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덜그덕 덜그덕.
마차?
수레다.
혼절했던 내가 수레에 실려 이동 중이다.
아니, 묶여 이동 중이다.
꿈이 아니었군.
아직 깨어나지 않은 척, 실눈을 슬쩍 떠 주위를 살폈… 엇?
"깼어요?"
걸렸다.
"어? 어, 네."
"아저씨들! 깼어요. 인간이 깨어났어요."
수레가 멈추고, 곧 그들이 우르르 수레에 묶인 나에게로 몰려들었다.
진짜다.
난쟁이다.
열세 명.
내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신장의 난쟁이들이다.
이런 세상이 다 있다니.
신기하다.
"오! 신기해. 인간이야. 진짜로 책에서 봤던 인간이라고."
"아직 몰라. 인간인지 아니면 첩자인지."
첩자?
내가?
아니, 그보다…….
이 난쟁이들도 내가 신기한가 보다.
여긴 난쟁이들만 사는 세상인가?
아닌데.
인간을 책으로 봤다고 했는데?
뭐지?
"이봐."
"네? 네."
난쟁이들의 생김새와 분위기가 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험상궂다.
"어디서 왔냐?"
"집에서 왔는데요?"
"집이 어디냐고?"
"집이… 아… 그러니까… 아주 멀어요. 중원이라고."
"중원? 거기가 어딘데?"
"그러니까요. 저도 너무 멀리 와서 거기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몰라요."
"첩자 맞군. 마왕이 보낸 인간으로 위장한 첩자."
마왕?
뭔 소리야?
"첩자 아니에요. 일단 이것 좀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흥! 첩자 녀석을 왜 풀어 줘? 잠자코 가. 가서 네 정체를 제대로 밝혀 주겠다."
"첩자 아니라고요. 이것 좀 풀고… 으악!"
아까 그 그물도 아닌 그냥 밧줄인데, 내가 몸을 비틀자 또 조여 온다.
그게 끝이 아니다.
퍽!
난쟁이 녀석이 손에 들고 있던 네모난 쇠망치로 내 머리를 때렸다.
기절.
* * *
깨어났다.
눈을 뜨지 않았다.
여전히 수레에 묶여 이동 중이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놈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방법을 찾아 탈출해야겠다.
빌어먹을 난쟁이 녀석들.
두고 봐라.
일단 기감으로 주위의 상황을 파악……. 젠장!
"깼어요?"
또 걸렸다.
"쉿!"
"아, 네."
어린 난쟁이 녀석이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험상궂게 생긴 다른 난쟁이 녀석들과 달리 좀 착해 보인다.
금발에 수염까지 금색으로 좀 미소년 티도 나고.
아직 어려서 그런가 보다.
놈을 이용해야겠다.
"난 첩자 아니다."
"아… 네. 네. 하하."
"진짜 첩자 아니야."
"네, 그래요. 하하."
음, 통하지 않는군.
내가 좀 멍청했다.
다시.
"난 나태한이라고 한다."
"네, 저는 골디라고 해요."
"골디?"
"네, 올해 성년식을 치르고 처음으로 원정을 따라왔어요. 그런데… 하아! 인간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뭐, 다들 그렇겠지만요."
"나도 난쟁이가 처음이다."
"정말요?"
뭘 저렇게까지 놀라지?
그나저나 녀석이 나에게 매우 호의적이다.
좀 더 친해지고, 이 녀석의 마음을 빼앗은 후, 큭큭큭.
탈출이다.
"성년식을 치렀으면 열여덟? 그럼 형이라고 불러. 난 열아홉이니까."
"네? 저……."
"왜?"
"저 마흔한 살인데요?"
"……."
뭔 소리야?
마흔한 살에 성년식을 치렀다고?
수염이 길긴 길다.
피부는 아직 뽀송뽀송한데, 금빛 수염이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의 절반 정도는 될 것 같다.
아! 뭐야?
여긴 우리와 나이가 다른가?
"정말 마흔한 살이야?"
"네, 그러면 제가 형……."
"올해 성인식 치렀다면서?"
"네."
"난 작년에 치렀어. 그러니까 내가 형이지."
"아! 맞다. 책에서 봤어요. 인간과 우리 드워프(Dwarf)들의 수명이 다르다고."
방금 드워프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난쟁이로 이해된다.
행운석의 통역 기능이다.
음,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래서 너희는 몇 살까지 사는데?"
"보통 300살까지는 살죠."
300살?
"거짓말하면 혼난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그것도 1,000년 만에 나타난 인간한테요."
"1,000년?"
"네, 아저씨가… 아니, 형이라고 부를게요. 괜찮아요, 태한이 형?"
"응, 뭐 그렇게 불러라."
"와! 인간인 형이 생기고. 이번 원정에 따라오길 정말 잘했네요. 하하하."
"그런데 방금 그건 무슨 소리야? 1,000년 만에 나타난 인간이라니?"
"정말 몰라요?"
"몰라서 묻잖아."
"1,000년 전의 마왕 세계 대전. 그때 인간 종족이 모두 멸종한 줄 알고 있어요. 엘프(Elf)도 그때 멸종했고, 우리 드워프들과 비슷하게 생긴 호르빗(생각하는 그거 맞음)도 모두 멸종했고요."
"멸, 멸종? 인간이?"
"네."
아! 여긴 뭐 하는 세상이야?
인간이 멸종했다니.
아니, 근데 인간이 멸종했는데 난쟁이들은 살아남았다?
설마, 저 난쟁이들이 인간을 멸종시킨 건가?
"저기… 형."
"……?"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말해라."
"우리 드워프하고 인간은 꽤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책에서 읽었어요. 엘프와는 많이 싸우고 전쟁도 했지만, 인간과 우리 드워프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너희가 멸종시킨 게 아니라는 말이야?"
"네."
"그럼 누가 인간을 멸종시켰지? 그 엘프인가 호르빗인가 하는 애들까지."
"누구긴 누구겠어요? 마왕과 오크들이지."
마왕? 오크?
마왕은 대충 알겠는데, 오크는 또 뭐야?
아! 돌겠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골디요."
"골디 동생."
"네, 태한이 형."
"풀어 줘."
"헤헤헤."
"웃지 말고. 나 인간 맞아. 첩자니 뭐니가 아니고."
"그게… 헤헤, 죄송해요. 마을로 돌아가면 촌장님이 확인해 주시고, 풀어 줄 거예요. 그러니 그때까지만 조금 참아요."
아! 어떻게 꼬시지?
됐다.
상황 파악이 먼저다.
"그럼 이 세상에는 너희 드워프하고 오크만 살아? 나머지는 다 멸종했고?"
"홉 고블린(Hof Goblin) 녀석들도 있어요. 꽤 성가신 존재죠. 그리고 많은 동물도 살죠. 예를 들어 와이번(Wyvern, 익룡)도 가끔 보이고, 아! 트롤(Troll). 트롤 녀석들은 꽤 무시무시해요. 저도 이번 원정에 나와서 처음 봤어요. 아, 맞다. 그리고 1,000년 동안 보이진 않았지만, 드래곤(Dragon)도 어딘가에 분명 존재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드래곤이라.
용으로 이해되는데.
용이 산다고?
"그래도 역시나 우리 드워프가 세상의 7할을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척박한 땅에 오크들이 우글대고 있어요."
"이번 원정도 오크란 놈들 때문인가?"
"네, 이 녀석들이 살길을 줬음에도, 계속 우리 영역을 침범해 우리 드워프를 죽이고 음식과 재산을 약탈해 갔거든요."
골디를 포함해 현재 이들의 숫자는 열세 명이 전부다.
나머지는 죽었나?
아니다.
다들 멀쩡해 보인다.
그럼 단 열세 명으로 침략한 오크들을 소탕하러 원정을 떠났다는 소린데.
오크들은 얘네들보다 더 작나?
무슨 여우 정도 되는 거야?
아니지, 여우도 얘네들한테는 맹수일 텐데.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형?"
"오크에 관해서 설명해 줘."
"정말… 몰라요? 오크를요?"
"응."
"아, 네. 뭐, 그게… 그러니까 신장은 2미터 정도 되고."
"잠깐! 신장이 2미터라고? 거짓말하면 혼난다."
"에이, 아까도 그러더니. 제가 거짓말을 왜 해요?"
"그래, 계속해."
"아! 참고로 조금 전에 말한 트롤 있잖아요. 걔들은 키가 4미터에서 큰 놈들은 6미터가 넘어요. 보통 엄청나게 커다란 방망이를 들고 다니는데, 한 번 휘두르면 집 하나가 통으로 박살이 나요."
얘가 지금 나를 놀리나?
세상천지에 그런 게 어딨어?
일단 더 들어 보자.
"그래서?"
"오크요? 생긴 게 굉장히 흉측하고… 그런데 형은 수염이 없네요?"
"왜? 이상해?"
"아, 아니요……. 뭐, 좀… 그냥……. 헤헤."
뭐지?
뭔가 불쌍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은데?
"오크는 2미터의 키에 흉측한 얼굴과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고, 보통 떼거지로 몰려다녀요. 굉장히 호전적인 놈들로, 사냥도 하지만 그보다 약탈을 더 즐겨요. 요즘엔 우리 근처에 오려면 목이 열 개라도 부족할 텐데, 그래도 오더라고요."
"무기는?"
"별의별 무기를 다 쓰죠. 칼도 쓰고, 도끼도 쓰고, 쇠몽둥이나 돌 몽둥이. 철퇴나 창도 써요."
골디라는 이 녀석, 한없이 순수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오크 녀석들이, 심지어 떼거지로 몰려다니는데, 어떻게 너희 난쟁이들이 상대할 수 있냔 말이다.
그것도 칼도 아닌 망치를 무기로 쓰면서.
말이 안 된다.
"아! 맞다. 우리 왕국 이름 알아요?"
밧줄에 묶인 상태로 거짓말쟁이 드워프 골디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도토리국이라고 해요. 우리 도토리국의 국왕은 아르네 도토리라고 하고, 우리 마을은 서도토리촌이고, 촌장은 건힐드예요. 건힐드는 올해 정확히 250세가 됐어요."
이 녀석.
날 놀리는 게 분명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게 했던 말들 모두가 다!
거짓말이다.
빌어먹을 새끼.
하여간 곱상하게 생긴 놈들은 믿지 말아야 한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까.
그때 선두에서 가던 난쟁이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해가 지기 전에 마을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러다 오크 녀석들이라도 만나면 꽤 고생하겠어."
"화살이 얼마나 남았는데?"
"300발 정도밖에 안 남았어."
"한 번 쏘면 다 떨어지겠군."
"그러니까 좀 더 서두르자고."
"서두를 것까지 있어? 그래 봤자 오크 녀석들인데. 100마리고 1,000마리고 오라고 해. 나 누트가 이 망치로 모두 때려눕혀 줄 테니까."
"누군 오크 따위가 무서워서 그래? 화살도 떨어진 데다가 인간으로 위장한 마왕의 첩자까지 잡고 있잖아. 그러니 서둘러 가자고."
"그래, 알았어. 어이! 다들 걸음 좀 빨리 움직이자!"
이동 속도가 좀 더 빨라졌다.
그런데 이 난쟁이 녀석들.
죄다 거짓말쟁이들이다.
화살이 300발 남았는데, 한 번 돌리면 다 떨어져?
뭐, 화살을 한 번에 300발씩 쏘냐?
하아! 돌겠네.
난쟁이 왕국에 온 게 아니라, 허풍쟁이 왕국에 왔나 보다.
행운석은 왜 이곳으로 나를 보냈지?
괴인을 죽일 엄청난 신병이기를 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허풍을 떨어서 괴인을 물리치라는 건가?
거짓말을 배우라고 온 거야?
행운석아! 답을 좀 다오.
여기 뭐 하는 곳이냐?
그때.
바사삭.
분명 들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 좌우의 빼곡한 수풀이 바삭거렸다.
기감을 펼쳤다.
그전에 이미 드워프들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이동을 멈추었다.
곧, 내 기감에 기괴한 기운들이 감지됐다.
수십… 아니다.
300?
그 이상이다.
그것도 상당히 강인하고 흉포한 기운들이다.
설마, 진짜 오크라는 놈들인가?
그때였다.
"그만 숨고 나와라, 이 돼지 머리들아!"
조금 전 그 누트라는 드워프가 외쳤고.
곧이어…….
"꿰웨에에에엑! 난쟁이들을 모두 죽여라!"
"와아아아아아아아!"
"쿠와아아아아아아!"
산길 양측에서 수백 마리의, 저건… 오크다.
골디가 아까 묘사한 그 모습 그대로의 오크들.
아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흉측하며 사납다.
그것들이 무시무시한 칼과 창, 철퇴를 들고 마구 돌진해 온다.
젠장.
죽었다.
"날 풀어 줘! 날 풀어 달란 말이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도 듣지 않는다.
아니, 그때.
난쟁이들이 수레 주위로 몰려들었고.
나를 풀어 주려고 그러나?
젠장!
아니다.
수레를 중심으로 전열을 갖춘다.
그러더니…….
척!
난쟁이 한 녀석이 몸을 펄쩍 뛰어 수레 위에 올라탔다.
나를 등지고, 내 발아래 쪽에 있던 무언가를 덮은 천을 확 걷어 냈다.
난쟁이 녀석이 뒤를 돌아 나를 보며 씩 웃는다.
"마왕의 첩자야, 이런 건 처음이지?"
곧이어 난쟁이 녀석이 마구 달려오는 수백의 오크들을 향해.
"기관연사궁(Gatling bow)이라고 한다. 죽어라!"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소리를 지르며 손잡이를 마구 돌리니, 화살이 마구 날아간다.
거짓말이 아니라 눈 한 번 깜짝할 사이 300발의 화살이 정확히 오크들을 향해 꽂혔다.
"꾸웨에에에에엑!"
"크아아아아아악!"
무시무시한 오크들이 마른 볏짚 쓰러지듯 쓰러졌다.
300중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이 난쟁이들… 뭐 하는 놈들이야?
방금 그 기관연사궁은 또 뭐고?
정신이 혼미했다.
하지만 아직 절반, 150마리가 훌쩍 넘는 오크들이 남았다.
놈들은 골디의 말처럼 호전적인 놈들이었다.
동료들이 죽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다.
또 뭐가 있나?
고작 열세 명의 난쟁이들은 그 누구도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니다.
망치를 움켜잡고.
오크들을 노려보는가 싶더니.
"돌격! 오크들을 모두 쓸어 버리자!"
"와아아아아아아!"
열세 명의 난쟁이들이, 자신보다 두세 배나 더 커다란 150의 오크들을 향해 그냥 돌진.
콰콰쾅!
퍽퍽퍽!
"꾸웨에에에엑!"
"끄아아아아아악!"
진짜 얘네들 뭐야?
난쟁이들이 뭐 이렇게 용맹한 건데?
열셋 난쟁이들의 오크 대학살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