고 이건…….
"여긴 뭐야? 이상하게 생긴 도자기에 물이 들어 있네? 우물이 집 안에 있어?"
난 그 하얀 도자기에 고인 물을 마시려고 다가갔다.
그런데…….
"어! 어! 형! 형! 그거 마시면 안 돼요!"
다급히 나를 말리는 골디.
"왜? 시원해 보이는데?"
"어휴, 깜짝이야. 형이 살던 세상에는 변기가 없어요?"
"변, 변기? 이게 변기라고?"
"네. 자, 보세요. 여기 이렇게 앉아서 응가하고, 그다음에 이걸 누르면."
촤르르르르르.
오! 이건 진짜 신기방기다.
세상에 이런 일이.
측간이 집 안에 있는 것도 신기한데, 이렇게 하면 얼마나 편리하고 좋은가?
위생적이기도 하고.
와!
진짜 신기한 세상에 왔다.
그리고 알 것 같다.
행운석이 왜 나를 이곳으로 보냈는지.
일상생활이 이 정도라면, 분명 엄청난 무기들까지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낮에 오크들과 싸울 때 봤던 기관연사궁 같은 무기 말이다.
"그럼 쉬세요, 형. 이따가 저녁 먹을 때 부를게요."
"어, 그래. 고마워, 골디야."
"네, 형."
착한 골디까지 있고.
마음에 든다, 드워프들의 세상.
* * *
침상이 이만저만 편한 게 아니다.
역시 침상은… 침상은 과학이다.
응.
뭐?
정말 푹 잤는데, 푹신한 침상 때문에 일어나기가 싫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누운 채로 상념에 빠졌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할 때 드워프들과 나누며 습득한 이곳의 정보를 정리하는 중이다.
일단 이곳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대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 대륙의 7할을 도토리 왕국, 그러니까 드워프들이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3할에 달하는 척박한 땅에 오크들이 존재한다.
도토리 왕국은 다시 수도와 다섯 개의 촌으로 나뉜다.
오크들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게 다섯 개의 촌인데, 이게 말이 촌이지, 서도토리촌은 다시 무려 130개의 작은 촌으로 구성된다.
내가 온 이곳은 그 130개 서도토리촌의 중심이며, 다시 오크들이 가장 많이 침략하고 범람하는 중심 지역이다.
이들의 과학 기술은 상상을 초월한다.
1,000년 전 마왕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온갖 종족과 뛰어난 검사 그리고 마법사란 존재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하지만 마왕 세계 대전으로 대부분의 종족이 멸종하고, 드워프와 극소수의 오크 등이 살아남았다.
드워프는 세상을 지배했고, 그들의 특기인 손 기술을 이용해 많은 과학의 업적을 이루어 냈다.
내가 언제나 말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과학의 엄청난 발전과 동시에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 등은 사라졌다고.
하지만 이들의 과학 기술은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의 힘을 대체하고도 남았다.
그렇기에 현 세상의 주인이 드워프들이 된 것이다.
"태한이 형! 일어났어요?"
"어, 골디. 어서 들어와."
"아침 식사해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가자."
* * *
계곡이 흐르는 넓고 예쁜 공터에서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많은 드워프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일일이 인사를 하는 게 좀 힘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종족인 나를 한껏 반겨 주어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됐고, 나와 골디는 다시 건힐드의 집으로 향했다.
건힐드가 직접 차를 내왔다.
중원에서는 맛볼 수 없는 달콤한 맛의 차였다.
차를 마시며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눈 후, 내가 물었다.
"촌장님, 마왕 세계 대전에 대해 듣고 싶어요. 그 전의 세계가 어땠는지도 궁금하고요."
이건 정보 파악의 일환이다.
과거사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이곳에 존재했던 인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1,000년 전에 마왕이 절대 팔찌라는 기물을 통해 이 세상에 현신했다네."
"절대… 팔찌요?"
"응, 절대 팔찌."
"반지 아니고 팔찌?"
"응, 왜 그러나?"
"아니에요."
어디서 비슷한 걸 들어 본 것 같은데.
모르겠다.
"마왕이 현신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종족이 나름의 균형을 이루고 살았지. 뭐, 전쟁도 많이 하고 그랬지만, 아무튼 그런 세상이었다고 하더군."
"인간들은 어땠는데요?"
"자네 같았다고 하더군."
"저 같은 게 뭔데요?"
"큭큭큭."
"왜 웃어요?"
"아니, 그게… 어험, 너무 실망하지 말게."
"네, 그냥 솔직히 말해 주세요."
"얼빵하고, 미개하고, 멍청한데 욕심은 많았다고. 아! 욕심 많은 건 자네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네. 하하하."
뭐, 타 종족을 그렇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우리 드워프들과 가장 사이가 좋았던 종족이 또 인간이었다고 하더군. 사악하고 배신하는 인간들도 많았지만, 신의를 가장 중시하는 것 역시 인간이었다고 해. 인간은 알다가도 모를 종족이었나 봐."
건힐드에 이어 골디가 추가 설명을 했다.
"제가 말했죠? 오크들을 상대로 가장 많이 협력해 싸웠던 게 바로 인간 종족이었다고요. 형하고 우리 드워프하고는 그런 피를 갖고 있나 봐요. 그래서 저는 처음 형을 봤을 때부터 남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물론, 네가 나를 첩자로 의심할 때는 조금 그랬지만."
"아! 그때는 죄송했어요."
"농담이야."
다시 건힐드가 말했다.
"마왕이 절대 팔찌를 통해 현신한 후에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 오크와 고블린, 트롤이 마왕의 휘하에 들어갔고. 우리는 곧바로 연합 전선을 구축했지. 우리 드워프를 중심으로 인간과 엘프 등 많은 종족이 연합 세력을 만든 거야."
"드워프가 중심이었어요?"
"그래. 왜? 못 믿겠나?"
"아니요, 믿어요."
응, 반만 믿을게요.
"하지만 마왕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고 하더군. 골디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그 싸움으로 우리보다 약했던 인간과 엘프들은 멸종까지 당했어. 수많은 종족이 그때 멸종했지. 이제는 그림으로만 볼 수 있었는데, 자네가 나타나게 된 거라네."
"드워프는 어떻게 살아남았는데요? 오크와 트롤은요?"
"그게… 실은,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마왕 세계 대전에서 이긴 게 아니라네. 우리 드워프들까지 멸종하기 직전, 마왕이 치명적인 실수를 했지."
"치명적인 실수요?"
"그래, 이 세상에 잠자고 있던 드래곤들을 건드린 거야."
드래곤이라…….
"전쟁이 끝나고 알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드래곤들끼리도 많은 언쟁이 오갔다고 하더군. 마왕 세계 대전에 참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두고 말이야. 그런데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콧방귀를 뀌며 구경만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네. 즐겼던 것이지. 우리들의 끔찍한 전쟁을 단순히 오락거리 정도로 즐기며 지켜보기만 했던 거야."
"……."
"오만했던 드래곤들은 마왕을 우습게 알았고, 마왕 역시 스스로 신이라 생각했기에 드래곤들을 무시했었지. 그러다 마왕이 드래곤 한 마리를 죽였고, 제대로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은 동료를 본 다른 드래곤들도 그제야 심각함을 느껴 전쟁에 참여했다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공멸했다네."
"공멸이요?"
"그래, 수천 마리의 드래곤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고, 일제히 마왕을 향해 브레스를 뿜었다네. 하늘과 땅이 모두 녹았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었지. 하지만 마왕도 만만치 않았어. 그 수천 마리에 달하는 드래곤들을 역시나 몰살시켰다네. 그렇게 마왕은 다시 마계로 쫓겨났고, 그 후로는 드래곤을 봤다는 드워프들이 한 명도 없었네."
"그럼 드래곤도 멸종한 거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드래곤들은 강해. 얼마나 강하냐면… 끄응."
건힐드가 인상을 살짝 구긴 후 말을 이었다.
"우리 드워프를 간식거리 정도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네. 수많은 드워프가 드래곤의 노예가 되어 놈들의 보석들을 세공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 있고. 그래서 그토록 강한 드래곤이라면, 분명 어딘가에 살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거라네."
어쩌면 희망 사항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또다시 이 세상을 침범할 마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들이 만들어 낸 허망한 희망.
드래곤도 그때 인간, 엘프 등과 함께 멸종했다고 보는 게 더 사실에 가까울 듯하다.
"오크와 고블린, 트롤은요? 어떻게 살아남았어요? 마왕 편에 붙은 놈들을 드워프들이 그냥 내버려 뒀어요?"
"처음엔 놈들도 멸종한 줄 알았어. 자네, 우리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아나?"
"300살이요."
"맞아, 인간은 100살까지 산다고 기록되어 있지. 맞나?"
"그게… 제가 살던 세상의 인간은 보통 50세까지 살아요. 그것도 전쟁이나 수많은 재난을 피했을 때 그때까지 살고요. 그래서 환갑이라고, 60세까지 산 노인이 있으면, 그 마을에서는 큰 잔치까지 벌여 축하해 주기도 해요."
"음, 그쪽 인간과 이쪽 인간이 다른가?"
"같을 거예요. 어쩌면 우리 쪽 인간이 이쪽에 살던 인간들과 다르게 탐욕이 강해서… 그럴 거예요."
"음, 뭐 그건 그렇고. 그럼 오크의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아나?"
"모르겠는데요."
"30년까지 살 수 있다네. 정확히 우리의 10분의 1밖에 못 살지."
"그럼 더 살아남기 힘들었을 텐데요?"
"그렇지,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극소수가 생존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곧 스스로 멸종할 것이라 생각했어. 치명적인 사실을 하나 놓쳤던 거야."
"뭘 놓쳤는데요?"
"놈들의 엄청난 번식력. 휴우, 많이도 싸질러 낳더군. 지금도 계속 싸지르며 낳고 있고. 그래서 지금 세상의 7할을 우리 드워프가 차지하고 있지만, 인구로 봤을 때는 비슷해."
"아! 그렇군요. 번식력, 그게 그토록 무서운 거네요."
"그렇지. 그리고 고블린, 정확히는 고블린 중에서도 홉 고블린만 살아남았는데, 놈들은 영악해. 드래곤들이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마왕을 배신하고 몸을 숨겨 살아남았어. 지금도 오크들 편에 붙어서 간악한 계책을 내는 게 죄다 홉 고블린들이야."
"트롤은요?"
"그놈들은 너무 무식하고 멍청하고 무뎌. 놈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수십 개의 종족이 멸종하는 마왕 세계 대전 속에서도, 전쟁이 발발한 줄도 모르고 산속에서 자던 놈들이 있어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이네."
"다른 의미로 대단한 놈들이네요. 그런데 촌장님."
"건힐드라고 부르게."
"네, 건힐드. 만에 하나 드래곤이 살아 있다면요. 그래서 드래곤이 다시 나타나면… 드워프들을 다시 잡아먹지 않을까요? 노예로 잡아가기도 할 테고요."
"흥! 우리가 누군가?"
"난쟁이 드워프요."
"이런 말이 있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도 우리 드워프의 손을 거치면 보물이 된다고. 또 이런 말도 있어. 드워프를 창조한 신보다 드워프의 손기술이 더 좋다고."
조금 과장이긴 하겠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단 이틀 동안 내가 느낀 이들의 기술은 실로 경악할 만한 경지에 이른 상태기 때문이다.
"1,000년 동안 놀고만 있지 않았어. 혹시 모를 드래곤의 출현에 대비해, 엄청난 신무기들을 만들어 놨다네. 자넨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어. 우리가 지켜 줄 테니. 그것이 드래곤이건 마왕이 됐건 말이야."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들의 경악할 만한 기술력보다 더 대단한 게 있다.
이들이 더없이 용맹한 종족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