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뭐 하냐?"
"해장술 하셔야죠. 한 잔 마시고 푹 주무세요. 무슨 일인지는 자고 일어나서 다시 얘기하시고요."
"나 취했다."
"알아요. 그러니 한잔 더 마시고 주무시라고요."
"취했지만, 정신은 멀쩡하다."
"네, 네. 알겠으니까, 자! 쭈우욱 들이켜세요."
"네 이놈!"
"왜요? 뭐요?"
"사안이 준엄하다고 했다."
"혈교요?"
"그래, 이놈아!"
"낭만개 아저씨 빼돌린 거 장로님이죠?"
이 인간, 방금 나한테 눈으로 검강을 쏠 것처럼 노려보더니.
갑자기 사팔뜨기가 됐다.
고개도 두리번두리번, 갑자기 미친 척한다.
아놔!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하세요. 지난번 남경 일도 살 떨려 죽는 줄 알았어요. 아니, 실제로 독약 먹고 중독까지 됐었다고요. 그런데 뭐요? 혈교요? 혈교? 하아! 얼척이 없어서. 장로님! 저 열아홉 살이에요, 열아홉 살. 그런데 뭐요? 혈교의 준동을 막아요? 와! 하하하. 진짜 뭡니까?"
"어험. 어험. 걸이번. 아니, 태한아. 진정하고 좀 들어라."
"진정하게 생겼어요? 아니, 아무리 비걸개라고 해도, 적당히 시켜야죠."
"너밖에 없어서 그러지 않느냐?"
"선배 비걸개들은요? 우리 동기 비걸개 중에도 뛰어난 애들이 얼마나 많다고요. 너무 하잖아요."
"진짜 너밖에 없어."
"혈교를 막을 사람이요? 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진짜 취했어요? 혈교를 저보고 막으라고요?"
"그래, 막아야 한다. 네가."
이 인간.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나중에는 마교 교주하고도 싸우라고 하겠다.
이게 다 순화자랑 속리자 때문이다.
아! 도대체 얼마나 비싼 술을 사줬기에 육 장로가 나한테 혈교를 막으라고 하는 걸까?
잠깐!
그런데 이거… 어라?
"장로님, 혈교 망하지 않았아요? 250년 전에 마교에서 완전 박살 내 버렸다고 무림사 수업 때 배웠는데?"
"맞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음… 뭔가 있군요."
"그래, 그래서 널 찾아온 거다."
"꼭 저여야만 해요? 세상을 구할 영웅이 저밖에 없는 거예요? 진짜로요?"
"꼭 그렇다기보다는… 어험. 어험."
"됐어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그래서 뭔데요?"
"네 말대로 250년 전 마교가 혈교를 공격했고, 일방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혈교는 멸문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상당한 수의 혈교 교도들이 중원으로 도망을 왔다. 무림맹과 정파 무문에서 빠르게 대응을 했다."
내가 조금 전 따라 놓은 술을 벌컥벌컥 마신 후 말을 잇는 육 장로.
"그들은 조건 없는 투항을 했다. 당시 무림맹에서는 그들에게 혈교를 재건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겠다는 맹세를 받은 다음에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줬다. 그렇게 250년 동안 그들은 약속한 대로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또 마신다, 술.
"그런데 최근 첩보가 들어왔다. 술 더 없냐?"
아이씨, 이거 낭만개 아저씨가 무공 가르쳐 주면 고맙다고 줄 거였는데.
"여기요. 이것까지만이에요. 나머진 낭만개 아저씨 줄 거예요."
"알았다."
다시 병째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후.
"어디까지 얘기했지?"
"첩보 들어왔다고요."
"그래, 첩보가 들어왔다. 혈교가 준동할 조짐을 보인다는 첩보다. 그것도 중원 무림과 마교의 경계인 감숙에서 말이다."
"공동파가 있는 곳이네요?"
"그렇지. 무려 250년 동안 잠잠했는데, 그 후예들. 그러니까 너처럼 젊은 혈교의 후예들이 혈교를 재건할 생각으로 모이기로 했단다. 중원 각지에 떨어져 살았고, 상당수는 새외의 다른 나라에서 살아서 서로 얼굴조차 모르며 200년을 넘게 살아왔던 그들이다."
"……."
"하지만 몇몇 주요 고수들이 연락망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게 젊은이들에게 이어져 혈교의 재건을 모의하게 된 것이다."
"장로님, 저 아직 장가도 못 갔어요."
"거지가 장가는 가서 뭐 하냐? 그냥 어디 눈 맞는 여인 있으면, 후다닥 해치우고, 애 낳고, 뭐 그렇게 알콩달콩 살면 되는 거지."
"그러니까요. 그 눈맞는 여인도 아직 못 만나 봤다고요."
"어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임무가 아니다."
"혈교의 재건, 혈교의 준동. 그냥 대충 들어도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데요?"
"네 임무는 그게 아니야. 넌 보조. 그냥 따라다니며 도울 게 있으면 돕고, 그냥 그러면 돼."
"휴우, 잘도 그렇게 되겠네요."
"진지하게 들어라."
"목숨이 걸린 일인데, 진지하게 들을 수밖에 없잖아요."
"혈교에서 노고수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모양이다. 다만, 젊은이들을 막지도 않고 있어. 묵인하는 것이지."
"그럼 애들만 모인다는 소리네요?"
"그렇다."
"애들끼리 모여서 뭘 어쩐다고요?"
"먼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지. 각자 혈교의 마공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그들이 모여 혈교를 재건하고, 그것이 10년, 20년이 지나게 되면, 얼마나 무서워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음, 그렇긴 하겠네요."
"그들이 이번에 모이는 이유도 알아냈다. 혈교 재건에 앞서 초대 교주를 뽑으려는 것이다. 강자존의 법칙에 의해서."
"서로 싸우고 강한 놈을 교주로 뽑는다는 말이네요? 그걸 기반으로 혈교를 재건하고요."
"그렇다. 그러니 싹이 자라 커다란 나무가 되기 전에 잘라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간단하다. 아직 놈들은 제대로 된 조직의 정비도 없고, 그저 힘만 믿고 뭉치려는 애송이들이다. 250년 동안 떨어져 살았기에 서로의 얼굴도 모른다."
"그래서 젊은 제가 가야 하는 거군요? 제가 첩자인지 혈교의 후예인지 그들도 모르니까요."
"그렇지."
"그다음에는요? 침투해서 뭐 해요?"
"말하지 않았느냐. 강자존의 법칙에 의해 재건할 혈교의 초대 교주를 뽑는 자리라고. 싹 다 이겨 버리면 끝이다."
"알겠어요."
"응?"
"알겠다고요. 제가 무얼 해야 할지."
"……?"
"참 나, 진즉 말씀하시지. 저더러 가서 혈교 초대 교주 뽑는 싸움에 참가해, 죄다 꺾어 버리라는 말이잖아요. 휴우, 어쩔 수 없죠. 후딱 해치우고 올게요."
"……?"
"표정이 왜 그래요?"
"넌 내 말을 귓등을 듣는구나?"
"뭐가요? 방금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벌이다. 술 한 병 더 줘라."
"그거 벌이 아니라 협박 같은데요?"
"목이 말라 그렇다."
"쩝."
한 병을 더 내줬다.
"됐죠? 어디로 가면 되는데요? 빨리 가서 죄다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어 버리고 오면 되는 거잖아요."
"그래도, 쯧쯧."
"뭐가요?"
"아까 말했잖아. 넌 보조라고."
"보, 보조요? 제가요? 천하의 걸이번 나태한이 보조라고요?"
"어험, 그래. 보조. 넌 보조 자격으로 가는 거야."
"그럼 그 혈교 후예들은 누가 꺾는데요? 저 말고 누가 그걸 한다고요?"
"무황성 무존의 제자. 화산파 검선의 제자, 사천 당가 독선의 아들. 사봉 중 으뜸인 아미파 포옥검. 더 말해 주랴?"
"……."
갑자기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 무존의 제자?
검선의 제자?
독선의 아들?
칠룡사봉 중 사봉의 수좌 포옥검?
"저… 진짜로 보조예요?"
"그렇다. 혈교의 후예들과 싸우는 건 그들이면 충분하다. 맹주님께서 직접 무존과 검선 그리고 독선께 부탁해 그들이 차출되었다."
"저는요?"
"짐작하고 있지 않으냐? 순화자 장로와 속리자 장로가 맹주님께 억지로 우기고 우겨서 이번 임무에 너를 끼워 넣은 거."
"우겨서 끼워 넣어요? 제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그렇게 됐다. 방주님께도 재가를 받은 일이니, 두말 말고 다녀와라."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음… 무존 제자랑 검선 제자랑 독선 아들들 싸울 때, 저는 거기서 망보라는 거네요?"
"어험, 꼭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고."
"망보는 거 맞잖아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너를 추천한 거다."
"억지로 끼워 넣었다면서요?"
"순화자 장로와 속리자 장로가 다 깊은 뜻이 있어서 너를 추천한 거야."
"술 얼마나 얻어 마셨어요?"
"이놈이, 그래도!"
"얼마나 마셨냐고요? 저 우리 개방 감찰부에 민원 넣을 거예요."
"많이 안 마셨다."
"진짜로 가요? 감숙까지? 애들 싸우는 거 망보러?"
"가야 한다. 혈교의 준동을 막는 중차대한 일이다."
"저는 망보는 역할이고요?"
"그게 아니라니까."
"됐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망이나 보러 가는 녀석이 뭔 조건을 달아?"
"오! 맞네. 망보러 가는 거."
"너 방금 반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요."
"끄응, 그래. 뭐? 조건이 뭐냐?"
"첫 번째."
"조건이 하나가 아니야?"
"두 개예요."
"그래, 들어나 보자."
"첫 번째, 다시는 순화자 장로와 속리자 장로가 제안하는 임무를 맡지 않겠다는 거예요."
"왜? 너, 그들이 누군지 모르냐? 무림맹에서도 맹주님 다음으로 실세인 자들이야. 그들과 친해져서 나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냐?"
"이건 예감이에요. 그들과 엮이면 내 인생이 처참할 정도로 고달파질 거라는 예감."
"허어, 별소리를 다 듣겠네."
"중요한 조건이에요. 이거 안 들어주시면, 저 개방에서 나갈 거예요. 낭만개 아저씨랑 여기 거지들 데리고 나가서 문파 하나 개파할 거라고요."
"협박이냐?"
"협상하자는 거잖아요."
"나 육 장로 상취개야. 비걸개 총책."
"이번 임무 비걸개 임무 아니잖아요."
"그, 그게… 쩝, 알았다. 앞으로 순화자와 속리자 그 인간들이 제안하는 임무에서는 너를 완전히 배제하겠다."
"두 번째, 여기 애들 글이랑 타구봉법 좀 가르쳐 주세요. 좋은 선생 구해다가요."
"그건 어렵지 않지. 내가 천자문을 200글자나 아는 훌륭한 글 선생을 이곳으로 보내마."
"500글자."
"500글자나 아는 거지는 그리 많지 않은데."
"해 줘요."
"좋다. 기왕 인심 쓰는 김에 팍팍 쓰지. 500글자 이상 아는 글 선생하고, 타구봉법 1, 2초식을 훌륭히 휘두를 줄 아는 무공 선생까지 이곳으로 보내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겠다."
"그리고 이거요."
척.
금자 다섯 냥에 해당하는 전표 다발을 멍석 위에 올려놓았다.
"오! 이 녀석, 남경에서 많이도 해 처먹었나 보구나."
"떠날 때 봇짐에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여기 애들 밥 굶지 않게 좀 챙겨 주세요."
"낭만개가 있는데 무슨 그런 걱정을 하냐? 아까 보니 죄다 토실토실을 넘어 투실투실, 곧 돼지가 되겠구먼."
"매일 구걸한 찬밥 먹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알았다. 내 특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다. 이젠 됐냐?"
"네."
"그래, 가서 망 잘 보고. 아니, 임무 수행 잘하고. 음… 왔나 보군."
순화자와 속리자가 내 움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움막이, 네 사람이 들어서니 꽉 차 버렸다.
여전히 히죽히죽 웃고 있는 두 노도사.
"휴우, 여기 어린 거지들은 거지가 아니라 강도를 해야 할 것 같아. 또 뭔 놈의 먹성들은 그리도 좋은지. 가진 돈 다 썼네. 허허허."
말을 하며 권하지도 않았는데 멍석 위에 앉는다.
"분위기를 보니 대충 임무에 대한 설명은 끝난 것 같군."
순화자가 나와 상취개를 번갈아 보며 말했고.
상취개가 그런 순화자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만족해하는 순화자와 속리자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속리자가 나섰다.
"임무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해야겠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네. 궁금한 것부터 풀어야지."
아! 젠장.
올 게 왔다.
속리자가 나를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무공. 도대체 뭔가? 며칠을 생각해도 그건 분명 중원의 무공이 아니었어."
속리자에 이어 순화자와 상취개까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그러더니 육 장로가 하는 말이.
"나도 들었다. 진짜 그 희한한 무공은 도대체 어디서 얻은 것이냐? 이형환위도 아니면서 이형환위에 버금가는 힘을 낸다는데."
아놔!
육 장로! 당신은 나랑 같은 편이잖아!
같은 거지끼리 편은 못 들어 줄망정, 뭐 하는 건데?
됐다.
난 비걸개다.
적에게 잡혀 고문당할 때를 항상 대비하고 있다.
뭐, 지금 내가 고문당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해 뒀다는 뜻이다.
분타 어린 거지 녀석들에게 점심에 해 주려고 사다 놓았던 달걀을 꺼내 멍석 위에 올려놓았다.
순화자, 속리자 그리고 같은 편인데 남의 편을 들고 있는 육 장로까지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자,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못 믿으실까 봐 직접 보여 드리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