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52화 (51/174)

52화

새하얗다.

피부가 다섯 명 모두 눈처럼 하얗다.

금발 세 명, 갈색 한 명, 다른 한 명은 은빛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눈동자도 파란색부터 시작해 제각각.

색목인이다.

헌원공지나 헌원파지보다 신장은 머리가 반 개는 더 크고, 얇은 발목이나 개미허리보다도 더 길다.

조막만 한 얼굴에 가냘픈 몸매, 쭉쭉 뻗은 팔다리.

사람이 맞긴 한가?

완벽함을 넘어선 아름다움이라 현실감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아!

심장이, 심장이 멎는 것 같다.

중독 때문인가?

아닌데.

갑자기 숨까지 가빠지고.

헌원초와 공천근에 대한 중독이 아니라, 사랑에 중독되어 버렸다.

무형지독을 넘는 극독이다.

이러다 죽을 것 같다.

어떻게!

말이 돼?

다섯 명이 모두 이토록 아름답다는 말인가!

아니, 그보다!

왜?

어찌해서?

이런 경국지색의 미녀들이 밭을 갈고 있지?

혼란스럽다.

머리가 어질해 쓰러질 것 같아.

"괜, 괜찮으세요?"

다섯의 절대 미녀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온다.

그녀들이 한 걸음씩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마치 만검의 고수가 만검을 펼치는 것처럼 느리게 느껴진다.

더 놀라운 건.

나도 놀랐는데, 나만큼이나 그녀들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괜찮으세요? 제가 상태를 좀 살펴봐 드릴까요?"

말을 하며 손을 내미는 그녀.

그녀의 손끝까지 떨린다.

내가 뭐라고?

왜지?

아니, 그보다.

진짜 그녀가 나를 만지려 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멈추어라!"

저 멀리, 또 다른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더니.

일곱 명이다.

일곱 명의 무지막지하게 아름다운 여인들이, 우리 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다.

그녀들 역시 밭을 갈다가 오는 것 같은데, 세상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그녀들만이 보이는 것처럼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아름답다.

세상에 어찌 저토록 아름답게 달릴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독을 먹고 죽었나?

그럼 여긴 지옥이 아닌 천국이 확실하다.

"멈추어라!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어서 성좌님에게서 떨어져라!"

일곱의 여인은 내 곁으로 오자마자 조금 전 다섯의 여인에게 적대감을 대놓고 드러냈다.

하지만 다섯의 여인도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다.

"성좌님 앞에서 어찌 목청을 높이느냐! 먼저 예를 갖추어라."

다섯 여인 중 한 명이 꾸짖자, 급하게 달려온 일곱 여인이 순간 크게 당황했다.

곧바로 무릎을 반쯤 굽히고, 머리와 허리를 숙여 나에게 사죄의 예를 갖추었다.

"죄송합니다, 성좌님. 성좌님을 모시는 데 실태를 보였습니다."

성좌?

아까부터 왜 자꾸 성좌라고 하는 거야?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아! 이 사람들… 아니, 이 절대 미녀님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착각을 한 모양이고.

이런 젠장.

분위기 좋았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우리 땅에 오신 성좌님이시다. 성좌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 주셨다. 우리 마을로 모실 테니 그리 알아라."

"건너편 밭에서 이곳까지 달려온 거 보면 몰라? 성좌님을 처음 발견한 게 우리라서 곧바로 달려올 수 있었던 거야. 성좌님은 우리 마을로 모시겠다."

"억지 부리지 마. 성좌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셨어."

"다치기 전에 물러나라. 성좌님은 우리가 모신다."

얘들 뭐지?

이쯤에서 내가 그 성좌인지 뭔지가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하는데.

너무 살벌하다.

물론, 살벌한데 그 살벌함마저 하늘을 무너뜨리고 땅을 뒤엎을 만큼 아름답다.

그때였다.

탁.

탁.

탁탁.

탁.

무슨 소리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섯 여인과 일곱 여인 모두 나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았다.

또 다른 절세 미녀.

이곳에서 살벌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묵묵히 홀로 떨어진 곳에서 밭을 갈고 있다.

역시나 무지막지한 절대 미녀다.

그런데… 아!

허름한 옷을 입고, 묵묵히 구부려 앉아 밭을 가는 모습을 보니.

긴장했던 내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힘든 환경 속에서도 아버지를 위해 묵묵히 헌신했던 헌원공지가 생각나기도 하고.

나는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역시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멍한 상태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홀로 무엇을 그리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데.

와!

와와와아!

절대의 절세 미녀다.

그리고.

"엇! 죄송해요, 성좌님. 미천한 제가 성좌님의 심기를 흩트렸나 봅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런!

용서라니!

하늘을 향해 1,000만 번의 절을 하며 당신과의 만남에 감사함을 표하고 싶은 심정… 어? 무슨 소리지?

쉬이이이이이이이익!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익!

정확히 열두 개의 무언가가 엄청난 파공성을 일으키며 날아오는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보니.

조금 전의 그 다섯과 일곱의 절세 미녀들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와 도약?

아! 저건 분명 이단 옆차기 자세인… 허걱!

퍽!

퍼퍼퍼퍼퍼퍼퍽!

퍽퍽퍽!

열두 여인이 이단 날아 차기로 방금의 그 여인을… 와!

때렸다.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퍽퍽!

퍼퍼퍼퍼퍼퍼퍼퍽!

계속 지르밟는다.

계속.

계속.

이건… 그냥 다구리다.

구타도 아니고, 집단 폭행도 아니고, 뒷골목에서 왈패들이 하는 그 다구리 맞다.

"이년아! 어디서 얄팍한 수작질이야!"

"간사한 년! 성좌님께서 네년 그 여우짓을 모를 줄 알아!"

"가식 떨지 마, 이년아! 어디서 신데렐라 코스프레를 하고 지랄이야."

신데렐라는 누구지?

코스프레는 또 뭐고?

퍽퍽!

"이년아! 어떤 남자가 그런 유치한 수작질에 넘어가겠냐!"

나, 방금 넘어갔는데?

그나저나 구해야 하나?

그때.

반격이 시작됐다.

"이년들아, 그만 때려! 네년들이 성좌님 앞에서 계속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니까 내가 나선 거잖아!"

"그래도 이년이!"

퍽퍽!

퍼퍼퍼퍼퍽!

막싸움이 시작됐다.

서로 머리끄덩이까지 잡고.

살벌하다.

아!

큰일이다.

나 때문에, 오해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오해를 풀어야겠다.

"저, 저기……."

순간, 거짓말처럼 싸움이 멈췄다.

머리끄덩이를 잡은 상태 그대로, 누군가는 코피도 흘리고.

아무튼.

"저기…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서둘러 잡았던 상대의 머리끄덩이를 풀고, 코피도 닦고, 옷매무새도 빨리 정리하고.

웃는다.

나를 향해 열세 명의 절대 미녀가, 환히 미소를 짓는다.

머리카락까지 귀 뒤로 넘기고.

저건 분명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려고 하는 행동 같은데?

아! 오해, 그래 오해를 풀자.

"저는 말씀하신 성좌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남자입니……."

쟤들 왜 저래?

그냥 평범한 남자라고 했을 뿐인데, 울려고 한다.

감격에 겨워 몇몇은 이미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왜?

왜냐고!

내가 너무 못생겼나?

못생긴 남자 처음 봐?

저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비한다면, 나는 진짜 그냥 오징어도 아니고 돌로 심하게 빻은 오징어겠다.

"성좌님."

"저, 그 성좌… 아닌데요?"

"남자."

"네, 제가 남자는 맞습니다."

또!

또 같은 반응이다.

누군가는 서로 얼싸안고, 두 손을 꼭 맞잡으며 기뻐한다.

그러더니, 처음 앞에서 대치했던 여인 둘이, 자기 무리의 뒤에 있는 여인들에게 뭐라 뭐라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여인 둘은 나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간다.

음, 뭘까?

나머지 열한 명은 여전히 나를 무슨 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감격에 겨워 보고.

슬슬 부담되는데?

"성좌님, 저희 마을로 가시죠. 조금도 부족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아니에요, 성좌님. 저희 마을로 가세요. 천국이 부럽지 않게 지극정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저, 정말 그 성좌니 뭐니가 아니라니까요. 사람 잘못 보신 거예요."

"21년 만입니다."

"네? 뭐가요?"

"21년 만에 우리나라를 찾아 주신 성좌님이세요."

"제, 제가요?"

"네."

"환영합니다, 성좌님."

"사랑해요, 성좌님."

사랑?

절세의 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냥 성좌할까?

아! 뒷감당 안 된다.

"저, 그 성좌가 진짜 아니라니까요."

"남자잖아요."

"남자는 맞죠."

"꺄르르르르르."

이젠 발까지 동동 구르며 좋아한다.

와! 그냥 성좌 하고 싶다.

절세 미녀가 한 명도 아니고, 열한 명이 저렇게까지 좋아하는데.

그래, 하루를 성좌로 살고 내일 바로 처형장의 이슬이 되어도 좋다.

천하제일 미녀들의 성좌가 되… 휴우, 그래도 그건 아니지.

"오해가… 정말 오해하신 듯합니다."

"성좌님, 21년 만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신 남자분이세요. 그러니 성좌님이 맞으시죠. 혹여, 저희가 성좌님께 무슨 잘못을 하여 그러시는 거라면, 용서해 주십시오."

21년 만의 남자?

그럼… 그럼 남자가 없었단 말이야?

애는 어떻게 낳는데?

아니, 그보다.

그럼 나 진짜 성좌야?

허거거거거걱!

"제, 제가… 제가 진짜 성좌…예요?"

열한 명이 눈에서 별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나를 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나, 성좌다!

절세 미녀들이 열한 명, 아니 조금 전 어디론가 간 두 명까지 포함.

열세 명 절대 미녀들의 성좌!

천지신명이시어!

행운석님!

감사합니다.

저, 진짜 착하게 살게요.

눈물이 쏟아졌… 뭐지?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지진이 아니다.

땅이 울린다.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보니.

아까 어디론가 급히 갔던 두 여인.

각기 달려갔던 방향에서 돌아오는데.

혼자가 아니다.

각기 수백 명에 달하는 여인들을 이끌고… 허걱!

허거거거거거거걱!

허거거거거거거거거거거걱!

양쪽에서 달려오는 수백 명의 여인.

모두가 절세지경의 초극강 미녀들이다.

오! 신이시여.

저, 진짜로 진짜로 착하게 살게요.

"성좌님!"

"성좌님!"

나를 중심에 두고, 양쪽 마을에서 사람들을, 아니 절대 초극강의 미녀들을 죄다 이끌고 온 모양이다.

"성좌님은 우리 마을로 모신다!"

"아니야! 우리 마을로 모실 거야!"

나를 두고, 1,000명이 넘는 절대 미녀들이 싸우고 있다.

엄마!

나, 장가가.

며느리가 대충 1,000명은 될 거 같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000명이 넘는 절대 미녀들에게 둘러싸였는데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

하악하악 그 내시라면 모를까.

정상적인 남자라면, 누구라도 지금 내 상태와 같아질 거다.

그런데…….

"정말 한번 해 보자는 거야?"

"성좌님을 모실 수 있다면, 우린 죽음도 두렵지 않다."

"누가 할 소리! 우린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성좌님을 위해 싸울 것이다."

어라?

이러다 진짜로 전쟁이라도 벌일 기세다.

어떻게든 싸움은 말려야겠다.

"저기… 어험. 어험."

내가 나서자.

1,000명의 살벌했던 절세 미녀들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또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어떻게든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환한 미소를 짓는다.

와!

와!

와!

진짜 눈물 난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니, 죽긴 왜 죽어.

일단 여인들의 싸움부터 말린 후.

행운석… 부숴 버린다.

무림으로 돌아갈 수 없다.

평생 이곳에 눌러살 거다.

큭큭큭.

"어험. 제가… 싸움하는 여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험을 해 봤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아, 충분히 통할 것 같아 말해 본 거다.

그런데…….

"어멋, 죄송해요. 죄송해요, 성좌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성좌님."

"그럼 안 싸우실 거예요?"

"물론입니다, 성좌님. 성좌님이 명하신다면,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캬아!

싸움도 말 한마디로 말리고.

이제 여기가 내 집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성좌님! 정말 성좌님께서 우리 구넬샤찌국에 와 주셨습니까!"

수백 명의 무리를 이끌며, 크게 울먹이며 다가오는 여인.

밭을 갈던 마을의 여인들과는 다른, 매우 화려한 복장의 절대 미녀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오자, 조금 전까지 나를 두고 심하게 다투던 두 마을의 절대 미녀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그녀를 맞이한다.

"여왕님을 맞이합니다."

여왕이다.

구넬샤찌국의 여왕.

태양을 향해 ‘어두워져라!’라고 명령하면, 태양마저 그녀의 뜻에 따를 것처럼 아름답다.

그리고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왕은.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구넬샤찌국의 알리사 이바노바가 위대하신 성좌님을 영접합니다."

나는 구넬샤찌국의 성좌가 되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절세의 미녀들을 거느리는 절대의 군주가 되었다.

만백성을 친히 어루만지며 사랑하는 최고의 군주가 되었고.

구넬샤찌국의 모든 백성은 절대 군주며 성좌인 나를 한없이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렇게 나는 매일 밤 이곳의 만백성과 사랑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걸이번 여행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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