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나태한?"
화산파의 이백운과 무황성의 궁도산이란 놈이 벌써 저 멀리 가고 있을 때, 조금 까만 피부에 가죽옷을 입은 녀석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허리 뒤편에 기형적으로 생긴 반월도 두 개를 교차로 맨 녀석이다.
"반가워, 난 반후인이라고 해."
"아! 어, 그래. 반가워. 야수궁에서 왔다고?"
"응."
"우리 중원 말이 능통하네?"
"중원에 온다고 몇 년 전부터 열나게 배웠거든. 하하!"
"존댓말은 안 배웠나 봐?"
녀석이 씩 웃는다.
"네 정보 봤어. 동갑이잖아. 좋게 가자고. 응?"
"그래, 뭐 나도 편하고 좋지."
"그런데 너 개방 방도 맞아? 개방이면 거지로 알고 있는데, 옷이 너무 깔끔한데?"
"특별한 임무를 수행 중이잖아. 이럴 땐 평범하게 입어."
"아! 그렇구나. 그나저나 진짜 반갑다. 저 앞에 가는 두 놈 있잖아! 휴우, 진짜 죽는 줄 알았다."
"……?"
"아니, 몇 년 동안 중원 말을 열나게 공부해서 왔는데, 말을 안 해. 너 기다리는 사흘 동안, 한마디를 못 했다. 뭔 놈의 입들이 저리도 무거운지. 그래도 너를 만나 너무 다행이다. 진심으로 반갑다, 친구야."
"어, 그래. 나도 반갑다. 그런데……."
"으르르렁. 크르렁."
"아! 얘는 열랑이라고 해. 내가 키우는 녀석인데, 안 물어. 걱정 마."
"벌써 물고 있는데?"
빌어먹을 개새끼, 아니 늑대 새끼가 내 엉덩이를 물고 있다.
피 난다.
물론 내 엉덩이가 아닌 녀석의 이빨에서 나는 피다.
"앗! 미안. 놔! 열랑! 놔! 놓으라고! 그렇지. 착하지."
늑대 새끼가 내 소중한 엉덩이를 물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말이라도 한마디 할 수 있는 녀석이 있어서.
* * *
"내가 내겠다."
"내가 낸다."
"점심 밥값은 내가 낸다고 했다. 나를 시험하지 마라."
"이번엔 내가 낸다. 너야말로 더는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화산의 이백운과 무황성의 궁도산이 입을 열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다.
객잔에서 식사를 하고 계산할 때다.
"쟤들 왜 저래?"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는 나와 반후인.
내가 반후인에게 물었고.
"몰라. 밥값 계산할 때면 항상 저래. 냅둬."
"별 이상한 놈들을 다 보겠네. 돈이 남아도나? 저러다 진짜 싸우고 그러지는 않아?"
"처음엔 나도 조마조마했는데, 안 싸우더라고. 그래도 이번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는가 봐."
"그나마 다행이네. 열랑은?"
"아까 봤잖아. 밖에 묶어 뒀잖아."
"지나가는 사람 물고 그러지 않아?"
"에이, 우리 개는 안 문다니까."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열랑이 지나가는 여자 엉덩이를 물었다.
밥값으로 이백운이 은자 한 냥을 냈는데, 반후인은 열랑에게 엉덩이를 물린 여인의 치료비로 은자 석 냥을 줘야 했다.
* * *
사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사천당가의 칠비독우 당우국과 아미파의 포옥검 서혜, 마지막으로 팔선문의 말추라는 술사와 합류했다.
"반갑소, 하하."
"나무아미타불. 반가워요."
아! 이백운하고 궁도산 말이다.
이 새끼들 평소에도 말할 줄 아는 놈들이었어.
심지어 웃기까지 한다.
여자의 힘이다.
삭발까지 한 비구니였지만, 그래도 여자라고 이백운과 궁도산이 웃고.
그보다 더 날카롭게 생긴 당우국과도 분위기가 좋다.
"반, 반갑습니다. 저는 팔선문의 말추라고 합니다."
말추라는 술사는 시종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다가, 그나마 좀 편하다고 생각했는지 나와 반후인에게로 와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얘는 또 상태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혈교 애들과 싸우러 가는데, 진검이 아닌 목검을 가지고 왔다.
이사라도 가는지 봇짐이 가득한데, 진검도 아닌 목검을 허리춤도 아니고 그 봇짐에 끼워 넣은 상태다.
그나저나 이거 어째 분위기가 좀 그렇다.
아미파의 서혜와 당가의 당우국도 우리에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확실히 편이 갈리는 그런 미묘한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되어 버렸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그리고 나머지?
사천에서 감숙으로 가는 내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런 선을 긋고 두 부류로 나뉘어 움직였다.
아! 나도 구파일방인데, 거지는 안 끼워 주는 건가?
됐다.
나도 별 관심 없다.
* * *
감숙에 도착해 마지막 일원인 공동파의 복개 도장과 합류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그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뭐, 은밀히 움직이고 몸을 숨기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연스레 공도(公道)를 걸었고, 변방의 한산한 길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제법 되는 수의 무인들을 볼 수 있었다.
대체로 분위기가 좋았다.
역시 애송이라 그런 것일까?
우리를 의심하는 눈초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혈교의 후예들이 최종 목적지를 바로 앞에 둔 지점에서, 우리는 따로 마지막 임무에 대해 복기를 하기도 했다.
나이가 스물네 살로 가장 많은 화산의 이백운이 우리를 이끌었고.
그걸 못마땅하게 보는 눈치였지만, 무황성의 궁도산도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결국, 누가 진짜 무리의 대장인지는 혈교의 결투장에서 판가름 날 것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는 비단 이백운과 궁도산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당우국과 서혜에게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야수궁의 반후인이랑 팔선문의 말추는 왜 이 무리에 끼워 넣은 거지?
추적이고 뭐고 할 게 없다.
심지어 지금까지 길이며 객잔에서 봤던 혈교의 애송이들은, 말 그대로 애송이다.
강시?
강시가 아니라 간단한 사술도 부릴 줄 몰라 보였다.
그저 어디 산에 꼭꼭 틀어박혀, 지금까지 자신들의 아버지에게서 전수받은 혈교의 무공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들뿐이다.
한마디로 무림의 무슨 거대한 음모니 혈교의 준동이니 하는 분위기는 찾을 수 없었고.
철부지들 무공 자랑 잔치 정도 되는 분위기다.
진짜 뭐지?
반후인과 말추는?
거기에 솔직히 길 안내라고 하지만, 혈교 애송이들의 모임 장소가 뻔히 드러난 곳이라 길 안내고 뭐고도 필요 없다.
공동파의 복개 도장도 굳이 우리 무리에 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가장 의아한 건.
왜 순화자와 속리자가 기를 쓰고 나를 이 무리에 끼워 넣었느냐 하는 것이다.
딱 봐도 혈교 애들의 수준 미달이 눈에 보이는데.
정말 먼 훗날을 대비하기 위함인가?
아! 모르겠다.
일단 가 보자.
혈교 애들 무공 자랑 잔치 구경이나 좀 해 보자.
* * *
"감개무량합니다! 정말 모두 모여 주셨군요!"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드디어 혈교 애들 무공 자랑 잔치가 시작되었다.
1,000명가량이 모였다.
하나같이 들뜬 얼굴들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역시나 제대로 된 고수를 찾아볼 수 없다.
20대 후반의 한 사내가 혈교 후예들의 모임을 이끌었고, 장황한 연설이 끝난 후 비무 대회가 시작되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수준 미달이다.
저 수준으로 무슨 혈교를 재건하겠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얼마나 애들 수준이 떨어졌는지, 오늘을 잔뜩 기대하고 있던 이백운과 궁도산의 얼굴마저 잔뜩 일그러졌다.
심지어 나설 생각도 하지 않고 팔짱까지 낀 채 앉아 요지부동.
됐다.
녀석들은 녀석들의 임무를 수행하면 되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면 된다.
나는 우리 무리에서 떨어져, 비무의 시작과 함께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장내를 살피기 시작했다.
첫 번째 비무가 끝나고.
두 번째 비무와 세 번째 비무가 끝날 때까지.
뭐 하나 특이점이 없었다.
그냥 나도 애들 무공 자랑 잔치나 구경하다가 갈까?
이런 생각까지 했지만, 그래도 어디 그럴 수 있겠나?
혹시 몰라 좀 더 주변을 살피고, 제대로 된 고수가 하나라도 있을까 신중히 관찰하였다.
음, 없다.
고수라고 부를 만한 수준의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나서겠소!"
결국 참다못한 궁도산이 나섰고.
연전연승.
일부러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이며 다섯 명을 모두 3초식 안에 때려눕혔다.
"더 없소? 나를 상대할 자 더 없냐고 물었다!"
궁도산의 도발에 몇몇이 다시 비무대 위로 올라갔고.
결과는 뻔했다.
슬슬 마무리할 시간인 것 같다.
궁도산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혈교의 후예들을 마음까지 굴복시켜 다시는 혈교의 재건이니 뭐니 꿈도 못 꾸게 하면 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무가 너무 쉬운데?
여전히 복개 도장, 말추 술사, 반후인과 내가 이 무리에 합류한 이유를 알 수 없고.
됐다.
뭐, 다 끝났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새아빠한테 무공이나 배워야겠… 음, 있다.
혈교의 후예들 사이에서 드디어 한 명을 발견했다.
제대로 된 고수고.
무엇보다, 예쁘군.
그것도 많이.
미인국에 다녀왔던 내가 예쁘다고 평가할 정도면 정말 예쁜 거다.
심지어 비걸개의 눈으로 살폈을 때, 그녀는 변용을 하고 있다.
일부러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춘 것이다.
왜지?
그런데 그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곧이어 그녀가 나에게 다가온다.
궁도산과 혈교 후예의 비무로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이곳.
그 애송이들의 함성을 뚫고 그녀가 나에게 왔다.
하여간 이놈의 인기란, 하하하!
"한 푼 줍쇼?"
"한, 한 푼?"
아!
내 잘생긴 얼굴을 보고 접근한 게 아니었군.
"한 푼 줍쇼?"
고개를 갸우뚱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녀.
암구호다.
"먹고 죽으려고 해도 한 푼이 없다. 그 한 푼, 네가 나 좀 줘라."
난 곧바로 그녀를 무시하고 시선을 비무대로 향했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자세를 취했고.
- 나태한 소협 맞군요. 단문령이라고 해요.
- 아, 네. 반갑습니다, 단 소저.
- 네, 저도요.
- 남자분인 줄 알았습니다.
- 원래 남자였어요.
- 그게 무슨 말이죠?
- 오빠가 셋이나 있는데, 큰오빠는 장사하겠다며 안휘로 갔고. 둘째 오빠는 무관을 열겠다며 광동으로 갔고, 셋째 오빠는 어느 여자랑 눈이 맞더니, 더는 이 짓을 못 하겠다며 야반도주했어요.
- 아… 네, 그렇군요.
얘네 뭐야?
- 무림맹에서 첩보 활동비를 너무 많이 줘서, 오빠들이 배가 불러 그래요. 실망했어요?
- 아닙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혈교의 준동을 막기 위해 무려 250년 동안 헌신해 주신, 단 소저와 단 소저의 가문에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 풉. 돈 주니까 하는 거지요. 호호호.
- 아, 네. 뭐, 그렇죠. 돈이 중요하긴 하죠.
진짜 뭐야?
- 실망했어요?
- 아닙니다. 그래도 250년 동안이나 대대손손…….
- 그거 말고요.
- 네?
- 혈교 애들이요.
- 조금, 조금 그렇습니다. 이 정도로 형편없을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 250년이란 세월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저 친구들 대부분 농사짓다가 왔어요.
- 음, 그렇군요.
- 오! 이제 움직이나 봐요. 저 사람이 화산파의 예매화 이백운 도장 맞죠? 그 칠룡사봉 중에서도 수좌를 다툰다는 그 사람요.
- 네, 맞아요.
내가 막 허탈한 마음을 숨기며 단문령과 전음을 주고받을 때.
압도적인 무위로 다섯 명을 더 꺾은 궁도산에게 도전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자 이백운이 움직인 것이다.
저런 임무는 없었는데.
이백운은 임무 때문이 아니라 궁도산을 꺾고 싶은 거다.
"내가 도전해도 되겠소? 무황성의 소철권 궁도산 소협."
이백운은 심지어 궁도산의 정체까지 밝혔다.
당연히 1,000명에 달하는 혈교의 후예들은 발칵 뒤집혔다.
압도적인 무공을 선보인 궁도산을 향해 우레와 같은 함성과 지지를 보내던 그들이, 그의 정체를 알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린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소, 화산의 예매화 이백운 도장. 오시오!"
이어 이백운의 정체까지 밝혀졌고.
이젠 혈교의 후예들은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궁도산과 이백운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신병에 가까운 수투(手套)를 양손에 낀 궁도산.
그냥 검집에서 뽑기만 했음에도 화산의 매화 향이 번지는 보검을 든 이백운.
둘이 격돌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쾅쾅쾅쾅쾅쾅!
지금껏 애들 재롱 잔치와는 그 격이 달라도 하늘과 땅 차이로 달랐다.
검기과 권기를 넘어, 순간순간 아직은 어설프지만 검강과 권강까지 구사하는 두 사람.
확실히 칠룡사봉 중 수좌의 자리를 다툴만한 실력들이다.
저들의 검강과 권강이 내 눈에는 어설프다지만, 어찌 혈교의 후예들 눈에까지 그러하겠는가?
아니, 이들 중 대부분이거나 전부가 검강은 물론 검기조차 처음 봤을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은 놀라 자리에 주저앉고 오줌까지 지렸고.
또 몇백 명이나 되는 자들은 비명까지 지르며 수십 장 뒤로 도망가 몸을 숨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궁도산과 이백운은 임무를 잊은 채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대결을 펼쳤다.
진심으로 싸우는 중이다.
하여간 어린 녀석들이 자존심만 세 가지고.
- 나 소협,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냅둬요. 어차피 저 정도는 보여 줘야 혈교 애들도 더는 이상한 생각 안 할 테니까요.
- 아니, 그거 말고요.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다음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려고요?
- 다음? 다음 임무가 있어요?
단문령이 고개까지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 못 들었어요? 진짜 임무에 대해서요?
X팔!
내 이럴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