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46화 (45/174)

46화

어린 황제가 등극했다.

그는 훌륭한 황제가 되겠다는 의욕이 매우 강했다.

나이는 어렸지만, 평범한 의복으로 변복한 후 자주 백성들의 삶을 살피러 다닐 정도로 훌륭한 황제였다.

하지만 날 때부터 훌륭한 사람은 없다.

그가 이토록 훌륭한 황제로 군림하게 된 데에는, 그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친 훌륭한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당금 황궁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또 그 엄청난 권력을 오로지 황제와 백성들을 위해 휘둘러 끝없는 존경을 받고 있는 태사 헌원문장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1년이 채 되기 전의 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백성들의 평범한 옷으로 변복한 후, 열심히 백성들의 삶을 살피던 황제.

그의 눈에 거지 떼가 들어왔다.

한두 명도 아닌, 거리를 가득 메운 엄청난 수의 거지들이었다.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고, 황궁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황제는 거지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헌원문장은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로 황궁으로 달려가 황제를 알현한다.

"명을 거두소서!"

헌원문장의 간곡한 청에 어린 황제가 반문했다.

"어찌 그러는가? 거지들을 잡아다가 밥도 주고, 잠자리도 주고, 기술을 가르쳐 새 일자리까지 주려고 하는데.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거지도 사람입니다.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라지만, 그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럼 그 거지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인가? 중원 전역으로 따진다면 그 숫자가 1,000만 명이란 소리부터 5,000만 명에 육박한다는 말이 있다."

"강제로 그들을 잡아들여 숫자를 줄인다면, 그건 일시적인 방법밖에 되지 않습니다. 결국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다시 몇 해가 지나면, 그들의 숫자는 원래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쩌라는 말인가?"

"거지들의 숫자를 절반으로 줄이는 방법이 있고, 아예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헌원문장의 말에 어린 황제가 웃었다.

"후훗. 아무리 헌원 태사라지만, 이번에는 그대의 말을 믿기 힘들군. 그래, 그래도 들어는 보지. 어떤 묘수로 그들의 수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단 말인가?"

"선정(善政)입니다. 황제께서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잘 다스린다면, 나라는 태평할 것이고 부유해질 것입니다. 부유한 나라는 사방에 돈이 넘쳐흐르는데, 누가 구걸을 하려 하겠습니까? 거지들의 수가 자연스레 절반으로 줄어들게 될 겁니다."

어린 황제가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무언가 한 방 먹었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음… 그럼 거지들을 아예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덕치(德治),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무릇 윗물은 아래로 흐르고, 백성들은 황제를 따라 보고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황제께서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자연스레 백성들도 이를 보고 배우게 될 것이고. 이는 부국의 태평성대를 넘어,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어찌 무릉도원에 한 명의 거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황제께서 선정과 덕치를 펼치셔, 일만 년 동안 유래에 없었던 최고의 황제로 군림하소서."

결국 어린 황제는 크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 헌원 태사는 언제나 과인에게 옳은 길을 제시해 주는구려. 그래, 한번 만들어 봅시다. 헌원 태사와 함께라면 무릉도원도 꿈만이 아닐 것 같소."

그날 이후 어린 황제는 거지들에 대한 대규모 소탕 정책을 철회하고, 더 열심히 백성들의 삶을 살피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실제로 거지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 수천만 명에 달하던 거지가 수백만 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 * *

"헌원문장 태사요? 저도 들어 봤어요."

"오! 네가 황궁 인사에 대해서도 아는구나?"

"아니요. 그건 아니고. 천하 4대 미녀 중 두 명이 그 집에 살고 있다면서요? 오가다 사람들 이야기하는 거 많이 들었어요."

"그래, 맞다. 그 집이다. 그리고 두 딸뿐만 아니라, 사망한 전 부인과 새로 들인 현 부인 역시 전대의 천하 4대 미인의 자리를 각각 차지하던 이들이었다."

"어마어마하군요. 태사는 전생에 나라를 몇 번이나 구했나 봐요."

"농담할 때가 아니다."

"네."

"십몇 년 전 황제께서 즉위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대규모 거지 소탕 정책을 펼치려 하신 적이 있으셨다. 황제께서는 좋은 뜻으로 그리하셨겠지만, 분명 그 과정에서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의 거지들이 죽거나 다칠 수 있는 일이었어. 그걸 막은 게 바로 헌원 태사님이시다."

"본 방에서 큰 은혜… 휴우, 수십만 명의 목숨을 빚진 거군요."

"맞다. 당시 그 일로 방주님께서도 헌원 태사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태사님께서 이렇게 본 방에 도움을 요청하신 것이다."

"은혜를 꼭 갚아야겠네요."

"방주님을 비롯한 모든 장로가 이미 헌원세가가 있는 강소 남경으로 향했다. 나도 바로 뒤따라갈 것이고. 본 방의 최고 무력대 세 개까지 동원했다. 일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 알겠느냐?"

"무치개 이 장로님도 합류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곧바로 하산하여 합류하겠다는 답신을 받았다."

이 장로 무치개까지 움직인다.

점점 마음이 무거워진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관부의 사람들은 언제나 무림인들을 무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죠? 그것도 소림이나 무당, 화산이 아닌 우리 개방에게요."

"관부의 사람들이 겉으로는 그래도 무림인들의 무서움을 어찌 모르겠느냐? 특히 황궁은 우리 무림인 스스로보다 무림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관무불침(官武不侵)을 내세우지만, 언제나 긴장한 눈으로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게 바로 그들이다. 하물며 그 정점에 있는 태사가 모를 리 없지."

"우리가 정보를 다루는 것까지 알고 있군요."

"그렇다. 그래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정확히 어떤 도움을 요청한 건가요?"

"정확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두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헌원세가로 보내 태사님을 도와달라고 하셨다."

"어떤 조건인데요?"

"첫째,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사람이어야 한다고 하셨다."

"세가 내부 사정이 많이 안 좋나 봐요? 서로를 의심하고 이간질하고, 암투? 그런 상황인가 보죠?"

"잘 들어라. 무림의 암투와 간계가 아무리 치열하다고 해도, 이는 황궁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식까지 서슴없이 목을 베는 족속들이다. 그리고 그런 암투와 간계를 1,000년 동안 계속 이어 왔다. 지금 그런 자들이 헌원세가에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한다."

"어려운 일이군요."

"그렇다."

조금 안심을 시켜 줘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육 장로는 단호하게 그리 답했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두 번째 조건은요?"

"황궁의 무장(武將) 여럿을 압도할 고수여야 한다고 했다."

"엄청난 고수를 보내 달라는 것이군요. 그럼 저보다는 무걸개 쪽에서 차출해 보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 일의 전제는 잠입, 위장 그리고 암중에서 은밀히 태사님을 돕는 일이다. 무걸개는 그런 훈련을 받지 않았다. 그들을 보낼 수 없는 이유다."

"그렇네요."

낭만개가 자리를 피한 후 줄곧 진지했지만, 육 장로가 더 진지한 얼굴로 내 어깨에 손까지 올리며 말했다.

"걸이번."

"네, 장로님."

"어쩌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만약 목숨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나에게 연통을 넣어라. 기꺼이 내 목을 내놓겠다."

"잠입은 저 혼자 하는 거예요?"

"그렇다. 방주님과 장로들 그리고 무력대는 보통의 거지로 위장해 헌원세가 주변을 포위하고 있을 것이고, 어떤 상황이 발생해 네가 도움을 요청하면 주저하지 않고 헌원세가로 진입할 것이다."

"정말 중요한 일이고 큰일이네요."

"태사님의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한두 명 죽고 끝나지 않을 테다. 최악의 경우 전쟁이 발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백 수천만 명이 죽을 수도 있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아! 돌겠네.

갑자기 울고 싶다.

"장로님, 그렇게 중차대한 일을 왜 저에게 맡기시는 거예요? 장로님 심복 중에 사결의 비걸개도 있고, 개 자 배 비걸개 선배들도 있고. 맞다! 걸십칠번 그 녀석도 엄청 유능해요."

"너다. 너여야만 한다. 이건 나 혼자 결정한 게 아니다. 방주님과 장로들 모두 만장일치로 너를 선택했다."

"왜요?"

울먹이며 물었다.

울 상황이 아니지만, 막중한 책임감이 짓누르는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울먹였다.

"우리는 너를 최고의 비걸개로 인정……."

"개소리 집어치우시고! 저 지금 진짜 울고 싶단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 주세요."

"어험. 어험."

"말해요. 빨리요. 진짜 울기 전에."

"그게… 어험. 네가 열아홉 살이잖느냐?"

"근데요?"

"열아홉 살에 뭔가 그냥 딱 봐도 어디가 좀 부족해 보이고……."

육 장로 이 인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라의 명운이 어쩌고 하며 진지하더니. 갑자기 내 눈치를 마구 살핀다.

"어험. 어험."

헛기침까지?

"그러니까 네가 나이도 어리고, 보기에 많이 허술해 보이고. 누가 너를 의심하겠느냐? 거기에 가 보면 알겠지만, 죄다 닳고 닳은 노인네들이다. 아마 아무도 어린 너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어험, 쿨럭."

또 헛기침을 한 후.

"그리고 그런 허술한 외모, 분위기와 달리, 너는 1갑자의 내공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게다가 비걸개 수석 수료생이고. 너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없었다."

"장로님."

"그, 그래, 걸이번.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라."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그렇게 어설퍼 보여요?"

"응? 그… 그게… 응. 솔직히 그렇다. 뭔가 있는 척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건 아는데. 사실 좀 많이 어설프다. 아직은."

"아직은요?"

"그래. 아마 이번 일을 완수하고 나면, 네가 한층 더 성숙한 고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건 진심이다."

"살아남으면 그렇겠죠?"

"위험하면 언제든 말해라. 목숨이 필요하면 이 늙은 목을 바칠 테니."

"걔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 전에 쓱싹하겠죠."

울먹이며 말했다.

투정 부리는 거다.

그런데 육 장로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나 보다.

"음… 많이 무서우면 하지 않아도 된다. 방을 위한 일이고,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비걸개의 의무는 아니다."

안 해?

안 할 수 있다고?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안 해요? 우리 집 가훈이 ‘은혜를 갚아라’인데요. 해요! 한다고요!"

결국 입에 칼을 물고 살얼음판을 걷기로 결정했다.

이후에도 육 장로는 이번 임무와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어떤 신분으로 어떻게 잠입해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부터.

헌원문장이 병을 앓고 있고, 황제가 1년의 병가와 함께 태의(太醫)의 수제자를 보내 치료하게 했다는 이야기.

또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충고까지.

그런 후.

"장로님, 일 외적으로… 그러니까 개인적인 일인데, 저도 하나만 부탁하면 안 될까요?"

"지금 어떤 상황인데 정신을 다른 곳에 파는 것이냐?"

"중요한 문제라서 그래요. 그것만 해결되면, 다른 생각 없이 헌원세가 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무슨 일이냐?"

"죽은 걸십이번한테 동생이 있어요."

"소용개 녀석 일이라면 이미 처리해 뒀다."

"네? 벌써요?"

"우리 개방은 의와 협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방파다. 당연히 의롭게 죽은 걸십이번의 동생을 그냥 놔둘 리 있겠느냐?"

"아! 그렇군요. 그래서 그 녀석 지금 뭐 하고 있는데요?"

"무걸개가 되고 싶다더구나. 무공은 많이 부족하지만, 무재가 꽤 뛰어나고 무엇보다 근성이 좋다고, 녀석을 가르치는 교두들도 칭찬 일색이더라. 몇 년 더 훈련을 받아야 정식 무걸개가 되겠지만,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감사해요, 육 장로님."

"내가 뭘. 그리고 잘했다."

"뭘요?"

"소용개에게 타구봉법 3초식을 가르쳐 준 일. 아주 잘한 일이다."

"네, 네, 하하."

"너는 곧바로 출발해야 한다. 급하다."

"지금요?"

"그래, 한시가 급하다. 당장 헌원세가로 떠나야 해."

아! 엿됐다.

낭만개 아저씨한테 무공 한 자락도 전수받지 못했는데.

하아! 돌겠네.

일이 이렇게 꼬이네.

* * *

"지금 바로 가야 한다고? 그리 급한 임무더냐?"

"네, 낭만개 아저씨."

"이거 아쉬워서 어쩌냐? 돌아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급히 떠나고."

"이거 받으세요."

"이게 뭐냐?"

"육 장로님이 웬일로 임무 수행비로 은자를 열 냥씩이나 줬네요. 보통 은자 한 냥 주고 끝인데."

"이걸 왜 나에게 주는 것이냐? 네가 써야지. 구걸도 못 하는 녀석이 어찌 먼 길을 가려고."

"여비 쓸 돈은 충분히 있어요. 그리고 제가 임무 수행할 곳이 어마어마한 부잣집이에요. 그러니 제 걱정하지 마시고, 어린 거지 녀석들 먹을 거나 사 주세요."

낭만개는 끝까지 받지 않으려 했지만, 내가 강제로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휴우. 이걸 받아도 되는지."

"저 가 봐야 해요. 한시가 급하다고 해서요. 하여간 제가 뛰어난 건 어찌 그리들 잘 알아서, 이렇게 사람을 부려 먹는지. 하하."

나를 보는 낭만개 아저씨의 눈이 그렁그렁하다.

"태한아."

"네, 아저씨."

"임무를 마치면 언제든 돌아와 쉬어라. 네가 쓰는 움막은 내가 매일 깨끗이 치워 놓을 테니까."

"고마워요, 아저씨. 그리고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거예요. 여기가 저의 집이잖아요."

낭만개 아저씨와 아쉬운 작별.

나는 헌원세가가 있는 강소 남경으로 떠났다.

그곳에 황궁의 태사가 있… 아니, 천하 4대 미녀 중 무려 두 명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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