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몰랐는데, 구넬샤찌국은 이웃 국가와 전쟁 중이었다고 한다.
대규모의 전면전은 아니고,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국지전이다.
각기 수천 명씩 수년째 이어 온 지루하면서도 그래서 더 끔찍한 전쟁이었다고.
그러다 내가 왔다는 소식이 그 전장에까지 전해졌고.
그날 밤.
실바 로마노프는 단신으로 적진에 침투해 적의 대장군은 물론 적군 1,000명의 목을 홀로 벤 후, 오랜 시간 이어진 그 전쟁을 종식시켰다.
나를 만나기 위해, 성은을 입기 위해 그녀의 전투력이 폭발했던 것이다.
구넬샤찌국 궁전을 병풍처럼 감싼 우랄산.
그 높고 깊은 곳의 넓은 공터에서 그녀와 마주했다.
엄청난 기세다.
저토록 가냘프고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저토록 맑고 순수한 눈을 가진 여인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게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약속… 지켜 주시는 겁니다, 성좌님."
"물론이오, 실버 로마노프 장군."
뭐, 그래 봐야 여자다.
그것도 예쁜 여자.
아! 그런데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놈이 여자 때리는 놈이라고 했는데.
뭐, 이건 수련이니까 괜찮겠지.
내 2갑자의 내공과 최강의 외공.
그래, 내공은 쓰지 말자.
여긴 내공 같은 거 없는 것 같다.
내공 빼고.
그래도 충분하다.
최강의 외공에 더해, 나에게는 무림 최고의 신공이라 할 수 있는 타구봉법이 있으니.
아무리 구넬샤찌국 최강의 전사며 장군이라지만.
내가 살살해도 3초식이 지나기도 전에 제압할 수 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성좌님."
"오시오, 실버 로마노프 장군."
"네, 사양하지 않겠……. 아! 잠시만요. 속옷이 너무 꽉 조여서 움직임에 제약이 있네요. 속옷 좀 벗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 네, 네. 어험."
난 배려심에 그녀로부터 등을 돌렸고.
쉬이이익.
퍽!
기절했다.
눈을 떠 보니, 내 침상이었고.
그녀와 나란히.
실오라기 하나 입은 게 없었고.
성은을 베풀었다.
* * *
"어제의 꼼수는……. 휴우, 됐소. 내가 방심해서 그런 것이니. 오늘은 진짜로 상대해 드리겠……. 야! 아직 시작이라고 안 했잖아!"
쉬이이익!
퍽!
기절.
눈을 떠 보니, 침상.
그녀와 나, 모두 실오라기 하나 없었고.
성은, 휴우.
* * *
"오늘은 진짜……. 얍!"
네가 하는데 나라고 못 할쏘냐.
이번엔 선제공격.
기습이다.
하아!
그런데 확실히 전장에서 닳고 닳은 장수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있었고, 오히려 내가 기습할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반격을 가했다.
챙!
채채채챙!
챙챙챙!
만만치 않다.
어떻게 저렇게 후 불면 날아갈 것 같고,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여인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강하다.
아니, 빠르다.
그녀의 검을 내 눈이 따라가지 못한다.
이건 진심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틀 동안 이어진 그녀의 꼼수가 아니라.
내공을 쓰지 않는다면…….
휴우.
난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쉬이이익.
퍽.
기절.
깨 보니 침상.
실오라기 없고.
성은.
* * *
하루에 다섯 번 베풀어야 할 성은을, 실버 로마노프 때문에 여섯 번씩 베풀어야 했다.
이 문제로 알리사 이바노바 여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며칠에 걸쳐 회의를 벌였고, 법까지 제정하여 실버 로마노프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내가 말렸다.
이제 이건 성은이 어쩌고 몇 번이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아니, 이 나라 모든 남성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다.
응, 이 나라에 남자는 나 하나니까, 모든 남자의 자존심 걸린 게 맞다.
아무튼…….
"와라! 실버!"
"오늘도 봐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성좌님!"
챙!
채채채채챙!
챙챙챙!
펑!
쿠당탕탕.
그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다섯 바퀴나 땅을 굴렀다.
아! 젠장.
나도 모르게, 내공을 써 버렸다.
"미, 미안."
"방금 그건 뭐죠?"
"내공이란 건데. 이거 안 쓰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아! 마나를 쓰신 거군요. 괜찮아요. 저도 쓰면 되니까."
X팔!
여기 세상에도 그런 게 있었어.
그리고 그날부터는, 진심 목숨을 걸고 싸웠다.
펑!
퍼퍼퍼퍼퍼펑!
콰콰콰콰쾅!
펑펑펑!
콰르르르르릉.
퍽!
기절.
침상.
실오라기 없음.
성은.
* * *
2갑자의 내공을 다 쓰지는 않았다.
반 갑자만 쓰려고 했다.
응, 보름 동안 연속으로 또 깨졌다.
그래서 1갑자를 썼다.
그녀가 말한 마나라는 그녀의 기운이 반 갑자의 내공과 맞먹는 거라, 반 갑자만 쓰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1갑자까지만 썼고.
휴우.
석 달이다, 석 달.
석 달만에 드디어 내가!
그녀를!
이겼… 쉬이이익.
퍽!
기절.
침상.
실오라기 없음.
성은.
아! 다 이길 뻔했는데.
마지막에 흔들렸다.
내일은 꼭 이긴다.
* * *
오늘은 꼭 이긴다.
이긴다!
이긴다!
속으로 이긴다는 소리를 수천 번 외치며 우랄산을 올랐다.
오늘도 그녀가 은빛 머릿결을 휘날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곳에 도착… 뭐야?
실버 로마노프가… 위대한 전사 실버 로마노프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그리고 쓰러진 그녀를 고고한 자세로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
흑빛 갑옷.
흑빛 머릿결.
흑빛의 눈동자.
그와 대조되어 더욱 빛나는 하얀 피부.
그녀가 들고 있는 검은, 하얀빛과 검은빛을 동시에 뿌리고 있다.
차가우면서도 도도하게 서서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는데.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아름답고, 멋있고, 엄청난 위엄까지 느껴지는 미녀다.
"누, 누구……? 어찌하여 실버 로마노프를 죽였냐!"
"죽지 않았습니다."
안다.
실버 로마노프는 기절한 상태다.
"여봐라!"
"넵!"
그녀가 외치자 곧바로 주변에 은신하고 있던 인영들이 쏟아져 나왔다.
엄청난 은형술이고 은신술이다.
내가 아무리 검은 갑옷의 여인에게 정신을 팔렸다고 해도, 이곳에 도착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들의 기운을 감지했다.
"실버 로마노프를 구넬샤찌 궁전으로 모시고 가 치료하도록 하라."
"넵!"
여덟 명의 여인들, 아니 전사들이 실버 로마노프를 업고는 바람과 같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실버가 응한 정당한 대결이었습니다. 실버가 졌고, 제가 이겼습니다."
"방금 그녀들은 누구였죠? 실버를 데리고 간 전사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사람들은 그녀들을 에이트 고스트라 부릅니다."
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스톰 나이트(Storm Knight)와 그녀를 따르는 에이트 고스트(Eight Ghost).
실버 로마노프가 구넬샤찌국 최강의 전사라면.
스톰 나이트 아나스타샤는 이 세계 최고의 전사다.
무림으로 따진다면, 그녀가 바로 이 세계의 천하제일인이다.
"실버와 대결을 위해 온 것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실버만큼이나 가냘프고, 검은 머릿결과 검은 갑옷 때문에 더욱 하얘 오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절세의 미녀다.
"성은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국법으로, 구넬샤찌국의 백성이 아니라면 성은을 베풀 수 없습니다."
"성좌님의 결정이 그 어떤 나라의 법보다 상위의 법임을 알고 있습니다."
"실버 로마노프는 나와 석 달간 싸움을 했지만, 좋은 여인이었소. 그런 여인에게 피를 보이게 한 당신에게 성은을 베풀 일은 없을 것이오."
"안 되면… 힘으로……."
힘?
설마 힘으로?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리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스톰 나이트 아나스타샤가 인상을 살짝 구기는가 싶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에게서, 아!
엄청나다.
내공으로 비교하자면 1갑자가 넘는 기운이 솟구친다.
하얀빛과 검은 기운까지 뿜어져 나와 한데 섞여 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아나스타샤를 이기려면, 어쩌면 내 모든 것을 쏟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마음이 이나요?"
부정할 수 없다.
그녀는 이미 나를 꿰뚫어 보았다.
무(武)에 대한 나의 의지를 보고, 일부러 자신의 힘을 드러낸 것이다.
덤비라고.
싸우자고.
목숨을 걸고 부딪혀 보자고!
승부욕을!
무인으로서의 본능을!
그녀가 일깨웠다.
"이기면 베풀지. 그깟 성은."
"오시지요, 성좌님."
"마다하지 않겠다."
나는 2갑자가 넘는 내공을 모조리 끌어 올려… 응.
쉬이이익.
퍽.
침상.
실오라기 없음.
성은.
나는 그녀에게 100일 동안 성은을 베풀어야 했다.
* * *
"성좌님, 흑흑.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흑흑흑.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꼭… 꼭 이루어 드리고 싶습니다. 도와주세요. 흑흑흑. 저에게 성은을… 베풀어 주소서. 엉엉엉."
와!
아직도 이러고 있는 애들이 있네.
"여봐라! 얘 좀 끌고 가서 뇌옥에 며칠 가두고, 곤장 몇 대 때린 다음에 보내라."
쉬이이이이익.
퍼퍼퍼퍼퍼퍼퍽!
이단 날아 차기가 여인에게 쏟아졌고.
질질 끌려갔다.
미인국에 온 지 반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밭을 가는 여인만 봐도 심장이 내려앉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 앞에서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리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말이다.
이거, 절대적 아름다움 말이다.
하나의 나라를 무너뜨릴 만큼 대단한 그녀들의 아름다움이, 신기하게도 적응이 된다.
한두 명도 아니고, 가는 곳마다 절세의 미녀들을 보고, 매일 보고, 매일 성은을 베풀고, 이젠 죽어라 싸움까지 하고.
응, 아직도 내가 매일 두들겨 맞는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미녀들의 아름다움이 내 눈과 귀를 가리지 못한다.
가끔 조직적으로 움직여 나를 유혹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보인다.
그 수작질이.
그 음탕함이.
그 교묘함이.
그 거짓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완벽한 건 아니다.
여전히 그녀들이 아름다운 건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오늘은 기필코 아나스타샤를 꺾겠다.
* * *
아나스타샤와의 대결 150일째.
아직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엄청난 성과를 보이고 있다.
타구봉법의 놀랄만한 발전.
문제는, 이게 조금은 기형적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수련을 통한 터득이 아닌, 실전을 치르며 내 것으로 만드는 중이다.
실전 타구봉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나사트스타샤는 이 세계 최고의 전사이기 때문이다.
쉬이이이잇!
퍼퍼퍼퍼퍼펑!
콰콰콰콰콰콰쾅!
드디어 그녀의 갑옷을…….
내 타구봉법을 제대로 막지 못해, 그녀의 갑옷이 한 척 길이나 잘려 나갔다.
그리고 드러난 그녀의 새하얗고 탐스러운… 아, 젠장!
한눈을 팔았고.
쉬이이이익.
퍽!
기절.
침상.
실오라기 없음.
성은.
내일은 꼭 이긴다.
* * *
"에이트 고스트, 왜 아나스타샤가 안 보이지?"
"……."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비켜 봐, 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
그녀들은 길조차 비켜 주지 않는다.
힘으로 뚫어 볼까?
아나스타샤와는 150일이 넘게 싸웠지만, 아직 에이트 고스트와는 싸워 본 적이 없는데.
어느 정도일까?
진짜 한번 붙어?
그러다 지면…….
아! 한꺼번에 여덟 명을 상대하는 건 좀 그런데.
내가 변태도 아니고.
싸움 말고.
성은 말이다.
그렇게 내가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쾅!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콰르르르르르르르르.
산 뒤편에서 엄청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고.
나를 막던 에이트 고스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지어…….
"스톰 나이트님을 지켜라!"
나를 내버려 두고 여덟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나는 곧바로 그녀들의 뒤를 쫓았고.
보았다.
세계 최강이라는 아나스타샤가.
그 누구도 쓰러뜨릴 수 없다는 스톰 나이트 아나스타샤가.
피를 철철 흘리며 한 여인의 발아래 쓰러져 있었다.
"비켜라!"
에이트 고스트가 몸을 날렸지만.
쉬이이익.
콰콰콰콰콰콰콰콰쾅!
한 번의 동작만으로, 에이트 고스트 여덟 명을 아나스타샤와 똑같은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어마어마하다.
마치 전장의 신, 무신을 보는 느낌이다.
아니, 그게 아니다.
아름다움의 신, 미의 여신이 강림하였다.
갑옷이 아닌 하얀 털가죽을 입은.
긴 백발을 휘날리는.
검이 아닌 붉은 철퇴를 손에 칭칭 감은.
그게 전설이 아니었어?
하얀 눈의 전설.
전설로 들었던 그 이야기가, 실제였다.
이 세계에서는 천하제일이 아닌 고금 제일인이라는 전무후무한 무신.
그녀다.
나타샤 표도르바가 내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