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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이번 여행기-50화 (49/174)

50화

머리가 복잡하고 가슴이 갑갑해 헌원세가 밖으로 나왔다.

분명 같은 공기일 텐데, 문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런데…….

"아이고! 공자님. 한 푼만 줍쇼. 한 푼만 줍쇼."

웬 늙은 거지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구걸을 한다.

술 냄새까지 진동한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에잇, 술 냄새!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어디서 구걸질이야! 꺼져!"

홧김에 거지 노인의 손을 발로 냅다 차 버렸다.

- 적당히 해라, 걸이번.

- 장로님,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극사실주의로 연기해야 한다고 비걸개 훈련생 때 배웠습니다.

- 끄응.

"아이고, 아이고! 공자님, 어린 자식들이 굶고 있습니다. 철전 한 닢만 줍쇼. 엉엉."

웅성웅성.

늙은 거지의 곡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몇몇은 조금 전 내 발길질을 보고 욕을 하기도 한다.

"젊은 새끼가, 아무리 그래도 노인을 발로 차나."

"어머, 돈도 많아 보이는데, 정말 매몰차네요. 어쩜 사람이 저렇게 피도 눈물도 없데요?"

결국, 따가운 사람들의 눈총을 이기지 못하고.

땡그랑.

"이번 한 번만 내가 적선을 하는데, 다시 내 눈에 띄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라! 재수가 없으려니, 퉤!"

철전 몇 닢을 동냥 그릇에 던져 준 후 찬바람을 쌩하니 날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내 뒤로 늙은 거지, 아니 육 장로 상취개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복받으실 겁니다, 공자님!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 * *

헌원세가로 돌아왔다.

늙은 거지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척 연기를 하고 있는데, 진짜로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놈들이 있었다.

"저를 불렀다고요?"

"네, 공자님. 지금 대정전에서 종인부 대인, 도어사 대인, 북동성 지휘부 대인 등 여러 대인께서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놔!

내가 지금 어떤 신분인지 모르나?

감히 누구더러 오라 가라야?

용건이 있으면 자기들이 오지.

슬쩍 이런 분위기의 표정을 한 번 지어 보인 후.

"쩝. 어쩔 수 없죠. 안내하세요."

"네, 공자님."

* * *

헌원세가 대정전(大正殿).

많이도 모였네.

열 명가량의 노인네들이 대정전 대청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왔군."

반말이다.

"이리 앉지."

나에게 자리를 권하는데, 말석이다.

안 되겠다.

한번 밀리면 끝도 없다.

스으으으윽.

태사대부패.

당황한다.

노인네들이 서로 눈치만 보며, 어찌해야 할지 대가리를 마구 굴리는 소리가 다 들린다.

그러더니…….

툭.

툭툭.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눈짓으로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압박을 가한다.

결국.

노인네들이 한 자리씩 옆으로 움직였고.

상석은 내 차지가 됐다.

크하하하하!

황궁에서 황제와 삼공(三公)을 제외한다면, 제일 높은 권세가들이다.

그들을 지나, 상석에 앉았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죠?"

내 바로 우측에 앉은 노인네가 정이품(正二品) 종인부란 대관이다.

나는 새는 몰라도, 말 한마디에 수백만 명을 살리고 수백만 명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니고 있는 자다.

응, 다시 스으으으윽.

품에 있는 태사대부패를 반쯤 꺼내 비추어 보였고.

대뜸 또 반말을 하려다, ‘끄응’ 소리와 함께 말을 삼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헌원이번 공자, 일은 어떻게 진행이 되어 가고 있으신가?"

이 정도면 뭐, 넘어가 주자.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번엔 좌측에 있는 노인이 말했다.

도어사라는 역시나 어마어마한 직책의 대관이다.

"헌원 공자도 잘 알고 있겠지만, 이번 일은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하네. 천하의 미래가 헌원 공자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 주시게."

뭔 소리야?

이 문제가 중차대한 일인 건 나도 알지만, 그렇다고 천하의 미래까지 운운하는 건 좀 과한 거 아닌가?

내가 슬쩍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자리에 있는 대관들이 그런 나의 작은 동작에 오히려 격한 반응을 보였다.

몇몇 노인네는 입까지 쩍 벌리고는 좀처럼 다물지도 못했다.

뭐야?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이보시게, 헌원 공자."

다시 종인부가 나섰다.

크게 놀람을 넘어, 목소리까지 미세하게 떨리는 그였다.

"자네… 자네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나?"

"태사 대인께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천하의 미래 운운하는 건 좀 과한……."

"이보시게!"

종인부가 대로하여 눈을 부릅뜨고, 의자의 손잡이까지 내리치며 나에게 호통을 쳤다.

무공이라고는 한 자락도 익히지 않은 그에게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기세가 순간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왜?

뭔데?

모두가 나를 그렇게 한심하게 또 놀란 눈으로 보자, 내가 더 억울했다.

난 그냥 헌원문장이 시키는 일을 나름 충실히 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들 이러냐고!

그리고 나는 곧 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망치를 머리를 맞는 게 아니라, 벼락을 그것도 수천 번 때려 맞은 충격적인 말이었다.

"황후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후세를 얻지 못하고 계시네. 당연히 황비 중 누군가가 사내아이를 낳으면, 그분이 황후의 직위에 오르실 거고, 그 아이는 장차 이 나라의 황제가 된다는 말일세."

심장이, 내 심장이 말이다.

쿵 소리와 함께 심연의 깊은 곳으로 추락해 버렸다.

"황제께서 태사 대인을 얼마나 신뢰하고 총애하는지 아는가? 지금까지는 태사께서 두 소저의 입궁에 신중한 입장을 기하셨지만, 이미 황궁에서는 헌원공지나 헌원파지 중 한 사람이 황비가 될 것임이 공공연한 사실로 알려진 상태네. 그리고 지금 자네가!"

내가…….

내가 하는 거였어.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헌원공량을 누구에게 맡길지 정하는 그런 게 아니라.

X팔!

다음 대의 황제를 낳을 여인을 내 손으로 뽑고 있었던 거야.

"자네가 선택한 여인이 황궁으로 입궁할 것이고, 황비가 될 것이며, 아들을 낳는 즉시 황후가 될 것이며, 그 아이가 장차 이 나라의 황제가 될 것일세."

헌원문장이 완벽주의자라서가 아니었다.

왜 저토록 괜찮은 두 딸 중 굳이 더 나은 딸을 판단하라고 했는지.

이젠 알겠다.

헌원공량은 핑계였다.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심리적 압박이 너무 심하면 올바른 판단에 지장을 줄 수 있어서?

모르겠다.

헌원문장의 속마음까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가 왜 헌원공량을 겉으로 내세우고 진짜 문제를 숨겼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황제.

황제다.

다음 세상의 주인.

그 주인을 내 손으로 뽑아야 한다.

미치도록 부담되는 일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다만, 지금까지의 마음가짐만으로는 안 된다.

휴우, 진짜 목숨 정도는 걸어 줘야겠구나.

아니, 당연히 걸어야겠지.

"헌원 공자. 공지 소저를 봤는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효심이 가득하고, 비천한 아랫사람들을 아끼고 돌보는 공지 소저야말로 선녀가 따로 없다네. 그렇게 훌륭한 여인이 황후가 된다면, 만백성이 기뻐하여 춤을 출 걸세. 반대로 파지 소저는 알지 않은가? 그녀가 얼마나 악랄하게 공지 소저를 핍박하고 있는지."

도어사의 말에 점잖던 종인부가 발끈해 말했다.

"말씀을 삼가시오, 대인! 파지 소저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건 공지 소저요. 돈이 넘치고 사람이 넘치는데, 공지 소저가 불쌍한 척 저러고 있는 이유가 뻔한 것 아니겠소? 헌원 공자, 얄팍한 수에 속아서는 안 되오. 공지는 무서운 여인이오. 그녀가 황후가 된다면, 황궁과 중원 곳곳에 피바람이 불 것이오."

"이보시게! 말이면 다인 줄 아는가! 지금 자네가 한 말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모르나!"

"어디서 삿대질이야! 그리고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설령 우매한 인간들이 정말 속고 있다고 해도, 종인부씩이나 되어서 그 어린 계집의 수작질에 넘어가? 설마 일부러 모르는 척해 주는 건가?"

"너야말로 헌원파지와 작당해서 공지 소저를 핍박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이 새끼가!"

"뭐? 이 새끼? 이런 X시랄 놈이!"

고성으로 시작해 손가락질, 그다음은 멱살.

시끌벅적.

하지만 내 마음은 고요했다.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 아니다.

대해의 파도와 같이 밀려들던 그 부담감을 잠재웠다.

흔들려서는 안 된다.

지금은 내 역량을 모두 쏟아부어도 부족하다.

두 배, 세 배, 열 배.

차가운 눈으로, 냉철한 머리로, 진실을 살피는 마음까지 다 꺼내어.

그녀들을 살필 시간이다.

"이봐, 헌원이번! 아직 안 끝났어. 어디 가?"

"야, 이 새끼야! 오늘 끝장을 보자!"

"그래, 이 밥만 축내는 늙은이야. 어디 제대로 한판 붙어 보자!"

저치들은 황제 앞에서도 저렇게 싸우나?

나는 시끄러운 그들을 뒤로하고, 대정전을 나섰다.

* * *

대정전을 나서자마자 기쁜 소식과 나쁜 소식을 곧바로 접할 수 있었다.

뭐부터 들을까?

응, 언제나 기쁜 소식은 나중에 듣는 게 더 좋다.

나쁜 소식부터.

태사 헌원문장이 의식을 잃었다.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의식을 잃고 호흡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당장 오늘 밤 사망하여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위중하다고 하였다.

그럼 이제 기쁜 소식.

전서응이 헌원세가로 날아왔다.

황궁의 태의, 민간에선 태선이라고 부르는 그가 5일 후 도착한다고 하였다.

그만 도착하면, 어떻게든 헌원문장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내 욕심이려나?

최소한 내가 내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는 살아 줬으면 하는데.

시간이 없다.

최대한 집중해서, 냉철하게 그녀들을 보고 판단하자.

* * *

둘째 날 오후 내내 그녀들을 살폈다.

별다른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어제도 예뻤는데 오늘도 예쁘다.

셋째 날, 헌원세가의 일꾼들과 시비들 그리고 무인들을 탐문했다.

다시 그녀들도 만났다.

아무런 수확도 없다.

오늘도 예쁘다.

넷째 날도 그랬고, 다섯째 날도 그랬다.

그녀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순수하며, 해맑고, 진실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난 두 여인 중 누가 황후가 되어 황태자를 낳는다고 하여도, 중원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되었다.

* * *

여섯째 날.

"공자님! 그때 그 공자님 맞으시죠? 한 푼만 줍쇼."

또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늙은 거지다.

"너! 그때 그 거지! 내가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경을 칠 거라고 했지! 어디, 오늘 혼 좀 나 보자."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제대로 주먹질 좀 하려고 할 때.

"아빠!"

"아버지!"

"아빠!"

우르르르르르.

와!

저 많은 어린 거지들은 또 어디서 데리고 왔대?

하여간 육 장로도 대단하다.

수군수군.

웅성웅성.

"어머, 저 젊은이가 아이도 많은 늙은 거지를 때리려고 하네요."

"쯧쯧. 아무리 구걸을 하는 거지여도, 애들 보는 앞에서 아빠를 때리려고 하다니. 말세야, 말세."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나는 또 나쁜 놈이 되어야만 했다.

"아빠! 배고파. 엉엉."

"나도, 배고파. 엉엉엉."

"공자님! 한 푼만, 한 푼만 줍쇼. 엉엉."

결국.

땡그랑.

다시 철전 몇 닢을 거지의 동냥 그릇에 던져 줘야 했다.

"와아! 돈이다! 먹을 거! 먹을 거!"

"공자님, 감사합니다. 흑흑."

"에잇! 내가 여기를 다신 오나 봐라!"

- 급해요. 빨리 좀요. 진짜로 급해요, 장로님.

-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 * *

일곱째 날.

드디어 태선(太仙)이 도착했다.

죽은 이도 살릴 수 있다는 그의 의술이다.

그는 헌원세가에 도착하자마자 조구식의 보고를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곧장 내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말 오래, 또 세심히 의식을 잃은 헌원문장을 살피고 다시 살폈다.

마지막으로 진맥까지 마친 그.

나, 헌원공량, 조구식 세 사람이 그의 입을 주시했다.

그는 우리에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말을 하였다.

"중독(中毒)이다. 이토록 지독한 극독은 나도 처음 보는구나. 어찌 태사께서 이런 극독에 중독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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