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황제께서도 윤허하신 일일세. 하지만 태사대부패를 쓸 때는 언제나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일세."
"정말 제가 지녀도 돼요?"
태사 헌원문장이 또 기분 좋게 웃는다.
"하하. 물론이네. 말하지 않았나. 황제께서 윤허하신 일이라고."
"아! 황제께서… 정말 좋으신 분이신가 봐요."
"맞네, 아주 좋으신 분이시라네."
"네."
나도 기분 좋게 웃으며 슬쩍 태사대부패를 품속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와!
백만 대군이다, 백만 대군.
천하의 그 무엇이 두려울쏘냐!
"아! 그런데 대인."
"말하게."
"두 따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음……."
묻지 말았어야 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를 만난 후 시종일관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던 헌원문장이 처음으로 신음성까지 내며 어두운 낯빛이 되었다.
"내일 처형될 걸세."
아! 이건 좀.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이리될 줄은 몰랐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황제께서 내 두 딸을 살릴 길을 열어 주셨네. 하지만… 아니지. 아니야."
그가 고개를 몇 번이고 가로저은 후 말을 이었다.
"무릇 높은 사회적 신분의 사람일수록, 그에 상응하는 법과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네. 내가 내 두 딸을 살리기 위해 법에 예외를 두는 순간, 이 나라의 황법은 근간이 흔들리고 백성은 그 법을 비웃으며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을 것일세."
천부당만부당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결코 아니다.
난 그에게 어떤 위로도 해 줄 수 없었다.
동시에…….
아! 내 품속에 있는 백만 대군은 상상으로만 써야겠다.
개인적인 용도로 썼다가는, 내가 백만 대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륵이군.
잠시 분위기가 심각했지만, 곧바로 원래의 밝은 분위기로 돌아왔다.
헌원공량 녀석이 아버지 헌원문장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무공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태한이 형처럼 무림인이 되면 어떨지 물었다고도 하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어쨌거나 처음 보는 그런 활기찬 아들 녀석 때문에 헌원문장은 또 그게 다 내 덕분이라며 연신 감사함을 표했다.
꼭 다시 만나자는…….
어려울 때면 언제든 자신을 찾으라는…….
같은 말을, 거짓말 아니고 스물여섯 번 반복한 후에야 그는 시간이 다 됐다며 나와 작별한 후 황궁으로 떠났다.
* * *
헌원문장은 황궁으로 가고.
질질 짜는 헌원공량과 작별 인사도 하고.
봇짐도 챙기고.
아! 내가 달라고 한 적 없는데, 내 봇짐 속에 금자와 은자가 두둑하다.
역시 부잣집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그렇게 헌원세가를 떠나 아빠를 만나러 가려 하는데.
"이보시게!"
뒤를 돌아보니…….
"약선 어르신."
"휴우, 하마터면 놓칠 뻔했군. 잠시 시간 괜찮은가?"
"네, 저야 남는 게 시간입니다."
"그럼 잠시 앉지."
"네."
그렇게 내 처소의 작은 대청에 약선 길평과 마주 앉았다.
"비걸개라고 들었네."
육 장로의 부탁으로 온, 정확히는 방주의 부탁으로 왔기에 내 신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약선이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사부님이 안 계시겠군."
"네."
어? 설마?
"의술을 배워 볼 생각은 없는가?"
음, 의술이라.
이것도 배워 두면 좋긴 좋을 거 같은데.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네."
"뭔가요?"
"황궁으로 가야 하네."
"약선께서 황궁으로 입궁하게 되시는 거예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네. 태의가 처형되었고, 현재 태의 자리가 비었네. 황궁의 태의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어서, 황제께서 직접 서신을 써 내게 보내셨네."
"무슨 말씀을 전하셨는데요?"
"많은 약조를 해 주셨네. 지금 내가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열 명이라고 한다면, 백 명을 구할 수 있는 지원을 해 주신다고 하셨네. 어떤가? 사람을 살리는 일일세.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확신한다네."
"저는 의술의 ‘의’ 자도 모릅니다."
"자네의 총명함이라면 3년 안에 최고의 의원으로 만들어 줄 수 있네. 이건 확신일세."
"어렸을 적 엄마가 저에게 총명하다고 말씀해 주신 이후,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요즘에 꽤 자주 듣네요. 하하."
"진심이네."
"무림을 떠나기가 좀 그래요. 개방에 갚아야 할 빚도 있고요. 황궁은 더더군다나, 좀 체질이 아닌 것 같아서요. 약선 어르신께서는 괜찮아요? 무림을 떠나 황궁으로 간다는 것이요."
"나야 원래 무림인도 아니고 관부의 사람도 아닌, 관무지간의 사람 아니겠는가. 나는 민간에 속한 의원일세."
그렇긴 하다.
의선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고, 그의 무공마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를 명확히 무림인이라 부를 수도 없고,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도 없다.
그는 언제나 아픈 사람들 곁에만 있던 사람이니 말이다.
"정말 아쉽군."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선 어르신."
"이거 받게."
"이건……?"
그가 나에게 세 권의 책자를 건넸다.
의서(醫書)다.
"부끄럽지만 내 이름을 따 지었네. 『길평의경』(吉平醫經)일세. 각기 초경(初經)은 의술에 입문하려는 자들을 위한 기초를 서술하였고, 치경(治經)은 한 명의 훌륭한 의원이 되는 방법을 서술하였네. 마지막으로 선경(仙經)은… 음, 내가 평생을 바쳐 공부하며 아직도 풀지 못한 의문을 기록해 두었네."
아! 이거.
그냥 막 주는데, 그냥 막 받을 수 없는 대단한 것들이라는 느낌.
아니, 확신이 순간 들었다.
"이거… 귀한 거 아닌가요?"
"초경과 치경은 내 제자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네. 하지만 선경은 자네가 처음일세."
"귀한 거네요?"
"보이면 귀할 테고, 보이지 않으면 나를 욕하게 될 걸세. 허허허."
"이리 귀한 걸 어찌 저에게 주십니까?"
그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잠시간 미소만 짓다가 입을 열었다.
"느낌일세."
"느낌요? 무슨 느낌이요?"
"자네가 많은 사람을 돕고 구할 인재라는 느낌."
"제가 좋은 놈인 건 맞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귀하지만, 귀할수록 많이 나누어 주면 더 좋은 거라네. 선경 역시 아직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지만, 곧 나누어 줄 것이고. 초경과 치경은 원하는 모든 이에게 대가 없이 나누어 줄 의서라네. 부담 가질 필요 없다네."
"아, 네."
"그래도 자네가 꼭 이 책들을 봐 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군."
"그럴게요."
"그래, 그러면 된다네. 만류귀종이라고 하나, 사실 무공과 의술만큼 일맥상통하는 분야도 그리 많지 않다네. 자네가 무림에 꿈을 두고 있다면, 이 책들이 분명 도움이 될 걸세."
"네, 열심히 익혀 보겠습니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노력해 보고요. 약속합니다, 약선 어르신."
그가 더없이 만족한다는 미소를 얼굴에 그렸다.
"그런데 약선 어르신, 하나만 더 여쭈어 봐도 될까요?"
"무림에 관한 일이겠군. 독에 관한 일이고."
"독심술도 익히셨어요?"
"후후. 자넨 참 재미난 친구군."
"감사합니다."
"물어보시게."
"이번에 헌원세가 일을 겪으면서 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처음 알게 됐거든요. 지금까지 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완전 무방비나 마찬가지였어요."
"음, 그럴 수 있지. 대부분의 무림인이 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은 알지만, 또 대부분이 독에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니."
"『길평의경』의 어디까지 익히면 어느 정도의 독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을까요?"
"초경을 익히면 간단한 독에 대한 방비는 할 수 있고, 치료 또한 가능하네."
"사천당가로 따지면……?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질문한 건가요?"
"그렇네. 하하하. 괜찮네.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니, 탓할 것도 없네. 초경을 대성하면 사천당가의 하급 무사들의 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네."
"아! 그렇군요."
"실망인가?"
"아니요, 아직 치경과 선경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치경을 대성하면……."
"대성하면요?"
"독선과 싸워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 걸세."
애매하다.
너무 애매해.
싸워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싸워서 살아 도망칠 수 있다고?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군."
"아, 그게… 아주 쪼금요?"
"독선의 경지를 얕보지 마시게. 또한 치경의 깊이를 경시해서도 안 되고."
"네, 물론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무려 독으로 화경의 경지에 오른 절대자가 바로 독선이다.
같은 화경의 고수라도 가장 싸우기 두려워하는 게 바로 독선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낭만개 아저씨는 아니라지만.
어쨌거나 그런 자와 싸워 살아 도망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실로 대단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갑자기 치경이 대단해 보였다.
"이거 대성하려면 엄청 노력해야겠네요?"
약선이 나를 빤히 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대성이라! 지금의 내 의술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니, 쉽지는 않겠지."
"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군.
"그럼 선경은 의술로 어떤 경지까지 오를 수 있는 건가요?"
"무공으로 따지면 생사경이네."
"네? 생사경이요? 화경 다음이 현경 아니에요? 곧바로 생사경으로 넘어가요?"
"대성하면 그렇다는 뜻일세. 하지만 그건 나처럼 가짜가 아닌 진짜 신선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 다시 말하지만, 선경은 그 어떤 의술도 기록되어 있지 않네. 내가 지금껏 가졌던 의문만 잔뜩 기록되어 있지."
"네, 그럼 어느 정도 위력을 보일까요?"
"나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니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전설로 내려오는 생사경이 그러하지 않은가? 삶과 죽음을 관장할 수 있다고."
"신선이 아니라 신이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렇군요."
"관심이 많아 보이는군."
"네."
그가 또 나를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흐음. 그 관심이 순수한 의술에서 나온 게 아니라 무공과 무림에 관련된 관심이군."
"죄송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네. 아쉬워서 그렇지. 자넨 정말 인중룡(人中龍)이라 불려도 될 인재일세."
무치개의 천무지체에 이어 이번에는 약선에게서 인중룡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와!
나의 한계점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하하하하!
뭐, 내가 잘난 게 아니라 행운석의 도움 덕분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약선은 끝까지 나를 아쉬워하기도 하고 또 기특해하기도 하며 황궁으로 떠났다.
그 역시 다시 만나자는 말을 스무 번 넘게 한 후에야 나와 작별할 수 있었다.
나도 새아빠나 만나러 가야겠다.
이번엔 제대로 무공 전수 좀 받자.
* * *
만리전장(萬里錢莊).
중원 최고의 상단인 만리상단(萬里商團)에 속한 전장이다.
그곳에서 스무 개나 되는 금자를 모두 전표와 은자로 바꾸었다.
내 품에 백만 대군, 큭큭.
태사대부패와 약선의 의서 세 권, 전표가 몇 장에다가 은자는 정낭에 가득하다.
와!
그냥 절로 웃음이 나온다.
강소 남경에서 하남까지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나 마찬가지.
그래도 돈이 많으니 말을 타고……. 응, 아껴야 잘 산단다.
걸어서 갔다.
낭만개 아저씨를 빨리 만나 무공 전수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나.
서두른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끔 이렇게.
"이거, 이거, 이거. 그리고 죽엽청 한 병."
"예이!"
음식을 한 상 가득 주문했다.
강소 남경에서 내 고향 하남 신양 황천으로 가는 길.
강소와 하남이 맞붙어 있지만, 빠른 길은 안휘를 통해 나 있다.
그런데 안휘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남궁세가를 떠올릴 것이다.
걸사번, 아니 이제는 남궁무검이지.
혹시라도 녀석과 마주치면 서로 좀 그렇지 않겠나?
놈은 우리 개방을 배신 때렸기에 찔려서 그럴 테고.
나는 부잣집으로 가서 호의호식하는 녀석이 부러워 그럴 테고.
아! 그런데 그 녀석이 우리 개방을 배신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가지고 있을까?
뭐, 모르지.
놈이라면, 양심 따위는 진즉 개에게 줘 버렸을지도.
아무튼 하남 신양으로 가는 빠른 길은 몇 개가 있지만, 나는 당연히 남궁세가가 있는 합비로 통하는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해 가는 중이다.
이 길이라면, 마음 편히 식도락과 풍경을 즐기며 편한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음식 나왔습니다, 공자님."
점소이가 첫 번째 음식을 가지고 왔고.
빠르게 두 번째, 세 번째 음식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침이 마구 흐른다.
"어디, 먹어 볼까?"
난 젓가락을 집어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고기 한 점을… 뭐지?
"꺄아아아아아!"
"살려 줘!"
"아아아아아아악!"
그냥 평범한 마을이다.
그런데 내가 막 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마을에서 난리가 났다.
뭔가 보니.
어흐으으으응!
미친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렇게 나타나라고 외칠 때는 안 나타나더니.
밥 좀 먹으려고 하니, 민가에까지 나타나서 난리다.
넌 오늘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