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제가 무슨 병에 걸렸었는데요?"
두근두근.
내가 물어 놓고, 내가 떨려 미칠 것 같다.
나 진짜 날 때부터 행운석을 달고 태어났던 거 아냐?
뭐가 계속 이렇게 기연이 겹치냐?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응, 그거 아냐."
"네?"
"너 지금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그거 아니라고."
"제가 무슨 생각하는데요?"
"모르지, 그래도 아무튼 그거 아냐."
"됐고요, 그래서 제가 무슨 죽을병에 걸렸었다는 건데요? 이렇게 건강하기만 하고만."
"그냥 허약한 체질로 태어났어."
아! 힘 빠진다.
"그게 뭔 말이에요? 죽을병이라면서요?"
"너무 허약해서 병이란 병은 다 달고 살았고. 네 어머니도 네가 세 살, 네 살, 아무리 버텨도 다섯 살은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다. 우리 분타로 오기 전, 보은무관에 있을 당시 주변 마을에 있는 의원들은 다 불러서 진료했는데, 모두 같은 말을 했다더구나."
"제가… 그 정도로 약했어요? 구음절맥, 구양폭맥 이런 거 아니고요?"
"허허.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무림 영웅전’을 좋아하더니, 여전하구나."
"그런데 어떻게 살았는데요?"
"말했잖느냐? 내가 매일 밤 네가 자고 있을 때 움막으로 가서 너를 치료해 줬다고. 정확히는 추궁과혈을 해 줬다."
"얼마나요?"
"5년 조금 넘었지. 네가 어머니와 함께 분타로 온 첫날부터, 비걸개가 되기 위해 분타를 떠나는 바로 전날까지 계속해 줬으니까."
이 남자.
도대체 뭐야!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1년 넘게 나에게 추궁과혈을 해 줬다는 말이잖아.
아!
뭔가 찡하고 감동인데, 눈물이라도 흘리면 너무 쪽팔려서 낭만개 아저씨를 볼 자신이 없고.
"그래서요?"
일부러 퉁명스레 물었다.
"뭐가 그래서냐? 그래서 살았잖느냐. 하하."
"아니, 그래서 그게 지금 제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요? 지금은 건강하잖아요. 건강하다 못해 내공을 쓰지 않고 맨주먹으로 바위를 부술 정도예요."
"안다. 보이고."
"그러니까요."
"네 어머니는 네가 훌륭한 개방의 방도가 되길 진심으로 원하셨다."
"아는데, 말 돌리지 말아요."
"말 돌리는 거 아니다. 그래서 나도 네가 훌륭한 방도가 되길 진심으로 바랐고, 그래서 그토록 내 모든 걸 다 쏟아부어 너를 지금의 상태까지 만들어 준 거다."
"무슨 말이에요? 좀 쉽게 설명해 줘 봐요."
어린아이처럼 투덜거리는 나를 향해 낭만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태한아, 화경의 고수가 무려 5년이 넘게 모든 걸 쏟아부어 추궁과혈을 한다는 게 너는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두둥!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 지금 그딴 게 중요하지 않다.
화경의 고수.
스스로 인정했다.
아니, 그도 중요치 않다.
낭만개의 말.
화경의 고수가 5년이 넘게 지극정성으로 추궁과혈을 한다?
천하에서 최악의 무재를 가진 인간도 천무지체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 그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뜻이다. 아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힘까지 다 동원해서 이룬 상태가 바로 현재의 네 상태다."
머리가 복잡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데.
내 본능이 그런 나의 두뇌를 강하게 막아선다.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어쩌면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미쳐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다.
낭만개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이번엔 내가 묻겠다. 어떻게 기연을 얻어 지금의 상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연을 얻기 전에는 어땠느냐? 압도할 만한 무재와 무공으로 다른 비걸개 후보생들을 눌러 줬느냐? 감히 너란 존재를 머릿속으로조차 넘어 볼 수 없을 만큼의 기량 차이를 보여 줬느냐? 화경의 고수는커녕, 웬만한 고수들의 도움조차 받아보지 못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한 너는 어땠느냐?"
"꼴… 꼴찌……."
"그거다. 네가 천하제일인이 될 수 없는 이유."
아! X팔.
울고 싶다.
내 상태, 내 무재.
진짜 빌어먹어야 할 정도로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아!
화경의 고수가 무려 5년이 넘게 지극정성으로 추궁과혈을 해 주어, 최상의 상태로 만든 게 지금의 나다.
더는, 나아질 수 없다는 뜻.
대라신선이 돕기 전에는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아니, 대라신선이 돕는다 한들 방법이 있을까?
분명 상취개는 노력이 모든 걸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상취개의 경지에 한한 말이다.
상취개가 화경의 고수는 아니다.
정점에 서 보지 못한 자의 말이라는 뜻이고.
반대로 낭만개는…….
휴우.
인간이란 게, 원래 날 때부터 그릇이 정해져 있다는 말을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실망하였느냐?"
"조금요."
"표정을 보니 조금이 아닌데?"
"솔직히…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요."
"언제부터 천하제일인의 꿈을 꾼 것이냐?"
"꿈을 꾼 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예요."
"그게 꿈을 꾸었기에 그리 물어본 거란다. 그게 언제부터냐?"
"아저씨가 어쩌면 천하제일인일지 모른다는 소리를 들은 후부터요."
"무치개를 만났구나."
"어? 어떻게 아셨어요?"
"쯧쯧. 여전히 한심한 녀석이구나, 그 녀석은. 아이한테 별소리를 다 하고. 그런데, 태한아."
"네, 아저씨."
"난 한 번도 내가 천하제일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천하제일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나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단다."
"……."
"천하제일인을 꿈꾸기 전의 네 소원은 무엇이었냐?"
"훌륭한 비걸개가 되어 방에 입은 은혜를 갚는 거요."
"그 꿈을 다시 꾸면 안 되겠느냐?"
"그 꿈도 버리지 않고 있어요. 이젠 꿈이라기보다는 꼭 이루어야 할 의무 중 하나지만요."
"욕심이 많아진 게로구나."
"어쩌면요."
"원래 아는 게 많으면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지는 법이지. 그런데, 태한아. 사람은 절제라는 것을 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욕심이 계속 늘어나고,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하게 되는 것이다."
"네."
"네가 좌절하라고 한 말이 아니다. 네가 천하제일인보다는 훌륭한 거지, 아니 훌륭한 사람, 올바른 사람이 되길 바라서 해 준 말이니라. 좋은 사람, 사랑받는 사람, 존경받는 사람 말이다. 무엇보다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니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고, 한 발 한 발 나아가길 바란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네."
"인석, 맥 빠진 모습하고는."
"아저씨."
"그래."
"그런 의미로 좀 봐줘요."
"뭘?"
"무공."
"……?"
"타구봉법 전반결 후초식."
"음, 못 봐줄 것도 없지. 어디 한번 힘껏 펼쳐 봐라. 내가 봐줄 테니."
"네!"
주변이 너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나뭇가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 멀리까지 가서 제법 타구봉법을 휘두르기 적당한 나뭇가지를 주워 와야 했다.
살짝 떨렸다.
아니, 많이 떨렸다.
화경의 고수 앞에서 내 무공을 시전하고 시험하는 것 아니겠는가?
상대가 낭만개 아저씨라 그나마 덜 떨렸지만, 아니 사실 그래서 더 떨렸다.
빠르게 계산해 보니, 낭만개 이 인간 말이다.
내가 황천 분타에 엄마와 함께 왔을 때, 낭만개의 나이 고작 서른한 살이었다.
최소한 그때, 아니 분명 그 이전에 화경의 벽을 깼다는 소리다.
어쩌면 20대의 나이에.
와!
그게 가능해?
여하튼 아무리 늦게 쳐 줘도, 서른일곱 살에 화경의 벽을 깬 무치개보다 무려 수년이나 먼저 그 경지에 이른 거다.
최소한이 그렇다는 뜻이고.
말투를 보아 그보다 몇 년은 더 앞섰을 테다.
그렇다면 정말 20대의 나이에 화경의 고수가 됐을 수도 있다.
어마어마하다.
도대체 낭만개 아저씨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지금으로써는 현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다.
떨려도 해야 한다.
나는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심호흡을 하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잠깐!"
막 타구봉법을 시전하려고 할 때.
낭만개가 놀란 음성으로 나를 멈추어 세웠다.
"왜요?"
"너… 감추었느냐?"
"네?"
"내공. 1갑자가 아닌… 2갑자? 2갑자가 넘는구나?"
허걱!
걸렸다.
무치개도 못 알아봤는데.
역시 낭만개가 한 수 위라는 건가?
아니, 내가 방심했나?
그도 아닌데?
소인장기공은 내가 방심하고 말고를 떠나, 그냥 소인국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계속 유지되는데?
아!
내 무공을 조금 더 면밀히 살피려고 나를 주시하다가 감지한 건가?
"기이한 장기공을 익혔구나? 무림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나도 좀처럼 네가 익힌 장기공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겠다."
"그 정도예요?"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정도를 한참 넘는 놀라운 장기공이다. 나나 되니 알아본 거지, 화경의 고수라 하여도 다는 네 장기공을 꿰뚫지 못할 것이다."
오! 장기공! 나의 소인장기공!
역시 대단한 거였어.
"소인장기공이라고 해요. 내공을 얻을 때, 함께 얻은 기연이에요."
"너는 기연을 입에 퍼붓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기연의 바다에 빠져 사는 사람 같구나. 소인장기공이라……. 거기에 2갑자가 넘는 내공. 그리고 네 외공이라면……. 휴우."
고개를 숙이며 한숨까지 길게 쉰 낭만개.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들어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내가 틀렸다. 어쩌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뭐가요?"
"천하제일인."
두둥!
두둥!
두둥!
이건 입으로 내는 소리가 절대 아니다.
내 심장의 울림이다.
그만큼 떨렸다.
천하제일인이라는 말을 낭만개의 입으로 들었기에 더더욱 떨렸다.
그렇게 나와 낭만개는 서로 놀라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휴우.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그런데 흥분할 만도 하다. 2갑자라니. 허허. 살다 살다 네가 나를 이렇게 놀라게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저보다 더 놀랐겠어요? 이 장로님한테 낭만개 아저씨가 천하제일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제 심정은 어땠겠어요?"
"그렇지, 그래. 너도 많이 놀랐겠구나. 하하하."
"도와주세요. 꼭 천하제일인이 아니더라도, 열심히 해 보고 싶어요. 될 수 있는 데까지 가 보려고요."
"그래, 좋다! 펼쳐 보아라! 내, 제대로 너의 무공을 봐주도록 하겠다."
"네, 아저씨!"
다시 나뭇가지를 꼭 쥐고.
심호흡을 하고.
기수식을 취한 후.
타구봉법을 일 초식부터 펼… 엇?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걸이번! 걸이번!"
엄청난 속도로 무언가 오는가 싶더니, 내 이름을 부른다.
가까이 올수록 그 형체가 또렷하다.
엇?
저 사람은?
쉬이이이이익, 탓!
"육 장로님, 여긴 어쩐 일로……?"
"걸이번, 긴급… 아! 낭만개 분타주도 있으셨구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땀을 비 오듯 쏟는다.
달려와서 그런 게 아니다.
숨도 고르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다가, 낭만개를 보더니 얼굴이 사색이 되어 비지땀을 마구 흘려 대기 시작한 거다.
육 장로가 이 장로만 무서워하는 줄 알았더니, 낭만개 역시 무서워하나 보다.
"네, 잘 지냈습니다. 상취개 육 장로님께서도 잘 지내셨나요?"
"앗! 아, 네. 네. 저야 늘 그렇습니다. 하하하. 하하. 하하하하."
어색한 웃음까지.
"임무 때문에 오신 거예요?"
"엇? 어! 그렇지, 그래. 맞아, 내가 네게 임무를 주기 위해 이곳에 왔지."
와!
매일 술에 취해 해롱해롱해도, 일할 때만큼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인데.
어지간히도 당황한 모양이다.
"다른 거지들 시키시지, 어떻게 장로님께서 직접 오신 거예요?"
"그게, 이게 좀 특별한……. 어험, 어험."
비지땀을 흘리며 헛기침까지.
그러면서 낭만개 눈치를 마구 살피고, 또 나에게 눈치를 마구 준다.
간절하다 못해 불쌍해 보인다.
구해 줘야겠다.
"낭만개 아저씨, 저 육 장로님과 따로 이야기 좀 나눌게요."
"그래라. 난 먼저 분타로 돌아가 있겠다."
"네, 곧 따라갈게요."
"상취개 장로님도 살펴 가십시오."
"아! 네. 넵! 전 어디든 잘 갑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육 장로의 어색한 웃음은 낭만개가 우리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털썩.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기까지.
어지간히도 놀라고 당황하고 무서웠나 보다.
"휴우, 갔지? 낭만개 진짜 갔지? 하아! 어떤 새끼가 너 혼자 여기 있다고 해서 얼른 달려왔는데. 내 이놈의 거지를 잡히면 그냥 콱!"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임무라면 진짜로 다른 거지들 시키면 됐잖아요."
"황궁의 태사이신 헌원문장 대인께서 직접 우리 개방에 도움을 요청한 일이다."
태사(太師)는 태부(太傅)ㆍ태보(太保)와 더불어 정일품(正一品)의 최고 관직인 삼공(三公)을 말한다.
태사의 명확한 의미는 천자(天子), 즉 황제의 스승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