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61화 (60/174)

61화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난 여전히 이류다.

아! 젠장.

머리로는 인정하겠는데, 마음이 쓰리다.

"궁금한 게 또 생겼어요."

"그래, 얼마든지 물어보아라."

"아까 말한 색목인이요. 그녀들 중에 제가 두 번째로 펼친 절기 있잖아요. 블랙 스톰, 아니 검은 폭풍… 그러니까, 흑암풍폭(黑暗風暴) 말이에요."

"그래."

"그녀와 수도 없이 대련을 했는데, 제가 한번은 그녀의 옷자락을 한 척이나 베었어요. 타구봉법으로요."

"그녀가 흑암풍폭 초식을 대성하였느냐?"

"네."

"그럼 그때 네가 이겼느냐?"

"아니요, 그녀의 옷자락이 잘리면서, 그게… 노출… 그거 있잖아요! 아무튼 그때 살짝 놀라 방심했는데, 그 틈을 타 아슬아슬하게 졌어요."

또 웃는다.

그럴 줄 알았다는 그런 웃음이다.

"왜요? 왜 웃는데요?"

"혹시 다른 여인들과도 대련을 했느냐? 첫 번째 절기와 세 번째 절기를 전수해 준 여인들."

"네."

"어땠느냐? 한 번이라도 이긴 적이 있느냐?"

"그게… 세 번째 여전사는 옷깃 한 번 건드리지 못했어요."

낭만개가 고개를 끄덕끄덕.

"첫 번째 여전사와도 수없이 대련을 했는데, 막판에는 정말 이길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매번 승기를 내줬어요."

"풉. 푸하하. 아! 미안. 미안하다."

이 인간이 정말!

"왜요? 왜 또 웃는데요?"

"내가 묻고 싶구나. 정말 아슬아슬하게 졌는지."

"그, 그게… 그러니까 정말로……."

젠장!

봐줬던 거였어?

아놔!

어째.

이상하다 했다.

100일 넘게 싸우며, 막판에는 계속 아슬아슬하게 졌다.

거의 스무날 넘게 그랬다.

정말 한 끗 차이로.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나에게 자신의 갑옷을 찢게 해 준 거였고.

실버 로마노프도 역시 일부러 나와의 대련을 아슬아슬하게 이어 준 거였어.

아! 쪽팔려.

난 그것도 모르고.

진짜 죽을 둥 말 둥 싸웠고, 매번 한 끗 차이로 지면 대놓고 아쉬움을 드러냈는데.

나중에 정말 미인국 돌아가면, 쪽팔려서 그녀들을 어찌 볼까 싶다.

"기대가 컸었던 모양이구나? 세 가지 절기를 보아하니, 그녀들은 그녀들이 사는 곳에서도 손에 꼽힐 고수… 전사들이었을 텐데."

"네, 최강의 전사들이었어요."

"그럴 것 같다. 그래서 그녀들과 거의 대등하게 대련을 했던 네 경지도 상당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고."

"솔직히… 네, 좀 기대했어요."

"괜찮다. 지금도 훌륭하다 못해 내가 다 놀라 자빠질 정도다. 어쩌면 천하제일인일지도 모를 내가 놀라 자빠질 정도면, 넌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치고 흐를 정도로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젠 자연스럽게 스스로 천하제일인이라고 하네요."

"농이다, 농.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

"그만. 알았어요. 그 얘기 꿈에도 나와요."

"진짜다."

"네."

"그리고 수고했다."

"맞아요. 저,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래, 그래 보인다."

"그런데 아저씨. 저, 정말로 절정급 고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어요? 초절정 고수를 상대하려면 멀었나요?"

"사실 단정 짓기 힘들다. 네 소인장기공이라면 그들이 방심할 테고, 그 틈을 노려 네 내공과 절기까지 더해진다면 휴우, 무섭겠구나. 능히 초절정 고수도 노려 볼 수 있긴 하다. 다만."

"다만? 왜 항상 말끝에 다만을 붙여요? 사람 기분 좋은 거 다 날아가게."

"그래도 사실은 말해 줘야 하니 그런 것이지. 이건 장난으로 들어선 안 된다. 네 목숨이 걸린 일이니."

"네."

"기습이 성공하면 초절정 고수까지 노려 볼 수 있으나. 너도 알다시피 초절정이나 절정에 오른 고수들은 거의 대부분 산전수전을 다 이겨 내고 살아남은 노강호들이다."

"통하기 힘들다는 말이네요."

"그렇다. 그러니 만약에 그들과 척을 지게 되거나 칼을 뽑을 상황이 온다면……."

"온다면요?"

"냅다 튀어서 나에게 와라. 이 어쩌면 천하제일인 아저씨가 죄다 쓸어 버려 주겠다. 하하하!"

"아저씨! 나한테 장난으로 듣지 말라면서 농담이 나와요?"

박장대소하던 낭만개가 웃음을 뚝 그쳤다.

아니, 미미한 미소는 머금고 있다.

터지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중이다.

"농담 아닌데?"

"됐어요, 제 살길은 제가 찾아요."

"태한아, 토끼가 아무리 곰의 앞발과 호랑이의 이빨을 얻었다고 하여도, 토끼인 것에는 변함이 없단다. 토끼는 엄청난 힘을 얻었다고 좋아할지 모르나, 늑대의 눈에는 토끼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약점과 빈틈이 고스란히 보인단다."

"……."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힘에 겨울 땐, 반드시 나를 찾아와라. 반드시."

낭만개 아저씨가 이번에는 진짜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말에 힘까지 주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놀고먹는 어쩌면 천하제일인을 곁에 두고 제가 왜 사서 위험을 감수하겠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우리 태한이. 하하."

"내려가요."

"분타로? 제대로 무공을 배우고 싶다며?"

"내일부터요. 아까 봤잖아요. 저를 보자마자 우르르 몰려들며 먹을 거 타령하던 녀석들요. 오늘은 녀석들 배 터지게 밥 좀 먹이고, 내일부터 진짜 수련 시작이에요."

"그래, 그러자꾸나. 나도 이번엔 제대로 너를 가르쳐 보고 싶구나."

그렇게 나와 낭만개 아저씨는 엄마의 봉분이 있는 산을 내려가 마을로 향했다.

개고기와 오리고기에 어른 거지들이 마실 화주까지 한 수레 가득 사서 분타로 향했다.

분타의 거지 모두가 행복한 날이었다.

* * *

"쩝쩝. 맛있다."

"나도 맛있어."

"태한이 형 오니까 좋다."

"나도 좋아."

어린 거지 녀석들이 일찍 일어나기도 했다.

내 움막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하는 중, 분타의 어린 거지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젯밤 먹다 남은 음식들을 해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밤새 그게 먹고 싶어서 어떻게 잠을 잤는지 싶을 정도다.

덕분에 운기조식에 집중하는 게 힘들었다.

됐다.

오늘부터 진짜 수련 시작이다.

어쩌면 천하제일인 낭만개 아저씨한테 무공을 배운다.

가부좌를 틀고.

눈을 뜨고.

옷과 검을 챙겨 밖으로… 어?

아저씨가 내 움막에 먼저 들어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오늘 뭔 날이에요? 애들도 그렇고 아저씨도 그렇고. 평소보다 반나절은 일찍 일어났네요?"

"하남 총분타에서 급히 소집령이 떨어졌다. 인근 분타의 분타주들을 모두 소집하는 모양이구나."

"아저씨도 가야 해요?"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나도 개방의 방도이고 분타주인데, 가 봐야지. 1년에 한두 번 부르는 게 왜 하필 오늘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최대한 빨리 다녀오마. 어차피 네가 온 것도 보고해야 해서, 누군가 가긴 가야 했어. 후딱 다녀오마."

"네."

그렇게 낭만개 아저씨가 떠났다.

오늘 내로 올 수 있긴 있으려나?

쩝.

뭔가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탈할 수가 없다.

뭐, 내일부터 해도 되겠지.

오늘은 개인 수련… 음.

그래, 찝찝했다.

찝찝했어.

허구한 날 중 왜 하필 오늘인가 싶기도 했고.

저 멀리 내 시야로 들어오는 세 사람.

젠장!

낚인 거다.

육 장로 상취개가 두 도사 노인네들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

낭만개 아저씨를 일부러 빼돌린 거였어.

빌어먹을 거지 육 장로 상취개!

무엇보다 내가 열받는 건.

비틀거리며 걷는 상취개 육 장로 양옆에 있는 두 노인네.

그 인간들이다!

히죽히죽 나를 보며 웃는다.

아놔!

때릴 수도 없고.

저 인간들이 시킨 거였어.

육 장로한테 술 잔뜩 사 주고.

낭만개를 하남 총분타로 빼돌리고.

나 혼자 있는 틈을 타서.

뭔 수작을 하려는 거지?

가까이 올수록 상취개 육 장로의 만취한 모습이 더 명확히 보인다.

비틀비틀.

취선팔보를 펼치는 게 아니다.

그냥 취한 거다.

그리고 히죽히죽.

와!

저 노인네들, 볼수록 밉상이다.

무림맹의 종남장로 순화자와 제갈장로 속리자 두 노인네 말이다!

며칠 전에 나를 납치했던 그 악당 노인네들.

진짜 여긴 또 왜 왔지?

돌겠네.

그렇게 내 속이 막 뒤집히려고 할 때.

그들이 우리 분타 마당까지 들어왔다.

"어이, 꼬마! 잘 있었어?"

"태한아, 우리 또 보게 된다고 했지? 하하하."

내 이름까지 알고 있다.

육 장로가 모든 걸 다 불었다는 뜻이다.

젠장!

우리한테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비밀을 지키라더니.

자기는 술 몇 잔에 내 정보를 팔아?

퉤!

"태한아, 우리 얘기 좀 할까?"

"그래, 그때 못다 했던 얘기도 하고, 새로운 이야기도 할 게 많이 있단다. 하하하."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계속 나를 보며 히죽거리는 두 늙은 도사들.

깔끔하게 무시하고.

"저하고 얘기 좀 해요."

육 장로의 팔목을 잡고 내 움막으로 직행.

문까지 꽁꽁 닫고.

"아니, 육 장로님!"

"끄억. 조오타! 하하."

"아이고, 술 냄새."

"우리 걸이번이 이번에 남경에서 일을 잘 처리해 줘서……."

"쉿! 조용!"

아놔!

이 노인네들이.

기감을 끌어 올리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냥 대놓고 엿듣고 있다.

그것도 내 움막에 귀까지 딱 붙여서.

돌겠네.

곧바로 움막을 나가자.

화들짝 놀라는 두 늙은 도사들.

"뭐 해요?"

"뭐 하긴?"

"왜 엿들어요?"

"누가 엿듣는다고?"

"가세요. 여기 우리 분타예요."

"네 땅이냐?"

"우리 분타라고요. 안 보여요? 거지들 우글대는 거?"

"그러니까 네 땅이냐고? 엄연히 나라에서 관리하는 땅에, 이렇게 막 움막을 짓고 살아도 되냐? 뭐, 모른 척해 주겠다마는, 우리를 내쫓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요놈, 말버릇하고는."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다.

간자라고 납치를 하질 않나, 이제는 우리 분타 땅이 나라 땅이네 어쩌네 하며, 내 이야기를 대놓고 엿듣겠단다.

흥!

사람 잘못 봤어.

그리고 그거 알아?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거.

"얘들아! 먹을 거 왔다!"

"와아아아아아아! 먹을 거!"

"와아아아아아아아! 먹을 거! 먹을 거 내놔!"

내 한 마디에 어린 거지들이 우르를 몰려나왔고.

"이 도사 할아버지들이 배 터질 때까지 먹을 거 사 준단다!"

"와아아아! 먹을 사 줘!"

"먹을 거! 먹을 거! 먹을 거 내놔!"

큭큭큭큭.

당황하는 두 노인네들.

불쌍한 어린 거지들한테 뭐라 할 수도 없고.

난처한 얼굴로 눈동자만 마구 굴려 댄다.

"뭐 해요? 애들 배고프다는데. 며칠 굶은 애들이에요. 굶어 죽는 거 보실 거예요?"

"먹을 거! 먹을 거 내놔!"

"빨리 먹을 거 사 줘!"

사실 우리 애들은 거지가 아니라 강도가 더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끄응. 알았다. 알았어. 가자. 사 주면 되잖아."

"사 준다고. 옷 잡아당기지 마. 알았다니까."

"먹을 거! 먹을 거!"

와!

이 악마 같은 녀석들을 이렇게 써먹다니.

큭큭큭.

결국 무림맹의 그 높으신 장로님들께서 어린 거지 녀석들의 보챔을 이기지 못하고, 끌려가다시피 마을로 향했다.

휴우.

일단 방해물은 치웠고.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아봐야겠다.

다시 움막으로 들어갔고.

그사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상취개.

"장로님!"

"아이고, 깜짝이야. 뭐? 무슨 일이냐? 누가 쳐들어왔냐?"

"네, 장로님이 쳐들어왔잖아요."

"아! 걸이번이구나. 하하하. 그래, 여긴 무슨 일이냐?"

"장로님이 왔다고요! 두 훼방꾼까지 대동하고서요."

"내가?"

"네!"

"훼방꾼은 누군데?"

"아오! 정말 이러시기에요?"

육 장로가 당황하는가 싶더니, 씨이이익 웃는다.

어색하다.

자기의 실태를 숨기기 위한 억지 씨이이익이다.

"제 정보까지 다 불었어요? 어떻게 제 진짜 이름까지 알고 있어요? 이곳 분타까지 데려오고. 우리 비걸개들한테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비밀을 엄수하라고 가르쳤잖아요!"

"어허. 녀석, 목청이 왜 이리 크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공조다, 공조."

"뭔 공조요?"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 매우 준엄한 사안이라 임무에 투여될 자들의 정보를 모두 공유해야 했다."

"술 몇 잔에 다 부신 건 아니고요?"

"이 녀석이, 그래도!"

"분명히 말해 두는데요. 아무리 장로님이라고 해도, 비걸개 수칙에 어긋나는 임무를 하달하시면 거부할 거예요. 우리 개방의 일이 아닌 이상, 저 절대로 안 해요. 특히 순화자랑 속리자 저 인간들. 느낌이 안 좋아요. 안 해요."

"무슨 임무인지 아직 말도 하지 않았다."

"비걸개 임무만 할 겁니다."

"천하를 구하는 일이다."

"네, 그럼 훌륭한 거지들 보내세요."

"들어라."

"듣고 있어요."

"진지하게 들어라."

"진지하게 듣고 있다고요."

"혈교다."

"네?"

갑자기 뭔 소리야?

여기서 혈교가 왜 나와?

그리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마교니 혈교니 배교니 하는 건, 나 같은 어린 거지가 아니라 무림맹주니 삼존삼성이니 하는 인간들이 막아야지.

혈교 얘기를 왜 이런 시골 분타에 와서 하냐고?

"혈교가 준동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걸 막아야 한다."

"제가요?"

"그래, 네가."

아! 우리 육 장로, 술이 많이 취했나 보다.

아니면 술 때문에 치매에 걸린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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