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56화 (55/174)

56화

하아!

미인국으로 가기 전의 나.

헌원공지와 헌원파지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던 내가 얼마나 한심했었는지 뼛속까지 반성한다.

두 여인에게서 더 이상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았다.

탐욕과 거짓, 위선과 기만, 술수와 모략만이 보인다.

"네 이놈! 네가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 만약 해독탕을 다시 만들기 전에 태사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네놈의 목으로도 죗값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헌원공지와 헌원파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옆에서 서릿발 가득한 노기를 띤 태의가 수염까지 부르르 떨며 나에게 호통을 쳤다.

"뭣들 하느냐! 태사의 해독탕을 깨 버린 이놈을 포박하라!"

태의의 이어지는 호통.

황궁의 무장들이 그의 호통에 따라 슬금슬금 움직이려 했다.

스으으윽.

시선을 태의에게 고정한 채, 나에게 다가오는 무장들을 향해 태사대부패를 스으윽 들어 보여 줬다.

당연히 걸음을 멈추었고.

내가 여전히 나를 노려보며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태의를 향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확실해?"

"네 이놈!"

"이놈이고 저놈이고 확실하냐고?"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확실하냐고 물었다. 답해라."

스으으으윽.

태사대부패를 내밀자, 다시 부들부들 떠는 태의.

하지만 다시 이놈 저놈 하지는 못했고.

"지금 무엇을 말하라는 것이냐?"

"두 탕약이 정말 태사 대인의 독을 해독하는 해독탕이 맞냐고 물었잖아."

"당연하다!"

"그럼 헌원공지나 헌원파지 둘 중 한 사람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네?"

"정황상 그렇지 않겠냐!"

"만약 둘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당신도 용의자가 되는 거고?"

"무엇이?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나는 헌원세가에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당신의 제자, 그것도 그냥 제자도 아니고 수제자가 당신이 처방해 준 처방전으로 태사 대인을 치료했지."

"지금… 너는… 네가 정녕!"

"뭐?"

"뱉은 말에는 책임이 따를 것이다."

"그래, 처방한 약에도 책임이 따라야 할 테고. 여봐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사대부패를 번쩍 치켜올렸다.

모두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태사 대인을 죽이려 한 태의를 포박하라!"

자리에 있던 대관들이며 헌원세가의 가신들이며, 모두가 크게 놀라고 당황하였다.

자리를 지키는 헌원세가의 무인들도 너무 놀라 움찔하기만 할 뿐, 그 누구 하나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난 다시 목청을 높였다.

"태사 대인의 태사대부패가 내 손에 들린 것이 보이지 않느냐! 당장 죄인 태의를 포박하라!"

"네 이놈! 어찌 태사 대인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태의를 체포하려 하는 것이냐! 너야말로 태사 대인이 돌아가시길 바라는 것이 아니냐! 당장 저 어린 것을 포박하라!"

종인부와 도어사까지 나섰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무장들이 움직였다.

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채챙!

곧바로 헌원세가의 무인들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섰고.

헌원세가의 무인들과 종인부, 도어사를 따르는 무장들의 일촉즉발 대치가 펼쳐졌다.

멍청한 새끼들.

스스로 뒤가 구려 저렇게 발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도래할 수 있음은 예상하고 있었다.

나?

내가 이런 것까지 예상하고 할 정도는 아니고.

기억하는가?

내가 이곳에 온 첫날 태사 헌원문장을 만났을 때 말이다.

그는 나에게 지금 내 손에 들린 태사대부패를 건넸고.

나는 그걸 받고 백만 대군을 지휘할 수 있느니 어쩌니 하며, 속으로 좋아라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나는 분명 이러한 서술을 했었다.

헌원문장은 이번 일을 수행하며 이 신패를 어떻게 사용할지까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었다.

누가 대단한 양반 아니랄까 봐, 치밀하게도 준비했다 싶었다.

그에 대한 황제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새삼 느꼈고.

그렇게 오랜 시간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눈 후에야 나는 태사전을 나설 수 있었다.

그때 태사가 나에게 알려 준 태사대부패를 제대로 쓰는 방법.

태사의 치밀한 준비.

황제의 신뢰.

지금이 바로 그걸 쓸 순간이다.

"뭣들 하시오! 태사를 보호하고 태사의 명에 따르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을 잊으셨소! 지금 황제 폐하의 명령을 거스르려는 것이오! 당장! 지금 당장 태의와 태사대부패의 권위에 항명한 저들을 모두 체포하시오! 이건 태사 대인의 명이오!"

허공을 향한 나의 외침.

나를 잡으려는 종인부나 도어사 측의 무장들이나, 나를 지키려는 헌원세가의 무인들이나.

순간 모두 나를 미쳤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니다.

콰쾅.

퍼퍼펑!

콰콰콰쾅!

창문을 뚫고.

문을 부수고.

또 천장에서.

다시 사방에서.

엄청난, 엄청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대단한 고수들이 순식간에 난입하였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대청 안으로 난입할 당시만 해도 일꾼들이나 입을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들어옴과 동시에 그 옷들을 모두 벗어 버렸고.

번쩍, 번쩍!

멋들어진 비단에 화려한 금장 문양이 박힌 무복을 입은 수십의 절대 고수가 대청 안을 가득 메웠다.

금의위(錦衣衛)다.

그들의 수장이 번쩍!

자신의 신패를 올려 들어 모두가 볼 수 있게 한 후 외쳤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태사 대인을 암중 호위하는 금의위다. 모두 지시에 따르라. 항명하는 자는 즉각 처형하겠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의 칼 금의위다.

그들이 나선 순간.

태의, 종인부, 도어사 그리고 그들의 명에 따라 나를 잡으려 했던 무장들까지.

모두 하늘이 무너진 얼굴을 했다.

당연히 반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말이 좋아 즉각 처형이지, 잘못하면 역모죄로 몰려 구족이 몰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의위가 나서자마자 현장은 순식간에 정리되었고.

"종인부와 도어사는 어떻게 할까요?"

금의위 수장이 나에게 물었다.

은은하지만, 그 은은함 속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졌다.

모른 척하고.

"포박하여 꿇리세요. 태사대부패에 항명한 것은 태사 대인에게 항명한 것과 같은 뜻이니까요."

"네."

그렇게 마지막으로 정이품 종인부와 도어사까지 밧줄에 묶여 무릎을 꿇었다.

크게 놀라고 두려운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기세가 죽지 않은 대단한 자가 한 명 있었으니.

태의다.

"네 이놈! 내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만에 하나 태사 대인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너를 용서치 않겠다."

내가 미인국에서 얻은 건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눈이 아니다.

미녀의 아름다움에 속지 않을 수 있는 눈을 얻었을 뿐이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무림에서는 언제나 여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듯, 지금도 그렇고 또 언젠가 내 목숨 하나를 살려 줄 수 있을 중요한 문제다.

뭐, 그건 그렇고.

지금 상황만 보면 태의는 충신이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며,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니다.

태의를 통해 그걸 확신하는 게 아니라, 헌원공지와 헌원파지를 보고 확신하였고 지금도 확신하는 중이다.

아! 대단한 자가 태의 말고도 또 있네.

그것도 둘이나.

어느새 헌원공지의 손에 작은 비수가 들려 있다.

그리고 그 비수가 자신의 목을 향해 있다.

"제 목을……. 흑흑. 제 목을 찔러 결백을 밝히겠습니다. 부디, 빠르게 제 여동생이 아버지에게 먹인 독의 해독탕을 다시 제조하여 복용하게 해 주세요."

"안 돼!"

"아니 되오, 소저!"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고함을 지르고, 입에 게거품까지 물며 헌원공지를 말린다.

그를 지키고 있던 헌원세가의 무인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으려 한다.

웃겼다.

한편으로는 참 미녀의 아름다움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고.

"놔둬."

내가 헌원공지에게서 비수를 빼앗으려는 무인에게 말했고.

무인과 이를 지켜보던 모두가 놀란 얼굴이 됐다.

난 곧바로 헌원파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는? 너도 결백해?"

"공자님! 공자님께서 저에게 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목숨으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쟤한테도 비수 줘. 떨어뜨리지 않게 손에 꼭 쥐여 줘."

결국…….

헌원공지와 헌원파지의 손 모두에 날카로운 비수가 들렸다.

이를 보는 누군가는 부르르 떨고, 또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다시 누군가는 차마 볼 수 없다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꿈쩍도 안 한다.

눈만 껌뻑껌뻑.

"뭐 해? 아버지 안 살릴 거야? 어서 해."

"……."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내 눈을 피한다.

"하라니까. 왜? 대신 해 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헌원세가 무인의 허리에 찬 칼까지 빼앗았다.

"너희 아버지를 살리는 길이다. 나라의 태사를 살리는 길이고. 너희의 희생은 모두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목을 내리치려니까.

"공자아아아아님!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공자니이이이임! 엉엉엉."

바닥에 이마를 처박으며 살려 달란다.

"말해. 진실이 무엇인지. 그럼 살려 주지."

그때였다.

헌원공지에게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지간히도 살고 싶었나 보다.

"저자! 저자가 시킨 거예요. 향원초를 밥에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그 정확한 양까지 저에게 알려 줬어요! 그러면 아무도 모르게 아버지를… 아버지를……. 흑흑흑. 살려 주세요. 엉엉엉."

헌원공지가 지목한 자는 다름 아닌 태의의 수제자 조구식이었다.

놀랐지만 티를 내면 안 된다.

"좋아, 헌원공지. 나는 너를 살려 주겠다. 하지만 넌… 죽어야겠다."

헌원파지를 향해 칼을 들이밀자.

"공자님! 저도 마찬가지예요. 조구식이! 조구식이 가르쳐 준 거예요. 정말이에요."

"어떻게 믿지?"

"제 전각의 시비들과 무인들은 다 알아요! 조구식이 매일 밤 제 처소에 온다는 사실을요."

난리가 났다.

차마 뭐라 말은 못 하지만, 헌원파지의 말을 들은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조구식과 헌원파지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네가! 네가 어떻게…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해! 이 개새끼야!"

헌원공지였다.

조구식은 헌원파지만이 아닌 헌원공지까지, 와! 대단한 놈이다.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 한다.

"네놈이었군! 감히 네놈이! 네 목을 베고, 네 가족까지 모두 목을 베어 저자에 효수할 것이다."

나에게 그런 권한은 없다.

겁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통했다.

이미 헌원파지와 헌원공지의 충격적인 발언이 나왔을 때부터 사색이 되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어 대던 조구식.

내가 칼을 치켜들고 무섭게 다가가자.

"사부님이 시킨 일입니다, 공자님! 살려 주십시오. 가족은 죄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사부님께서 시키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억울합니다! 엉엉엉."

웅성웅성.

술렁술렁.

자리에 있는 자 모두.

포박을 당하고 무릎을 꿇은 자들까지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태의.

민간에서 의술로 죽은 자마저 살린다는 신선으로 칭송되던 태의가.

하늘이 무너진 얼굴로 축 널브러졌다.

그래, 평소라면 모를까 저 상태면 통할지도 모른다.

"네놈이 죽일 놈이었군. 목을 내놓아라!"

칼을 번쩍 치켜들자.

그는 여전히 축 늘어진 상태로 이리 말했다.

"지금 날 죽이면… 태사를 죽여 헌원공지와 헌원파지를 황후로 만들려고 했던 진짜 배후를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툭.

칼을 내려놓았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배후가 있었다.

슬쩍 옆을 보니.

종인부와 도어사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젠 내 소관을 넘어섰다.

지금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태사를 살리는 일이다.

- 도착했다. 늦은 것 같지 않아 다행이군.

상취개 육 장로의 전음이 들렸고.

"모습을 드러내시죠."

모자가 달린 기다란 피풍의로 온몸을 가린 사내, 아니 노인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피풍의에 먼지가 가득 쌓인 것을 보니, 먼 길을 매우 빠르게 말을 타고 달려온 듯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고.

그가 천천히 모자를 벗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안휘의 청수림에서 온 길평이라 하오."

그의 그 한 마디에.

모두가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상취개 육 장로에게 그토록 애절하게 부탁했던 인사가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아! 정말 오래도 기다렸다.

그가 바로…….

3대 의선 중 1인인 약선(藥仙) 길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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