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선 어른. 태사 대인의 상태가 위중하니 먼저 태사 대인을 살펴봐 주십시오."
"그리하겠소."
시비의 안내를 받아 약선은 태사의 방으로 향했다.
구걸하는 거지로 위장한 육 장로.
아! 육 장로가 원래 거지니까 그걸 위장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무튼 내가 이곳으로 와 육 장로와 처음 접촉하여 건넨 것.
태의에 관한 진료 기록이며 섭취한 모든 것들이다.
그리고 두 번째 접촉했을 때 그에게서 받은 답변.
약선에게 문의한 결과 의심 가는 처방과 음식이 있다는 것.
약선이 직접 오겠다는 말까지 전해 왔다고.
모르긴 몰라도 약선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을 터이다.
태사는 약선에게 맡기면 되고, 현재로써는 또 그 방법밖에는 없다.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약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로 다들 어안이 벙벙한 모습들이었다.
뭐, 나는 미인국에 다녀왔으니 1년이란 시간이 걸린 거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두려워하는 눈으로, 또 누군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그렇게 나를 보고 있다.
나만 보고 있다.
음,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황법으로 뭘 어떻게 하고 해야 하는데, 내가 황법을 알아야지?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다.
내가 또 무슨 엄청난 일을 벌일지, 기대와 두려움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와!
진짜 모르겠다.
이제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결국…….
- 금의위 수장님?
전음을 보냈다.
내가 보낸 전음에 금의위 수장이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가 순식간에 감추었다.
아마도 내가 무공을 익히고 있음을 몰랐기에 저런 반응을 보였나 보다.
상관없고.
-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 상황을 지켜보니 배후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일단 저들 모두 황궁으로 데려가 뇌옥에 감금하고, 심문해 배후를 캐야 합니다. 배후 세력은 자신들의 죄를 숨기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저들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단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아…….
- 잠시만요.
- ……?
- 아! 복잡하네요.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쉬이이이익!
다시 태사대부패를 번쩍 치켜들었다.
"현시점으로 이들에 대한 심문과 처벌 그리고 일단의 모든 사항을 금의위에 위임한다. 금의위 수장은 이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심문하여 한 점의 의혹이 없도록 하라!"
금의위 수장이 순간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곧바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금의위 수장은 다시 죄인들과 금의위 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저들을 당장 황궁으로 압송한다. 또한 남경포 대장에게 명하여 저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가까이 지낸 모두를 체포한다."
"존명!"
금의위 무인들이 목청을 높여 대답한 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헌원세가 밖에는 1만 명에 달하는 남경포 대군의 군사들이 집결해 포위한 상태였다.
그렇게 빠르게 현장이 정리되고.
황궁에서 또 수많은 곳에서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왔던 사람들이 빠르게 헌원세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아이가 한 명 있었다.
늘 손에 쥐고 있던 책까지 바닥에 떨어뜨리고.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보고 있는가 싶었는데.
"혀어엉… 형! 아아아아아아앙."
헌원공량이 일곱 살 어린아이의 그 모습으로 돌아와 엉엉 울며 내 품에 안겼다.
* * *
난리가 나고 바로 다음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태사 헌원문장이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는 것.
하지만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황궁에서 황제가 보낸 사신이 시시각각으로 헌원세가를 드나들었고, 그는 병으로 앓아눕기 전보다 훨씬 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황궁으로 직접 가겠다는 것을, 약선이 제지하였다고 한다.
황궁에서 놀라운 소식도 연이어 들려왔다.
태의를 중독시켰던 독이, 황궁 의원들이 조사한 결과 이유를 모르고 죽었던 역대의 황제들과 똑같은 약과 음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헌원공지와 헌원파지가 황후가 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 역시 밝혀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모에 동원된 것이다.
어찌 보면 이용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배후에 있던 자들은, 헌원공지가 황후가 되건 헌원파지가 황후가 되건 상관없었다.
그래서 둘을 이간질하였고, 처음부터 한 명을 희생시켜 다른 한 명을 황후로 올린 생각이었던 것이다.
둘은 그것도 모르고 황후가 되겠다며 서로 싸워 댔던 것이고.
더군다나 황비의 이름으로 거론되던 두 사람에게 신중해야 한다고 하며 그 길을 막은 게 다름 아닌 아버지 헌원문장이었으니.
황후가 될 수 있다는 욕심에 눈이 먼 두 딸은 서슴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데에 동참한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헌원문장은 딸들의 그런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두 딸이 황궁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았나 싶었다.
또한 권력이란 게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후에는 역시 태의가 있었다.
내가 밝혀내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이 또 있었다.
아이를 갖지 못해 폐위(廢位, 왕이나 왕비의 자리를 폐함)의 위기에 놓였던 황후의 상태가 중독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역시나 태의가 손을 쓴 게 밝혀졌고.
이번 사건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규모로 커지는 순간이었다.
또한 태의의 말처럼 배후까지 있었다.
고문을 이겨 내지 못한 종인부와 도어사가 죄를 자백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는 나라의 태사와 같은 정일품이었던 태부(太傅)가 뇌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직책은 태부지만, 승상이라고 불리며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태사와는 둘도 없는 절친이었고, 전 부인을 잃었던 태사에게 헌원파지의 어머니 배시 부인을 소개한 것 역시 그였다.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음모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파장 역시 어마어마했다.
헌원파지의 외가였던 배가대부는 멸문했다.
태보와 종인부, 도어사의 가족과 친인척은 3족이 멸족했다.
이 외에도 엄청난 황궁의 대관 그리고 장수들이 이 일에 연루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을 때, 처형된 사람의 숫자가 2,000명을 넘어섰다.
"형!"
"뭐야? 검술 훈련 다 끝났어?"
"네."
헌원공량이다.
이젠 책만 보지 않고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검법과 권법 등도 배우고 있다.
놀라운 사실 하나 더.
이 녀석도 중독되어 있었다고.
약선이 처방한 약을 세 번 복용하고, 눈에 띄게 건강해졌다.
"책 읽으러 안 가?"
"형이랑 조금만 있다가 갈래요."
"자식, 그래. 좀 쉬엄쉬엄해도 돼."
"네."
녀석과 나란히 앉았다.
참, 뭔 놈의 집이 이리도 큰지.
경치 한번 좋다.
"공량아, 너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내 물음에 헌원공량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어?"
"다 아는 건 아니었고, 우리 집안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형은 외인이잖아요. 우리 집 일 때문에 외인인 형이 다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못 믿었구나?"
"죄송해요."
"아니야, 죄송할 거 없어. 나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거든. 그리고… 네 심정 충분히 이해해."
"고마워요, 형."
녀석이 방긋 웃는다.
일곱 살 아이의 그런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이다.
"그런데 공량아. 너… 음, 누나들이 네가 먹는 밥에 독을 타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까지 말을 하지 않은 건 왜 그랬던 거야? 다른 건 이해가 돼도 그건 이해가 안 돼."
난리가 났던 날 당일.
장내가 정리되고 있을 즘, 내 품에 안겨 오열을 토했던 녀석이 내게 직접 말해 줬다.
자신도 중독되었다고.
그래서 빠르게 헌원공량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사실… 포기했었어요. 제가 너무 어려서, 무엇을 해 보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자포자기하고, 그냥 누나들이 주는 걸 먹은 거예요."
녀석, ‘죽으려고요’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어린 녀석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내 마음이 다 쓰리고 아팠다.
아버지의 죽음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았고, 자신 또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음을 알면서, 포기한 것이다.
울고 떼쓰고 그래야 할 일곱 살 아이가 말이다.
"형!"
갑자기 녀석이 힘차게 나를 불렀다.
"이젠 달라요."
"뭐가?"
"책으로 봐서 머리로만 알았지, 마음으로 깨닫지는 못했거든요. 형 때문에 깨닫게 됐어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진짜로! 진짜로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요. 고마워요, 형."
녀석, 기특하긴.
난 녀석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알면, 인마. 이제 밖으로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뛰어놀고. 가끔 치고받고, 코피도 한번 나 보고, 그렇게 좀 놀아."
"네! 그러려고요. 하하하하!"
녀석이 그 어느 때보다 해맑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 *
다시 며칠이 지났다.
황궁에서 처형된 사람의 수는 어느새 8,000명에 육박했다.
그리고 오늘 헌원세가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분주했다.
건강을 많이 회복한 헌원문장의 황궁에 입궁하기 위한 준비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헌원문장은 깨어난 후 처음으로 나를 불렀다.
나와 그, 단둘의 만남이었다.
"미안하네. 많이 서운했나?"
첫마디가 사과다.
"아닙니다."
"얼굴에 서운하다고 글자가 쓰여 있는데?"
"그게 보이십니까?"
"뻔뻔한 건 여전하군. 하하하!"
확실히 많이 건강해졌다.
웃음소리에 힘이 넘친다.
약선이 대단하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네. 그래서 일부러 자네를 보지 않았던 것이야. 이는 비단 자네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개방을 위한 일이며, 또한 황궁과 무림의 원만한 관계를 생각해서 한 일이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게."
"네, 대인."
"그런데 어찌 알았나?"
"무엇이 말입니까?"
"사실 나도 두 딸 중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나 의심하고 있었지만, 둘 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네. 솔직히 말하면 자네에게 이 일을 맡기면서도 이렇게 제대로 해낼 줄은 기대하지 않았네. 내 목숨을 살릴 줄은 더더욱 몰랐고."
"대인의 명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이겠죠. 백성들을 위해 더 많이 일하라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입에 침이나 좀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하시게. 하하."
"네."
내가 혀로 입술에 침을 가득 바르니, 또 그걸 보며 웃는다.
"정말 어떻게 안 것인가? 두 딸 아이의 거짓말을? 자네가 아무리 강심장이라 한들 쉽지 않았을 텐데."
"이게 설명하기 좀 힘든데. 아름다움 말입니다."
"……?"
"그 아름다움이 사람의 눈과 귀를 멀게 하더라고요. 그걸 이겨 냈더니, 어느 순간부터 그냥 보였습니다.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이요."
"음, 말은 쉽지만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아비인 나조차 해내지 못했던 일인데. 자네는 정말 볼수록 탐이 나는 인재군."
"감사합니다, 대인."
"어떤가? 나와 함께 입궁하는 건?"
"황궁이요?"
"그래, 이미 개방의 귀행개 방주와는 말이 끝났네. 자네만 원한다면, 내가 자네를 큰 인물로 키우고 싶네. 오늘 당장 황제께 자네를 소개해 줄 생각이네."
황제라.
나도 이제 대인 소리도 듣고 팔자 좀 피는 건가?
하지만…….
아니다.
음모와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황궁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며칠 사이 목이 잘린 죄인만 8,000명에 육박한다고 하지 않았나.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합니다."
"그래 보이지 않는데?"
"물론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루면 더 행복하고 만족하겠지요."
"그 꿈이라는 게… 음, 황궁이 아닌 무림에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네, 맞습니다."
"아쉽군. 정말 아쉬워. 자네 같은 인재라면, 이 나라를 더 부국강병 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 백성들 또한 더없이 태평한 세상에서 살게 될 테고."
"무림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네. 알지. 나도 알고 황제께서도 다 지켜보고 계신다네."
그가 잠시 말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쉰다.
"휴우, 자네에게 톡톡히 빚을 졌군."
"아닙니다. 저는 태사 대인 한 명의 목숨을 살렸지만, 태사 대인께서는 이미 수십만 거지들의 목숨을 살려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빚은 아직 저희 개방이 대인께 지고 있습니다."
"풋. 하하. 자네는 말도 잘하고. 아쉬워. 정말 아까워. 뭐, 그건 그렇고. 그럼 퉁치지."
"네? 퉁이요?"
"왜? 나라고 그런 말 좀 쓰면 안 되나?"
"아, 뭐 안 될 건 없죠."
"그럼 퉁치세. 내가 자네에게 진 빚. 또 개방이 나에게 진 빚. 이걸로 다 없어졌네."
"그래 주시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난 그에게 태사대부패를 건넸다.
내 임무가 끝났으니 돌려주는 것이고,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 아빠 만나러 갈 거다.
그런데 헌원문장은 태사대부패를 받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왜……?"
"자네 잊었나?"
"뭘요?"
"내가 분명 자네에게 태사대부패를 건넬 때 한 말이 있지 않은가?"
"설, 설마……."
"기억하는군. 맞네. 나는 당시 태사대부패를 자네에게 주며 ‘내가 죽을 때까지 태사대부패를 자네에게 맡길 테니’라고 말했네.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다시 품에 넣어 두게."
황제의 백만 대군이 내 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태사 대인!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꼭 그러셔야 합니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