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48화 (47/174)

48화

태사 헌원문장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특히 태사대부패의 사용법을 상세히 알려 줬는데.

와!

어마어마하다.

황제 그리고 태사와 동급인 정일품(正一品)의 태부(太傅)ㆍ태보(太保)를 제외한 모든 이에 대한 명령권을 가진다.

전시에는 황군까지 움직일 수 있다.

이거 번쩍 치켜들고 내가 ‘공격!’이라고 하면, 백만 대군이 움직인다는 소리다.

캬아!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백만 대군 이끌고 당장에라도 칵뉴족의 땅으로 달려가고 싶다.

뭐, 마음만 그렇다.

실제 내가 백만 대군을 움직일 수도 없고, 그럴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손바닥만 한 신패 하나에 엄청난 힘이 실려 있다.

이 일이 끝나면 반납해야 하는 신패이기도 하다.

그리고 헌원문장은 이번 일을 수행하며 이 신패를 어떻게 사용할지까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었다.

누가 대단한 양반 아니랄까 봐, 치밀하게도 준비했다 싶었다.

그에 대한 황제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새삼 느꼈고.

그렇게 오랜 시간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눈 후에야 나는 태사전을 나설 수 있었다.

* * *

의약전(醫藥殿).

무슨 놈의 집에 의약전이 있다는 것도 놀라울 일이지만, 그 규모가 실로 너무나 거대해 보는 이를 다 위축되게 했다.

거기에 이를 경계하는 무사들의 분위기는 더더욱 삼엄했다.

아마 헌원세가에서 가장 경계가 삼엄한 곳이 바로 이곳 아닐까 싶다.

"누구냐?"

"헌원이번이라고 합니다."

스으윽.

조금 전 헌원문장에게서 받은 태사대부패를 꺼내 보여 줬다.

그러자…….

"들어가십시오."

차렷 자세에서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까지 하는 게 아닌가.

와!

황궁의 무장에게 저런 예도 받아 보고.

나태한, 많이 컸다.

그렇게 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의약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뭐부터 해야 하나?

"이보시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약재를 들고 바삐 움직이는 젊은 의원을 잡았다.

"이곳 최고 책임자를 만나고 싶은데. 황궁 태의의 수제자께서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한데, 누구신데 조 의원님을 만나려 하시는 것입니까?"

태사대부패를…….

스으윽.

"헉! 아! 네. 넵! 바로 모시고 오겠습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일사천리다.

그렇게 젊은 의원이 안내한 방에서 잠시 기다리니, 바쁜 걸음으로 30대 중반의 꽤 훤칠하고 총명해 보이는 의원이 들어왔다.

황궁의 태의, 민간에서 태선이라 불리며 의선이라 불리는 자의 수제자다.

"조구식이라 합니다, 공자님."

간단히 서로 예를 주고받은 후.

"헌원 태사께서 오랜 지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몇 달 전부터 급격히 병세가 악화하여 병가를 얻고 헌원세가로 돌아와 요양 중입니다."

"태의께서는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태사께서 헌원세가로 오시기 전에, 이미 태의이신 사부님께서 충분한 진료를 한 후 상세한 치료법과 약방까지 처방해 주셨습니다. 제가 그 일을 맡아 치료 중입니다. 사부님께서는 현재 변방을 침범해 민간을 약탈한 이민족들과 전쟁 중에 다치신 토북왕을 치료하러 가셨습니다."

"태사의 병명은 무엇입니까?"

"모릅니다."

"모르다니요?"

"실제 이러한 병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원기가 다했다는 것 외에는 사부님께서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셨습니다."

이건 느낌이다.

비걸개로서의 느낌.

뭔가 숨기고 있다.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데, 분명 다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스으으윽.

다시 태사대부패.

그러자…….

"음, 말씀드려야겠군요."

와! 이거 그냥 무슨 만능 패야.

이것만 보이면 다 되네.

"대신, 들으시려면 목을 거셔야 합니다."

"비사군요. 그것도 황궁에서조차 몇 알지 못하는 비사요."

"그렇습니다. 외부로 새어 나간다면, 헌원이번 공자님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제 목도 함께 날아가겠죠."

"다른 건 몰라도 비밀 하나는 정말 잘 지킵니다. 제 목이 걸린 일인데 어디에서 말할 수도 없고요. 그러니 말씀해 주시지요."

"네, 공자님. 1,000년 황궁의 의서를 모두 뒤져 보면 비슷한 증상으로 목숨을 잃으셨던 분이 몇 분 계십니다."

"누구죠?"

"몇 분의 황제들께서 현재 태사와 동일한 증상을 보이다 돌아가셨습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고, 몸이 날아갈 것 같으며 의욕이 넘치지만, 이내 서서히 몸이 쇠해 종국에는 죽게 되었습니다."

"독?"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면 사부님께서 모르셨을 리가 없겠죠. 사부님의 의술을 몇 곱절이나 능가하는 자가 있다면 모를까요."

"혹시 약선과 독선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듣다마다요. 그런데 공자님."

"네, 의원님."

처음이다.

줄곧 겸손과 공손한 자세를 취하던 조구식이 불쾌한 기운을 내비치며 나를 보는 게.

"약선과 독선 모두 황궁의 의원들조차 인정하고 존경하는 훌륭한 의원인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그분들의 의술이 사부님의 의술을 뛰어넘는다는 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천당가의 무형지독이 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독이라 친다지만, 그에 버금가는 독이라 한들 사부님께서 이를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렇기도 하겠네요. 기분 나쁘시라고 한 말은 아니니 마음 상하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사부님을 비롯한 역대의 황궁 태의들이 그에 관련한 기록을 수도 없이 남겼습니다. 황제의 죽음에 관련한 일이니, 그 분량만 커다란 창고를 가득 메울 정도입니다."

"그럼 결국 원기가 다해 죽어 가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현재로써는 그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계속 그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에 계십니다."

"이곳으로 오실까요?"

"네, 토북왕의 치료가 끝나는 대로 오신다는 기별을 받았습니다."

"알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의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면 모를까.

의심을 하고 싶어도 뭘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그냥 의원도 아니고 의선이라 불리는 황궁의 태의가 그리 진단했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나?

그리고 처음부터 이곳은 그냥 한 번 와 본 거고.

그러니 이곳은 그냥 통과.

다음부터가 진짜다.

* * *

세가 안에 또 다른 세가가 있다.

커다란 장원이다.

당연히 그곳을 지키는 경계 무사들의 숫자와 분위기 모두 엄청나게 삼엄하다.

"누구냐?"

스으윽.

"들어가십시오."

캬!

이거 태사대부패 진짜 만능 맞다.

보여 주자마자 통과.

거기에 허리를 깊이 숙이는 인사는 덤이고.

그렇게 안으로 들어갔다.

헌원공지가 사는 곳이다.

안은 얼마나 더 화려하고 대단할까 기대가 가득……. 음.

뭐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헌원문장 태사의 첫째 딸이 사는 곳 맞나?

심지어 천하 4대 미녀 중 한 명인데.

휑하다.

전각들은 죄다 으리으리한데, 사람이 사는 건지 살지 않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휑하다.

기감을 끌어올린 후에야 사람이 사는 것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저긴 숙방 같은데.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향했다.

"아이고, 아가씨. 이런 일은 저희한테 맡기시라니까요."

"순자 할매 무릎 아프다면서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무슨 밥을 한다고."

"제가 아니면 저것들을 시키면 되니까, 아가씨는 들어가세요."

"오늘따라 왜 그래요? 호호호. 그리고 이제 열 살도 안 된 저 아이들이 해 주는 밥이 목으로 잘도 넘어가겠네요. 같이 해요. 같이 하고 같이 먹고, 그게 사람 사는 거잖아요."

"정말 우리 아가씨 못 말린다니까. 얘들아! 시금치는 살짝만 데치는 거야. 복순이는 어여 가서 감자 씻어 오고."

"네."

지지고 볶고 끓이고.

한참 저녁밥을 준비 중인가 보다.

그런데…….

음.

아까 봤던 헌원공지가 분명한데, 입고 있는 옷이 다르다.

헌원문장의 방에서 봤을 때는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시녀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무명옷을 입고 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입었는지 많이 낡았다.

"어험."

일부러 기침 소리를 냈다.

"어머, 아까 아버님 방에서 뵙던 헌원이번 공자님 아니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내 정신 좀 봐. 어서 이리로 드세요. 순자 할머니, 우리 차 좀 부탁해요."

"네, 아가씨."

그녀의 장원에 있는 대청으로 향해 자리를 따로 가질 수 있었다.

절뚝이는 순자 할머니가 차까지 내오고.

간단히 인사도 다시 주고받고.

"장원이 큰데 사람은 몇 없나 봅니다."

"저 혼자 사는데, 많은 사람이 있을 필요가 없어서요."

"아, 네."

어색한 침묵.

솔직히 좀 긴장했다.

무명옷을 입었다 한들 헌원공지의 아름다움은 가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무명옷 때문에 그녀에게서 비치는 후광이 더욱 도드라진다.

확실히 아름답기는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를 무너뜨릴 정도의 미모가 맞다.

어마어마하다.

"지내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저야 불편할 게 뭐가 있겠어요."

말을 함과 동시에 손을 뒤로 가린다.

그러나 보았다.

섬섬옥수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손이다.

그런데 그녀의 아름다운 손 여기저기에 상처와 부르튼 자국이 있다.

한 마디로 고생한 손이다.

그녀는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 쾌차하시기만을 바랄 뿐이에요. 딱 그 한 가지 소원만 이루어진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어요."

"네."

어색한 미소마저 황홀하게 느껴진다.

이게 좀 웃긴 게,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마음의 준비까지 철저히 하고 왔지만, 역시나 적응이 안 된다.

얇은 발목과 개미허리를 매일 보았지만, 또 매일 아침마다 그녀들의 미모에 깜짝 놀랐던 것과 같다.

그리고 헌원공지는…….

분명 그녀들과는 또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참, 나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계속 무어라 말을 하는데, 그녀의 눈동자에 빠지고 그녀의 입술에 파묻혔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정말 치명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벌써 가시게요? 저녁이라도 들고 가시지요."

"다음에 하겠습니다."

나는 서둘러 헌원공지의 장원을 나와야 했다.

아! 미친놈.

비걸개라는 놈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그곳을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그나저나 왜 마음은 또 이리도 아픈지.

자꾸 그녀의 부르트고 상처 난 손이 눈에 아른거린다.

* * *

"왜요? 언니가 또 제 욕을 하던가요? 제가 일부러 언니의 재정을 끊고, 시비와 일꾼들도 빼돌렸다고 하던가요? 아! 정말 억울해요! 억울해 미칠 것 같아요!"

헌원파지.

헌원공지보다 한 살 어린 열일곱 살이다.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억울함에 격앙된 목소리와 함께 눈물부터 글썽인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데, 그게 또 아름답다.

마치 무조건 그녀의 말에 동조하고 공감하고 또 들어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마구마구 샘솟는다.

얇은 발목, 개미허리 그리고 헌원공지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

아마 그녀가 황제에게 저리 화를 냈다면, 황제는 그녀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정말 나라라도 무너뜨리려 했을지 모르겠다.

"공자님! 공자님은 제 말을 믿어 주셔야 해요. 정말 아니에요. 언니가 일부러 저를 나쁘게 보이게 하려고 그러는 거라고요.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언니를 괴롭힐 수 있겠어요?"

헌원파지의 친어머니.

그러니까 헌원문장의 새 부인이자, 헌원공지의 새어머니인 배시 부인.

그녀가 전대의 천하 4대 미인 중 1인이라는 것 외에 또 하나의 특이점이 있다.

배가대부(裵家大府).

헌원세가만큼은 아니지만, 황궁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권문세가다.

헌원문장이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고, 지금은 병으로 누워 있다.

헌원파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헌원공지를 궁지로 몰아넣을 힘이 그녀에게는 분명하게 있다.

그런데…….

"정말… 흑흑. 정말 억울해서 이젠 못 하겠어요. 사람들이 모두 저를 욕해요. 엄마는 나쁜 계모고 저는 사악한 여동생이래요. 언니가… 언니가 일부러 저와 엄마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 정말이에요, 흑흑흑."

결국 그녀는 억울함에 눈물까지 쏟았다.

그리고 나는…….

‘믿습니다!’

하마터면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이런 말을 외칠 뻔했다.

간신히 자제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게, 어떻게 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비걸개 훈련을 받고, 얇은 발목과 개미허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무너져도 수천 번은 더 무너졌을 것이다.

안 되겠다.

또 귀가 막히고 눈이 멀어 버렸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들르죠."

"공자님! 제발… 제발 제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 흑흑흑."

내 소매까지 잡으며 서럽게 우는 그녀의 얼굴이, 계속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미녀의 눈물이 장수의 칼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인 것을 깨달았음에도, 나는 이미 그녀의 눈물에 심장을 찔리고 말았다.

* * *

아!

큰일이다.

내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공정해야 하는데.

국운과 연관된 일인데.

그래서 더 철두철미하게 해야 하는데!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누군가는 고작 여자의 외모 따위에 흔들리는 바보 같은 놈이라 욕할지도 모르겠다만.

헌원공지와 헌원파지의 아름다움.

천하 4대 미인의 아름다움이란, 결코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진심, 일생일대의 생사 대적을 마주한 느낌이다.

차라리 칼 한 자루 들고 백만의 적진에 홀로 뛰어들어 싸우는 게 낫겠다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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