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55화 (54/174)

55화

다그닥 다그닥.

쿵.

"이히이이이잉."

고금 제일이라는, 하얀 눈의 전설로 통하는 그녀.

무신 나타샤 표도르바와 싸우기 위해 우랄산으로 가던 중.

사고가 났다.

내가 아니라 어느 여인이다.

나에게 정신이 팔렸었나 보다.

빠르게 달려오던 마차와 정면으로 부딪쳐 쓰러졌다.

피를 철철 흘린다.

난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소피아! 괜찮아? 소피아! 소피아! 엉엉."

그녀의 늙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통곡을 하며 달려온다.

그런데…….

허름한 옷은 둘째 치고, 그녀의 어머니 역시 다리를 크게 절며 오고 있다.

"성좌님… 엉엉. 성좌님, 엉엉엉. 제 딸을… 엉엉. 제 딸에게 성은을……. 엉엉엉. 죽기 전에 딱 한 번만이라도……. 엉엉엉."

아! X팔.

하마터면 속을 뻔했다.

아슬아슬했다.

나타샤 표도르바와 싸우러 가야 하는데.

이번엔 모녀 사기단이다.

조직적으로 사기를 치려는 여인들이 몇 번 있었지만, 모녀 관계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무섭군.

쓰러져 피를 철철 흘리는, 그러니까 마차와 부딪혀 혼절한 여인의 심박수가 갑자기 증가하는 걸 감지했기에 이게 사기인 줄 알았다.

"일어나."

반응이 없다.

심박수가 더 빨라졌다.

"여봐라! 이 모녀를 당장 끌고 가 뇌옥에 며칠 가두고, 곤장 몇 대. 아니, 좀 많이 때려서 내보내라."

쉬이이이이이익!

이단 날아 차기.

퍼퍼퍼퍼퍼퍼퍼퍼퍽!

내 호위 무사들만이 아닌,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까지 가세해 두 모녀를 지르밟았다.

그나저나 대단하다.

성은 한 번 입겠다고 마차에 뛰어들다니.

휴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우랄산을 향했다.

응, 그날도 무참히 깨졌다.

나타샤 표도르바는 인간이 아니다.

절세의 아름다움을 갖춘 무신이다.

* * *

나타샤 표도르바에게 두들겨 맞으며 성은을 베푼 지 50일이 지났다.

당연히 연전연패다.

그러는 동안 별의별 일들이 있었다.

술에 취한 척하는 여인도 있었고.

아놔!

그때 생각하면 웃겨 죽겠네.

나타샤 표도르바에게 매일 깨지는 게 화도 나고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혼자 마시기 적적해 이곳에서 여왕 다음으로 높은 서열의 귀족 여인과 한잔했다.

단 한 번도 꼼수를 부리거나 그런 적이 없고, 내가 가장 신뢰하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주량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내 속도에 맞춰 주려고 노력을 하다가, 결국 만취하여 쓰러졌다.

그래서 그녀를 그녀의 방에 데려다주려고 하는데, 오줌이 마려워 잠깐 화장실을 갔다가 왔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오줌을 싸고 막 왔는데, 큭큭큭.

미친!

완전히 만취하여 혼절했던 그녀가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어험."

내가 기척을 내자 다시 혼절한 척한다.

하하하하하하!

그녀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믿고 있었다.

믿는 도끼도 조심해야 하나 보다.

발등 찍힐 뻔했다.

그 외에도 많다.

이젠 그 숫자조차 세지 않는다.

아니, 셀 수가 없다.

너무 많아서.

착한 척 연기를 하는 여인도 쌔고 쌨다.

가끔 털털한 척하는 여인들도 있었고.

나약한 척하는 여인들도 많고.

아놔!

죄다 연기였다.

연기가 아닌 경우도 당연히 있다.

나는 이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다.

목표가 있고 없고의 차이.

아니, 눈빛만 보고 숨소리만 들어도 안다.

그리고 그중 제일 악질.

와!

얘들은 진심 악질 중에서도 최악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눈길이라도 한 번 주면, 위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그 여인을 험담하는 여인들이 있더라.

처음에는 진짜 이해가 안 갔다.

새벽이슬보다 더 맑고, 봄의 새순보다 더 순수한 눈을 가진 그녀들이다.

그렇게 맑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눈을 뜨고는, 뱀보다 더 사악한 말을 아름답게 내뱉어 다른 여인들을 흉봤다.

여왕에게 말해 법을 개정했고, 그녀들은 모두 멀고 먼 오지로 유배를 보냈다.

툭.

아! 또 시작이군.

내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방에서 시중을 들며 물건을 정리하던 시비 한 명이 바닥에 물건을 떨어뜨렸다.

"아이고. 이런."

이내 허리를 깊이 숙여 떨어진 물건을 집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시비.

오늘따라 더 깊이 파인 옷을 입었고.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드러나는 그녀의 아름다움.

미인국의 여인들의 그 아름다움은 확실히 중원 여인들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다.

"바닥까지 더러워졌네. 닦아야겠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혼잣말을 하며, 쪼그려 앉아 걸레질을 하는 그녀.

그녀의 무릎이 그녀의 가슴을 압박했고, 그렇지 않아도 크고 풍성했던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런 류의 유혹은 하루에도 수십 번 있는 일이다.

정말 고전 중에서도 고전의 수법이고 뻔해도 너무나 뻔한 그런 수법 말이다.

그래서 이런 건 이젠 전혀 감흥이 없… 없긴 왜 없어!

와!

이건 진짜 적응 안 되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매번 나를 흥분시킨다.

어제 나타샤 표도르바에게 맞아서 생긴 상처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성은을 너무 많이 베풀어 피곤해 그런 것인지.

코에서 코피가 난다.

큭큭큭.

나도 참 멀었다 싶다.

됐다.

시녀의 아름다움은 이따가 또 구경할 수 있으니.

가자.

우랄산으로.

오늘은 기필코 나타샤 표도르바에게 주먹 한 방 날려야겠다.

* * *

미인국으로 넘어온 지 330일이 되던 날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나타샤 표도르바에게 이렇다 할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그래서 결의를 다지고, 오늘은 기필코 그녀에게 한 방 먹일 생각으로 준비를 하는데.

빵빵빵빠라라라라라라!

궁 밖에서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하나도 아닌 수십, 수백 개의 금관악기가 길고 크게 포효하였다.

창문을 열어 보니.

온 백성이 집 밖으로 나와 꽃잎을 날리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성좌님!"

알리사 이바노바 여왕이 대신들과 함께 크게 기뻐하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성좌님, 축하합니다. 성좌님의 첫 번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들이에요."

"아… 아들? 제 아들이요?"

"네, 우리나라에서 100년 만에 태어난 사내아이입니다."

여왕과 대신들은 자신들이 아이를 낳은 것보다 더 기뻐하며 나를 축하해 줬다.

기분이 참 묘했다.

"보러 가시겠어요?"

"당연하죠."

"바로 모시겠습니다."

나와 여왕 그리고 궁의 대신들은 빠르게 아이가 태어난 곳을 향했다.

* * *

내가 미인국으로 넘어온 첫날의 그 마을이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그녀가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우리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고, 나는 말을 타고 가며 여왕에게 물었다.

"아들은 태어나면 어떻게 되나요?"

"가 보시면 곧 아시겠지만, 왕 중의 왕처럼 대접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그런 후에는요?"

"이차성징이 오면 이곳을 떠나 모스콘으로 가게 됩니다."

"모스콘이요?"

"성좌님께서는 모스콘에서 오신 게 아니시죠?"

"네."

"간혹 그런 분들이 계시다고 듣기는 들었는데. 성좌님께서 그러실 줄은 몰랐네요."

"모스콘은 어떤 곳인데요?"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입니다. 각국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이차성징이 올 때까지 그 나라에서 자라고. 이차성징이 오면 낳아 준 어머니와 함께 모스콘으로 가서 살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남자가 모이는 곳이죠."

"그곳으로 가면 어머니 말고 아이를 돌봐 주는 사람이 있나요?"

여왕이 씩 웃는다.

"사내아이는 모스콘에서 자란 후,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나라를 스스로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자신이 태어난 국가는 제외하고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아니면 족보가 심하게 꼬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요?"

"그래서긴요. 모든 국가에서 성좌님이 오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아니 간절함을 넘어 목숨을 걸고 바라지 않겠어요? 당연히 모든 국가에서 그 나라의 기둥뿌리가 뽑힐 때까지 모스콘에 지원을 해 줍니다. 우리 구넬샤찌국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 그렇군요."

"도착했네요. 저기 보세요, 성좌님."

그 마을에 도착했다.

이미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지금도 계속 몰려드는 중이다.

사내아이의 탄생이 국가의 가장 큰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집 주변으로는 이미 그 집의 담장보다 높은 음식과 돈, 금은보화, 각종 모피며 선물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또 집을 지키는 경계까지 삼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웃고 울며, 사내아이의 탄생을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이다.

내 아이.

아주 작은 내 아이를.

감격에 겨워하는 산모가 힘겹지만 직접 나에게 안겨 주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산모가 가장 먼저 울었고.

그 가족들이 울었으며.

여왕과 대신들이 다시 울었다.

그리고 나도 울었다.

나를 닮아 돌로 빻은 오징어처럼 생겼으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엄마 닮았다.

살다 살다 이렇게 예쁜 아이는 처음이다.

* * *

무림으로 돌아갈 날이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행운석을 부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번엔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그사이 300명의 아이들이 더 태어났다.

모두 내 아이들이다.

가가호호를 돌며 내 아이를 모두 만났고, 안아 주었고, 축복해 주었다.

놀라운 건, 300명의 아이 중 아들이 무려 열세 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는 구넬샤찌국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합쳐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과 같은 일이라 하였다.

거둔 씨보다 지금까지 뿌린 씨가 몇 곱절은 되기에, 앞으로도 아들들은 계속 태어날 것이다.

그 아들들은 성인이 되면 구넬샤찌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선택해 갈 것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구넬샤찌국으로 오게 될 것이다.

이래저래 내가 이 세상에 정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셈이다.

고생했다, 나태한.

뭐, 그건 그거고.

오늘도 나는 나타샤 표도르바와 싸우기 위해 우랄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만… 그만하겠습니다, 성좌님."

"왜죠?"

털썩.

무릎까지 꿇으며.

"감사합니다."

"갑자기 왜… 왜 이러세요?"

"성좌님의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설의 무신 나타샤 표도르바.

그녀가 내 아이를 가졌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나타샤 표도르바뿐만 아니라 구넬샤찌국 최강의 전사 실버 로마노프와 스톰 나이트 아나스타샤까지 임신을 했다.

그리고 나는…….

미인국을 떠나기 전에, 이 세 명의 최강 전사들이 낳을 아이들에게 하나의 선물을 주었다.

혼원귀일신공(混元歸一神功)을 물려준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들이.

나타샤 표도르바와 실버 로마노프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그 답으로 자신들의 절기(絶技)를 나에게 준 것이다.

이들의 검술은 우리의 무공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절기라 함은 절초(絶招), 즉 필살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각각.

실버 로마노프에게서는 샤이닝 라이트(Shining Light).

아나스타샤에게선 블랙 스톰(Black Storm).

그리고 나타샤 표도르바에게선 아이언 스노우(Iron Snow)를 전수받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절초들이라 하겠다.

아니, 이건 그냥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빛보다 빠른 샤이닝 라이트.

보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파괴적인 블랙 스톰.

전설로만 전해지는 사천 당가의 만천화우(滿天火雨)를 비웃으며 세상 자체를 파멸로 몰아넣을 만큼 강력한 아이언 스노우까지.

무지막지한 것을 손에 넣었다.

이곳에서 마지막 날까지, 그녀들은 상세히 그녀들의 절기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 * *

마지막 날.

고민.

또 고민.

내 아들과 딸들 그리고 그 어미들을 모두 성으로 불러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또 고민.

행운석을 부술까 말까.

결국…….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행운석을 다시 목에 걸었다.

내가 잠시 보이지 않아도 걱정하지 말라고.

더 멋지고 훌륭한 성좌가 되어 돌아오겠다고.

몇 번에 걸쳐 그녀들에게 말한 후, 번쩍!

* * *

번쩍!

벌컥벌컥.

"우웩! 퉤!"

공천근의 독에 대한 해독탕이 막 목으로 넘어갈 때.

다 뱉어 버렸다.

그리고 그릇까지 바닥에 던져 깨뜨려 버렸다.

쨍그랑.

극도의 긴장감 속에 나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놀란 눈을 떴다.

그리고 이번엔 항원초의 독에 대한 해독탕.

입으로 가져가지도 않고.

쨍그랑.

"지금 무슨 짓을 하……."

태의가 대로하여 나를 향해 호통을 쳤지만, 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리고…….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또 억울함이 가득하여, 다시 가련하고 한없이 불쌍하게.

무엇보다 무지막지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 두 여인.

헌원공지와 헌원파지의 두 눈을.

내가 빤히 들여다보았다.

역시!

그거였어.

행운석이 나를 미인국으로 보낸 이유.

보인다.

똑똑히 보인다.

헌원공지와 헌원파지.

나는 지금 누가 거짓말을 하고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더 이상…….

여인의 아름다움 따위가 내 눈과 귀를 가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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