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65화 (64/174)

65화

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

콰르르르르르르릉.

무승부다.

둘의 마지막 격돌로 땅이 밭고랑처럼 길게 파이고, 군데군데가 터져 나갔다.

어깨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궁도산.

이백운이라고 멀쩡하지 않았다.

입가로 검은 피 한줄기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내 뭔가 전음을 주고받았는지,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이백운이 겁에 질린 혈교의 애송이들을 향했다.

"그대들의 선조와 우리 선조들께서 화친을 맺고, 약속을 하였다고 들었소."

두려움에 덜덜 떨 뿐.

혈교의 후예들은 감히 그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백운이 그런 그들을 쭉 훑은 후 말을 이었다.

"선조들의 약속을 저버리고 혈교를 재건할 생각이라면, 나 화산의 이백운부터 꺾어야 할 것이오!"

작은 화산이 그 자리에 치솟아 만들어진 느낌이다.

이백운이 그렇게 보였다.

재수 없는 녀석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확실히 검선의 제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엄청난 기세와 위엄.

1,000명에 달하는 혈교의 후예들을 일방적인 기세로 찍어 누르고 있다.

그때.

"오, 오해가… 오해가 있으십니다."

이번 모임의 시작을 이끌던 20대 후반의 사내.

그가 덜덜 떨면서도, 그나마 나이가 가장 많아서인지 용기를 내어 나섰다.

"오해입니다, 대협. 우리는… 우리는 그저 친목 다짐을 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러자 궁도산이 나섰다.

호랑이 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한 번 모이고, 두 번 모이고, 세 번 모이면 계속 모이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것이 혈교의 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와!

이 새끼까지.

무존의 제자다.

이백운에게서 꼿꼿하면서도 범접하기 힘든 그런 화산의 기운이 느껴진다면.

무존의 제자인 궁도산에게선 그냥 모든 걸 부수어 버릴 것 같은 무지막지한 파괴적 기운이 폭발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어 대던 사내는 그런 궁도산의 기세에 눌려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더니 울먹이기까지 하며.

"아니에요. 다음 모임은 250년 뒤에 열릴 거란 말이에요. 어어엉."

결국 울음까지 터뜨렸다.

뭐, 그 뒤의 일은 설명할 필요 없었다.

들뜬 얼굴로 모였던 1,000명에 달하는 혈교의 후예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짐을 챙겨 각자의 고향으로 도망치듯 그렇게 떠났다.

250년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이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혈교의 재건이나 준동은 걱정할 필요가… X팔!

진짜 임무가 따로 있었어.

* * *

혈교 애송이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고.

우리만 남았다.

"상황을 설명해 주시오, 단문령 소저."

이백운이 물었고, 단문령이 고개를 끄덕인 후 우리를 향해 설명을 시작했다.

"놈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그야말로 신출귀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놈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인근 스무 개 마을에서 서른두 명이 되고, 이를 잡으려고 나섰던 부족의 전사 마흔한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공동파의 제자도 열셋이 사망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공동파 제자의 사망이란 말에 길 안내를 맡기 위해 합류한 공동파의 3대 제자 복개 도장이 흠칫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지금껏 그조차 그러한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이백운이 다시 단문령을 향해 물었다.

"흉수가 몇 명이오?"

"모릅니다."

"사문이나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는요?"

"밝혀진 바 없습니다."

이백운에 이어 궁도산과 당우국까지 질문을 던졌지만, 단문령에게서 돌아온 답은 허무하기만 했다.

그러자 아미파의 서혜가 말했다.

"나무아미타불, 흉수를 본 사람은 모두 죽었다는 말이군요."

서혜의 말에 단문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사건 현장의 상태와 시체들을 살펴본 바로, 흉수가 쓴 무공이 매우 기괴하고 사이(邪異)하다는 것뿐, 어떤 무공을 썼는지 몇 명인지 추론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다시 이백운이 나섰다.

"그건 단 소저의 생각이오?"

"아니에요, 공동파의 일 장로 복마도도(伏魔道道) 혼원 도장과 무림맹 섬서 지부의 지부장인 추한검사(秋恨劍士) 등원 대협이 직접 확인한 내용입니다."

"현재 대처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감숙은 우리 중원 황제의 힘이 미치지 못한 곳입니다. 무림맹 지부도 없고요. 부족 단위로 삶을 사는 지역이라 제대로 된 대처도 어렵고, 사람들이 죽어 간다는 소문에 이곳 사람들 모두 큰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감숙은 엄연히 새외(塞外)고 다른 민족들이 사는 지역이다.

다만 공동파가 오랜 세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이다.

"공동파에서 대대적으로 제자를 파견했습니다. 말씀드린 일 장로 혼원 도장이 직접 2대 제자 180명을 이끌고 흉수를 추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고, 오히려 열세 명의 제자를 잃었습니다."

"음……."

"결국 무림맹에 지원 요청을 했고, 가장 가까운 무림맹 섬서 지부에서 지부장인 등원 대협이 지부의 고수 60명과 섬서 무문의 고수 500명을 이끌고 합류한 상태입니다."

"진척이 있습니까?"

단문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까 말씀드린 것 외에는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흉수에 의해 매일 민간의 시체들만 늘어나고 있고요."

"우리는 따로 움직여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공동파와 무림맹 측에서 대규모로 움직이다 보니 흉수가 미리 감지하고 도망가는 게 아닐까 싶어, 등원 대협이 따로 별동추적대(別動追跡隊)를 요청한 거예요. 공동파, 무림맹 추적대와 반대 방향에서부터 흉수를 추적하면 됩니다. 물론 길 안내는 감숙의 지리에 능숙한 복개 도장께서 맡아 주셔야 할 거고요."

공동파의 복개 도장은 이러한 일에 대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듯, 단문령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모두를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나.

알았다.

왜 우리 모임이 이따위로 조직된 건지.

복개는 말 그대로 감숙의 지리를 잘 아니까 길 안내고.

반후인은 신출귀몰한 흉수를 추적하는 임무고.

팔선문의 말추는, 흉수가 사이한 무공을 쓰니 이를 대비한 것이다.

사이하다는 말이 그냥 말이 그런 거지, 한 마디로 사술이고 술법이란 뜻이다.

그럼 나는?

순화자와 속리자의 뜻이다.

상취개를 통해 내 무위에 대해 상세히 들었을 것이고.

난, 휴우.

비밀 병기다.

"왜 나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지?"

내가 물었다.

이백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물었다.

"명령이었다."

"왜?"

"왜인지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고. 왜 그런지 따지고 싶다면 내가 아닌 무림맹에 물어라.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재수 없는 놈.

옆의 궁도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빤히 쳐다보며 답도 안 한다.

당우국도 같은 반응이고.

아미파의 서혜는 내 시선을 피했고.

복개와 말추는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역시나 이렇다 할 설명은 없었고.

반후인만이…….

"나도 궁금했어. 그래서 물어봤는데, 그냥 끝까지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무림맹 무슨 장로가 신신당부했다고 하던데. 에이, 그래도 뭐 어떻게 해? 여기까지 왔는데. 가자. 나의 열랑이 그깟 흉수쯤은 금방 찾아낼 거야. 그러니 후딱 해치우고,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돌아가자고. 기분 풀어, 태한아."

반후인이 나를 위로했는데.

하아!

정말.

어쩌지?

"야, 반후인."

"응, 태한아. 왜?"

"네 개새끼, 아니, 늑대."

"응, 우리 열랑이 왜?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정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믿어! 우리 열랑은 천 리 밖의 냄새까지 맡는 영물이야. 정말이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놀란 얼굴을 하는 반후인.

반후인만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이들 앞에서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더니 다들 의외라는 얼굴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열랑 이 개새끼 좀 뜯어 보라고. 또 내 엉덩이를 물고 있잖아."

아! 침 열나 묻었다.

비싸게 주고 산 옷인데.

에라이, 모르겠다.

가자!

흉수가 어떻게 생겼나 구경이나 좀 하자.

어차피 싸움은 저 잘난 녀석들이 하겠지만 말이다.

뭐, 큭큭큭.

저놈들이 흉수에게 당하면, 그때 내가 짠! 하고 나타나서.

큭큭큭.

어린놈의 새끼들.

감히 거지 무서운 줄 모르고.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난, 비밀 병기다.

* * *

공동파와 무림맹의 공동 추적대는 북에서부터 포위망을 펼쳐 흉수를 추적 중이다.

우리는 그 반대인 남에서부터 흉수의 행방을 쫓기 시작했다.

"반후인, 열랑 이 녀석 개코 맞아?"

"개코가 아니라 늑대 코."

"그런데 왜 냄새를 못 맡아?"

"아직 아니지. 무슨 냄새를 맡아야 하는지 모르잖아."

"말귀는 못 알아듣는 모양이지?"

"에이, 아니야. 사람 말을 귀신처럼 알아듣는데."

"저기, 봐 봐."

"응? 뭐?"

"똥 싸고 있잖아. 흉수 추적하라니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봐. 흉수의 냄새를 딱 한 번만 맡으면… 어?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동시에 선두에서 길을 가던 공동파의 복개 도장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말했다.

"저 앞에 창족이라는 부족이 있습니다. 일단 저곳으로 가서 동태를 살펴보죠."

복개 도장의 말에 따라 다들 움직이려 할 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던 반후인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벌써 복개 도장 옆으로 향해 있었고, 그 옆에는 다시 열랑이 개코를 벌렁거리며 으르렁거리고 있다.

심각한 얼굴의 반후인이 우리를 향해 말했다.

"무언가 있어요. 빠르고 은밀하게 제 뒤를 따라오세요."

그렇게 반후인과 열랑이 앞을 치고 나갔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은형술을 펼쳐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창족이 사는 마을.

80구의 시체만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빠르게 현장을 확인했고, 시체들까지 확인했다.

총 81구의 시체였고, 역시나 기괴한 힘에 의해 살해당했다.

단문령이 말했다.

"이번 일로 돌아가신 분이 여든여섯 명에서 백일흔한 명으로 늘었네요."

분위기가 사뭇 심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주위를 경계하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열랑만이 계속 시체와 마을을 맴돌며 냄새를 맡았고, 그 옆을 반후인이 기형반월도 두 자루까지 모두 꺼내어 지켰다.

곧이어.

"으르르르렁."

"열랑이 냄새를 맡았어요. 준비하세요. 열랑, 쫓아!"

반후인의 명령에 열랑이 달리기 시작했다.

개새끼인 줄 알았는데, 늑대 맞다.

그것도 영물 늑대다.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팔선문의 술사 말추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자, 선두에서 달리던 이백운과 궁도산이 동시에 뒤를… 응, 그냥 보고 간다.

"업혀."

"죄, 죄송합니다."

내가 업고 달렸다.

녀석과 녀석의 커다란 봇짐까지 모두 다.

이젠 알고 있다.

녀석의 봇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사술을 상대할 부적이나 주술 등에 쓰일 물건들일 테다.

그나저나 정말 이렇게 쫓아가도 되는지 모르겠다.

공동파의 2대 제자 열세 명을 죽인 흉수다.

2대 제자라 함은 보통 30대에서 40대의 나이로, 지금 내 앞에서 달리고 있는 칠룡사봉이니 뭐니 하는 후기지수들보다 한 항렬 높은 배분이다.

이백운과 궁도산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공동파의 2대 제자들이다.

절대 이백운과 궁도산 따위의 아래라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심지어 열세 명이 모두 전멸했다.

흉수는 한 명의 도주도 허락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내 앞에서 지금 달리고 있는 놈들이 흉수를 처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 이 무식하게 용맹무쌍한 어린놈의 새끼들은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지 그냥 달린다.

흉수를 만나서 어쩌겠다고?

어린놈들이라 겁이 없나?

뭐, 나도 어리긴 하지만.

그런데 왜 안 말리냐고?

난, 비밀 병기니까.

녀석들이 흉수에게 혼쭐나는 것 좀 구경하다가, 짠! 하고 나서서 흉수를 물리쳐 줘야겠다.

그래야 앞으로 이 녀석들의 시건방진 꼴을 안 보게 될 테니까 말이다.

내가 그런 생각과 함께 혼자 키득키득 웃으며 달리고 있을 때.

열랑이 걸음을 멈추었다.

드디어 흉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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