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49화 (48/174)

49화

"안녕하세요, 형님."

"형님?"

"네, 형님. 산동 태안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먼 친척 되시는 가문의 형님이시라고요."

"음, 그렇지. 반갑네, 헌원공량."

고작 일곱 살이다.

그냥 쪼그마한 아이다.

외양은 그렇다.

그런데 눈을 마주하니 아니다.

입을 여니 더더욱 아니다.

눈빛, 말투, 자세, 모든 것에서, 절대 일곱 살 아이에게서는 볼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진다.

딱 한 가지.

얼마나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는지, 또래에 비해 많이 왜소하다.

느껴지는 기운마저 빈약하다.

어쩌면 아버지 헌원문장이 지금 앓고 있는 병이, 타고난 체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후.

"두 누나 중 누가 더 좋아?"

"글쎄요?"

대답이 좀 묘하다.

둘 다 좋다도 아니고, 둘 중 누가 더 좋다도 아니고, 둘 다 싫다도 아닌, 글쎄요?

"만약 누나 둘 중 꼭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웃는다.

좋아서 웃는 게 아니다.

미친!

일곱 살 꼬맹이 녀석이 내 의중을 꿰뚫어 짓는 웃음이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곧 녀석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죠. 아! 이제는 아버지의 뜻이 아닌 형님의 판단에 맡겨야겠군요."

어린 녀석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도 철이 일찍 든 건가?

아니면 그냥 천재인 건가?

사실 마음이 조금 아렸다.

엄마의 사랑도 받지 못하였고, 지금껏 혼자 자랐다고 하지 않겠나?

물론 돌봐 주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겠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건 사실이니.

그런 아이가, 현재 집안의 복잡한 상황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공지 누나와 파지 누나 중 누구와 더 친해?"

"글쎄요?"

이번에도 미소를 지으며 애매한 답을 한다.

"공량아, 혹시 소원 같은 거 있어?"

"있지요. 간절한 소원."

"뭔데?"

"하루라도 더 살아서 한 권의 책이라도 더 읽고 싶습니다."

"그게… 그게 소원이야? 일곱 살 아이의 소원?"

녀석이 피식 웃는다.

"제 소원이 너무 과했나요? 뭐, 소원을 이루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게 제 운명인 것이니까요."

한 대 때릴까?

조그마한 녀석이 어디서 운명 타령이야!

당연히 때리지 못했다.

내 손에 태사대부패가 있어도, 태사의 친아들 아니겠는가.

후계자.

사실 그것보다.

운명을 말하는 녀석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였다.

세상 다 산 사람의 눈빛이랄까?

"소원은 그게 전부야? 책 많이 읽는 거?"

"사실 진짜 소원은 따로 있어요."

"그건 뭔데?"

"형님이 아버지를 치료해 줬으면 해요. 그래서 내일 아침 아버지가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나, 예전과 같이 위엄 가득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호령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하하."

일부러 웃는 걸까?

일부러 씩씩하게 보이려는 걸까?

아이라서?

일곱 살이라서?

현실을 모두 파악한 줄 알았더니, 끝내 아버지의 죽음만큼은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노력해 볼게."

"기대하고 있을게요, 형님."

"그래."

녀석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왔다.

헌원공량의 장원에서 나오는 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보다 마음은 몇 배나 더 무거웠다.

* * *

헌원세가 둘째 날.

이른 아침, 숙방으로 향했다.

헌원문장에게 차릴 밥을 짓는 곳이다.

의약전 못지않게 삼엄한 경계……. 스으윽.

태사대부패를 보이자 바로 통과.

여인들이 한창 바쁘게 헌원문장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

헌원공지가 그곳에 있었다.

어제의 그 허름한 무명옷을 입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면 발견할 수 없었을 정도로 자연스레 다른 여인들과 섞여 음식을 만들고 있다.

"헌원공지 소저."

"엇? 공자님! 이곳에도 오셨네요?"

"아, 네. 식사는 어떻게 준비되나 잠시 좀 살피러……. 저야 그런데 헌원공지 소저는 어떻게 이곳에?"

답은 헌원공지가 아닌, 숙방의 최고령 여인이 대신했다.

"태사 대인께서 집으로 돌아오신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렇게 직접 대인의 식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 그렇군요."

음식을 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허름해 보였던 옷이 더 더러워졌다.

손은 물에 젖었고, 그녀의 이마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짓는데.

‘사랑합니다!’

아! 목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킬 수 있었다.

"아버지가 식사하실 때가 돼서."

"아! 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준비하세요."

"네, 공자님."

헌원공지와 다른 여인들이 다시 빠른 손놀림으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능숙하고 자연스럽다.

숙방에는 음식을 하는 여인들만 있는 게 아니다.

남자들도 여럿 있었는데, 음… 환관이다.

나이가 지긋한 내시가 여럿이다.

그들의 몸에서 미세한 약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의약전에서 보낸 내시인 듯하다.

혹시 모를 상황을 감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저건 뭐지?

내시 한 명을 불렀다.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무시한다.

그래서, 스으으윽.

태사대부패를 슬쩍 비치니.

"하악! 하악!"

요상한 소리와 함께 손을 마구 비벼 대고, 또 허리를 굽실굽실하며 내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자님. 하악, 하악."

아! 이 새끼, 숨은 왜 저따위로 쉬는 거야?

"어험. 저 밥에 들어가는 건 뭔가요? 밥에 무슨 약초를 넣네요?"

"아! 네. 저건 향원초(香元草)라는 것입니다. 식욕을 돋우고 장복하면 원기를 회복하는 약초입죠. 하악하악."

"저런 거 막 넣어도 돼요? 지금 태사 대인께서 복용하시는 약과 상충해 다른 효능이나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잖아요."

"네. 하악하악. 태사 대인의 식단은 황궁에서 황제 폐하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과 같이 철저히 관리되어 만들어집니다. 식사에 들어가는 밥 한 톨까지 태의께 직접 허락을 받은 것들이고, 향원초 또한 이미 조구식 의원님의 허가를 받아 넣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뭐, 별문제 없겠네요."

그러자 내시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 주었다.

"헌원공지 아가씨께서 직접 산으로 가 채취해 온 약초입니다. 약의 효능을 떠나, 하늘도 아가씨의 효심에 감복해 대인의 병을 낫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악하악."

음, 헌원공지가 직접 산으로 가 캤다고?

약초 캐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닌데.

난 시선을 다시 헌원공지에게로 향했다.

아니, 사실 계속 헌원공지만 보고 있었다.

내 이성은 그러라 하지 않았지만, 내 눈동자가 이성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결과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아버지를 위한 음식을 만들고 있는 헌원공지.

감히 말하건대.

세상의 그 어떤 남자라도, 지금 헌원공지의 모습을 본다면 목숨을 바쳐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 물론 지금 내 옆에 있는 하악하악 이 새끼는 예외고.

"휴우, 다 됐네요."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나고, 상까지 차려져 나간 후에야 헌원공지가 한숨을 돌렸다.

만족한 듯 환히 웃으며 소매로 땀을 닦는 모습은 정말.

구름 뒤로 숨은 달이 아니라, 태양마저 부끄러워 숨어 버릴 아름다움이다.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온다.

"공자님, 공자님도 드릴까요?"

"뭘요?"

"향원초 밥이요. 별거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복용하면 감기도 안 걸리고 밥맛도 더 좋아지고, 건강해진대요."

"어렵게 캐신 거라고 들었습니다."

"많이 캤어요. 그래서 많아요. 우리 세가에 얼마나 머무실지는 모르겠지만, 계시는 동안에는 상에 올리도록 할게요."

"고맙습니다, 헌원공지 아가씨."

"고맙긴요."

나를 보며 방긋 웃는 헌원공지.

과연 누가 저 미소를 보며 그녀를 의심할 수 있을까?

사람이라면, 남자라면 불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날 점심부터 내 밥상에는 헌원공지의 향원초 밥이 끼니마다 올라왔다.

맛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 * *

의약전으로 향했다.

무사들이 어제와 같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다.

스으으윽.

아! 꺼낼 필요도 없었다.

태사대부패를 꺼내기도 전, 무사들이 길을 열어 줬다.

절도 있는 인사와 더불어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시나다.

의원들은 심혈을 기울여 약을 썰고 달이고.

조구식을 비롯해 대부분 황궁에서 온 의원들이다.

그리고 이를 감시하는 눈 역시 있었다.

내시들이 있고, 또 저들은 누구지?

"이보시오."

내시를 불렀고, 무시해서, 스으으윽.

"하악하악! 부르셨습니까, 공자님. 하악하악."

이 새끼, 아까 숙방에서 봤던 내시랑 쌍둥인가?

얼굴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숨을 왜 이 녀석까지 이렇게 쉬는 거야?

돌겠네.

"저들은 누구죠?"

"배가대부에서 보낸 의원들입니다. 하악하악."

"배가대부면, 헌원파지 아가씨의 외가 사람들 아닙니까? 그들이 왜요?"

"중원 각지에서 내로라하는 의원들을 어렵게 초빙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태의께서 처방한 약이 있기 때문에, 저들은 약의 조제에 대해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악하악."

"그럼 무얼 하죠?"

"우리와 같습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거죠. 하악하악."

"약에 이상한 것을 탄다거나 하는 일을 감시하는 거요?"

"네, 그렇습니다. 하악하악."

"그 하악하악 소리 좀 안 내면 안 돼요?"

"아이쿠, 죄송합니다. 하악하악. 앗!"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아 버리는 내시였다.

그나저나, 배가대부에서 보낸 의원 중 무공을 익힌 자들이 여럿이다.

무공과 의술은 상당한 교집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무공에 뛰어난 고수 중 의술에 능통한 자도 상당히 많다.

반대로 의술에 능통한 의원 중에도 고수가 꽤 있고.

천하 3대 의선 중 황궁의 태선을 뺀 약선과 독선만 하더라도 무림에서 알아주는 고수들이다.

심지어 독선 당태식은 사천당가의 가주며, 무림 6대 고수인 삼존일제이선(三尊一帝二仙) 중 이선(二仙)이다.

화산파의 검선(劍仙)과 더불어 독선(毒仙)으로 그 자리에 올랐고, 그의 경지가 무려 화경이라 알려졌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저치들 중 누가 작심하면, 황궁에서 보낸 의원들 눈을 속여 탕약에 독을 타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너무 과하게 의심하는 걸까?

하지만 의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어멋! 공자님 여기도 오셨네요?"

헌원파지다.

아름답다.

눈이 부시다 못해 멀 것 같다.

"헌원파지 소저야말로 여긴 무슨 일로……."

그녀가 어제와 다르게 환하게 웃으며 눈짓으로 뒤를 가리킨다.

함께 온 자들의 손에 무언가 가득 들려 있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의 정체를 묻기도 전.

"헌원파지 아가씨! 정말 구해다 주셨군요! 너무 감사해서 어쩌죠?"

조구식을 비롯한 황궁의 의원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며 크게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무엇 때문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짓자, 조구식이 말했다.

"공천근(拱天根)입니다. 태사 대인을 치료하는 핵심적인 약초인데, 워낙 귀한 것이라 황궁의 약전에 있는 것을 이미 다 가져다 썼음에도 바닥이 난 지 오래였습니다. 그걸 헌원파지 아가씨께서 벌써 세 번째나 이렇게 많은 양을 구해다 주셨네요."

헌원파지가 말을 이었다.

"제가 구한 건 아니고, 외가에서 구해다 준 거죠. 외할아버지께서 이거 구하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아버지 병만 낫는다면, 무엇이 문제겠어요."

어제와 다르다.

정말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는 그녀다.

내 심장이 다 떨릴 정도다.

내가 이런데 다른 놈들은 오죽하겠는가?

조구식은 물론, 황궁의 의원들과 배가대부에서 보내온 의원들까지.

저러다 눈알 빠지겠다.

턱은 이미 빠졌고.

영혼은 육체에 남아 있긴 한 건가?

"조 의원님, 약 끓는데요?"

"앗! 내 정신 좀 봐."

내 말 한마디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사내들이었다.

대단하다.

미소 한 방에, 이 많은 사내들의 영혼을 순식간에 사로잡아 버리다니.

만약 말이다.

헌원파지가 작정하고 수를 쓴다면,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복종하게 될 테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의 아름다움이라면.

"헌원이번 공자님."

"네, 소저."

"공천근으로 탕약을 달여 드리라 할 테니, 잊지 말고 꼭 챙겨 드세요."

"공천근으로요? 이거 황궁에서조차 구하기 힘들 정도로 귀한 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사 대인 탕약에 쓸 것도 부족하다고……."

"맞아요. 엄청 귀하고, 엄청 비싼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 많은 양을 구해 왔어요. 이 정도 양이면 1년도 넘게 탕약을 만들 수 있어요. 그사이 또 구할 수 있을 거고요.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그래도……."

"혹시 무공 익히셨어요?"

어라?

그건 어떻게 알았지?

"제 호위 무사가 그러던데요? 걸음걸이와 자세를 보니, 엄청난 고수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무공은 익혔다고요."

"아! 네. 건강을 위해 소싯적에 조금 익혀 보았습니다."

"잘하셨어요. 그리고 공천근 있잖아요."

"……?"

"비싸고 귀한 만큼 그 효과가 대단해요. 탕약을 끓여 열흘만 먹어도, 일반 사람은 1갑자 동안 역병에 걸리지 않고 장수하며, 무인이 복용하면 10년 치 내공을 얻을 수 있다고 해요. 그래도 안 드시겠어요?"

"저야 워낙 건강한 몸이라… 그래도 소저의 성의가 있으니,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하."

"공자님, 되게 재미난 분이세요. 호호. 어제 제 짜증도 다 받아 주시고. 어젠 미안했어요. 억울한 마음에 그만."

"아닙니다. 하하. 하하하."

과연, 과연 누가!

천하에 누가 있어서 이리도 해맑게 웃는 헌원파지를 의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라면, 남자라면!

못 한다.

"하악하악."

저 내시 빼면 말이다.

그나저나 어쩌지?

헌원공량을 누구에게 맡겨야 한다고 태사에게 말하지?

지금까지의 내 판단은 둘 다 더없이 훌륭한 여인들이다.

인세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넘어, 조금은 독특한 인물들이긴 하나 분명 괜찮은 여인들이다.

태사가 너무 완벽주의자라서 걱정하는 건가?

내가 보기엔 둘 중 누구에게 헌원공량을 맡겨도 무리 없이 잘 보살펴 줄 것 같은데.

"아! 깜빡 잊을뻔했네요. 조구식 의원님."

"네, 공자님."

"태사 대인께서 복용하는 탕약의 처방전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처방전까지 받아 의약전을 나섰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헌원파지의 공천근 탕약을 복용하게 되었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정말 몸이 좋아지는 것일까?

몸이 막 가벼워지고, 힘은 불끈불끈 솟고, 의욕도 넘치고, 괜히 기분까지 좋아진다.

어쩌면 나.

사랑에 빠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욕해라.

주인공이란 녀석이 여자만 보면 헬렐레한다고.

지금은 욕할 시간이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걸이번. 그들은 1,000년 동안 치열한 권력의 암투를 이어 온 자들이네.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네.’

난 육 장로의 조언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