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태한아, 돌아…왔구나."
"태한아……."
"아… 아ㅃ… 압……."
낭만개 아저씨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압… 아ㅃ…"
이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압… 압……."
X팔!
안 나온다.
아빠라는 말이.
결국…….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오! 그래. 우리 태한이! 우리 태한이."
걱정하던 얼굴은 금세 사라지고, 낭만개는 단박에 달려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으윽, 냄새. 아저씨, 아저씨? 냄새!"
"하하! 여전하구나. 냄새에 예민한 건."
그날 신용표국에서 받은 품삯으로 누렁이 한 마리를 잡고 화주를 한 항아리나 샀다.
황천 분타로 돌아가 잔치를 펼쳤다.
첫날 낭만개와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끝까지 아빠 소리는 입에서 나오지 못했다.
* * *
"혼자 갈 수 있겠냐?"
"제가 아직도 꼬맹이인 줄 아세요?"
"그래, 오늘은 혼자 다녀와라."
"네, 해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그러려무나."
복잡한 심경으로 나를 보는 낭만개를 두고 홀로 나섰다.
시전에 들러 이것저것을 사고,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와!
낭만개 이 인간.
내가 살다 살다 이렇게 잘 꾸며진 산소는 처음이다.
우리 엄마 산소.
곳곳에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 있고, 잡초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어지간히도 들락거리며 엄마 산소를 가꾸었나 보다.
"엄마, 저 왔어요."
"엄마, 저 비걸개 됐어요. 그것도 수석으로 수료했어요."
"엄마… 엄마… 저……. 흑흑흑."
눈물이 나왔다.
11년 만에 엄마를 만나니,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오전 내내 울었다.
오후에는 간단히 산소를 정리하고……. 아! 정리할 게 하나도 없다.
진짜 산소를 꾸민 거야? 아니면 정원을 꾸민 거야?
정원을 꾸며도 이렇게 예쁘게는 못 꾸미겠다.
낭만개 이 인간, 천하제일 고수가 아니라 천하제일 정원사 아니야?
참나.
오전에 보고 오후에 다시 봐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집으로 돌아온 이튿날은 엄마와 온종일 함께했다.
* * *
사흘째.
"낭만개 아저씨, 저 여기 왔다는 거 총타에 보고해야 해요."
"벌써 했다. 어제 우리 분타에서 하남 분타에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날이어서, 네가 온 것도 함께 보고했다."
"아! 네."
"어떠냐?"
"뭐가요?"
"비걸개 생활은 어떠냐? 위험하지는 않냐?"
"아직 할 만해요. 아저씨는요?"
"나야 매일 똑같지. 따스한 햇살 맞으며 자고, 그러다 눈떠 보면 철전 몇 닢 앞에 놓여 있고. 그걸로 화주 한 병 사서 먹고. 하하."
"분타에 무슨 문제는 없어요? 마을에는요?"
"여기에 무슨 일이 있겠냐? 그냥 시골인데. 다들 똑같지. 먹고 자고 일하고, 우리는 먹고 자고 구걸하고."
"11년 전하고 똑같네요."
"암, 똑같지. 네 녀석이 있고 없고만 바뀌었고."
낭만개.
일부러 엄마를 언급하지 않는다.
진짜 아직도 좋아하나?
참, 아무리 순정파라도 이건 너무하는데?
같은 남자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독특한 사람이다.
"먹을 거! 개고기 사 줘!"
"와아! 개고기 아저씨… 아니, 개고기 형아! 개고기 사 줘!"
어린 거지 녀석들이 또 우르르 몰려왔다.
응, 이제 돈 없어.
몇 푼 안 남았다고.
"이 녀석들, 누군 돈이 남아도는 줄 아냐!"
"먹을 거! 먹을 거!"
"아잉! 먹을 거 사 줘. 형이라고 불러 줬잖아! 빨리 사 줘."
낭만개가 아이들을 달랬다.
"그만들 해. 오랜만에 온 형아 곤란하게 하지 말고."
그래도 아이들이 낭만개 말은 아주 잘 듣는… 듣기는 개뿔.
"낭만개 아저씨 빠져! 형아! 빨리 먹을 거 사 줘. 배고파."
"알았다, 이 녀석들아. 하지만 오늘까지만이다. 내일부터는 구걸해야 해. 거지가 구걸을 해야지. 알았지?"
"응! 빨리 가자!"
"개고기 살 돈은 없고. 소면 먹으러 가자. 대신 곱빼기."
"와아아아아아!"
"형아 최고!"
분타의 어린 거지 녀석들과 함께 소면을 배 터지게 먹었다.
* * *
나흘째.
오후가 되어 낭만개 아저씨와 함께 엄마 산소를 찾았다.
오전 내내 어디 갔나 했더니, 주변 산들을 돌며 예쁜 꽃이란 꽃은 죄다 꺾어 왔다.
참, 대단한 양반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낭만개 아저씨와 함께 제사를 지내고.
황천 시골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좋은 곳이다.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그곳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 일부러 이런 자리를 꾸몄다.
어린 거지 녀석들에게 훼방을 받지 않고, 꼭 물어봐야 할 것을 물을 그날이다.
"아저씨."
"그래, 태한아."
"아저씨 천하제일인이었어요?"
낭만개의 반응……. 아! 별 반응 없다.
그냥 평소와 같은 얼굴이다.
"네가 비걸개가 되더니 사람이 많이 바뀌었구나. 입에서 천하제일이란 소리도 나오고. 허허허."
대충 얼렁뚱땅 넘기게 할 순 없다.
"아저씨가 천하제일인이냐고 물었어요."
진지하게, 여전히 시선을 마을로 향하고 있는 낭만개의 옆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도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나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나를 빤히 보며…….
"훈련하다 다쳤냐?"
"네?"
"비걸개 훈련하다가 머리를 다쳤냐고."
"뭔 소리예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천하제일인은 뭐고? 그걸 왜 나한테 가져다 붙여? 허허허. 참. 첫날도 살짝 이상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며칠 괜찮은 것 같아 안심하려고 했더니, 다시 이상한 소리를 해서 나를 걱정케 하는구나."
"아니에요?"
"천하제일인?"
"네."
"나?"
"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하하하! 올해 들었던 말 중에 가장 황당하면서도 웃긴 말이구나. 하하하하!"
아! 아니었나?
아니면 숨기는 건가?
뭐지?
내 기감으로는 그에게서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화경의 고수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대였나?
너무 대단해서가 아니라, 너무 하찮아서 느낄 수 없었던 거야?
"진짜 아니에요? 천하제일인?"
"하아! 이 녀석 오늘 진짜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러지? 나 같은 거지가 무슨 천하제일인이라고. 하하."
웃는다.
정말 재밌다는 듯 그렇게 웃었다.
아!
뭔가 잘못된 듯하다.
동명이인이거나.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었거나.
절로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소싯적 칼을 좀 쓰기는 했지."
혼잣말같이 내뱉는 저 한 마디.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 하늘에서 동아줄이라도 내려온 기분이었다.
"얼마나요? 얼마나 칼을 잘 썼는데요?"
"꽤 썼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아무리 그래도 네가 말하는 천하제일인이니 뭐니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니."
역시 그런 건가?
단령도문 얘기를 물어볼까?
아니다.
괜히 슬픈 과거까지 꺼내 낭만개 아저씨의 속을 아프게 할 수는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젊었을 적, 아저씨 칼을 막았던 사람이 있긴 있었어요?"
"없었지. 내가 생각해도 내 칼이 좀 많이 살벌했거든. 하하."
뭐야?
무패라는 소리잖아?
아이씨, 헷갈리네.
"그래서 얼마나 강한데요?"
"엄청 강하긴 했지. 지금은 그때보다 몇 곱절은 더 강해졌고."
"매일 먹고 자고 싸고 하는데 어떻게 더 강해져요?"
"그냥 먹고 자고 싸도 강해지더라."
"얼마나요?"
"음… 많이."
"그러니까 그 많이가 얼마나 많이냐고요!"
"아이고, 소리는 왜 지르고 난리냐? 엄마 놀라게."
"안 놀라요. 우리 엄마, 내가 소리 지르며 뛰노는 거 제일 좋아했어요."
"그랬지. 네가 많이 아팠으니까. 건강하게 뛰노는 거 보는 것을 제일 행복해했었지."
"제가 많이 아팠어요?"
"너무 어려 기억아 안 날 거다. 그때……."
"아니! 그거 말고. 말 돌리지 말고요."
"……?"
"얼마나 강하냐고요!"
"음… 그게……."
낭만개가 처음으로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심지어 한참이나 입을 꾹 닫고 고민까지 하는 게 아닌가?
또 헛소리하면 진짜 고래고래 소리 지른 후 산에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뭐가요? 설마… 설마… 진짜로?"
"그래, 천하제일인."
두둥!
이게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다.
내 심장에서 나는 소리다.
"하지만 태한아,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단다. 나와는 비교도 못 할 고수가 분명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누구요?"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없고."
두둥!
다시 말하지만, 이건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다.
"그럼……."
하아! 너무 떨려 말이 다 안 나온다.
"그럼 아저씨가 천하제일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요?"
"천하제일인이면 뭐가 달라지겠느냐? 매일 이렇게 구걸해야 먹고 사는 거지인데. 그리고 태한아, 분명하게 말해 두는데, 내가 천하제일인일 가능성은 매우 적어. 희박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세상은 그만큼 넓고 고수는 그보다 더 많단다."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삼존삼성(三尊三星). 그러니까 삼존일제이선(三尊一帝二仙)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알죠?"
"귀가 따갑게 듣는 사람들 아니겠느냐?"
아! 떨린다.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떨린다.
그래도 물어봐야 한다.
확인해야 한다.
"그 사람 중에… 아저씨가 무서워하는 사람 있어요?"
이번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답한다.
"없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
"세상 넓은 거 아니까 그 소리 좀 그만하고요!"
"소리는 왜 지르고 그래? 어쩌면 천하제일인일지도 모르는 거지한테. 큭큭큭."
진정하자.
너무 흥분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흥분하지?
아니, 충분히 흥분할 만한 일이긴 하다.
그래도, 너무 흥분했다.
어쩌면 배신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낭만개 아저씨가 자신이 천하제일인이라는, 엄청난 고수라는 사실을 지금까지 숨긴 것에 대한 배신감.
아빠라고는 안 불렀어도, 우리가 가족은 맞다.
아! 그런데 이게 숨긴 건가?
그것도 좀 애매하긴 한데.
일단 진정하고.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저 지금 진지해요."
"그래, 알았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다. 나는 매일 구걸해야 먹고 사는 거지임에는 변하는 게 없어."
"있어요, 바뀌는 거."
"……?"
"무공."
"무공?"
"네, 무공 전수해 주세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얘가 진짜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얼굴이다.
"왜? 너도 천하제일인이 되게?"
"저라고 천하제일인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음… 변했구나."
"변했죠. 아저씨… 보이시죠? 느껴지시죠? 내 내공. 내 외공."
낭만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몇 번이나.
"그런데 내가 말한 변한 건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음, 그런데 확실히 대단하긴 하구나. 기연을 밥에 말아 먹었다고 해도 믿겠다."
"네, 맞아요. 기연을 그냥 통으로 밥에 말아 먹었어요. 그런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에요. 저, 비걸개 수석 수료했어요. 상으로 타구봉법 전반결 모두를 얻었다고요."
이번엔 낭만개가 입으로가 아닌 얼굴까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연을 밥에 말아 먹은 게 아니라, 그냥 입에다가 퍼부었구나."
"네, 그것도 인정해요. 어때요? 이만하면 천하제일인 한번 노려 봐도 되지 않겠어요?"
피식.
웃는다.
웃었다.
웃어?
왜?
열아홉 살의 나이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내공과, 철사방의 방주라도 한 수 접어 주어야 할 외공.
거기에 천하제일 신공이라 불려도 될 타구봉법의 전반결까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웃지?
"왜 웃어요?"
"이걸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으음, 모르겠네."
"그런 건 속으로 생각하는 거고, 입으로 뱉었으면 말해 줘야 하는 거예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태한아."
"……?"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너무 크게 실망하지는 말거라."
"실망이요? 제가요? 얼마든지 해 보세요. 당금 천하의 제 또래 중에 누가 천하제일인과 가장 가까이 다가갔는지 분명하니까요."
"음,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구나. 그런데……."
낭만개가 또 주저하는가 싶더니, 결국 말을 이었다.
"마음의 각오 단단히 하고 들어라."
"네, 걱정 마시고, 말씀하세요."
"네가 우리 분타의 식구가 된 후, 나는 매일 밤 은밀히 네가 자는 움막으로 갔단다."
"미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까지 부라리며, 천하제일인이고 뭐고 한 대 칠 기세로 소리를 질렀다.
"미친! 미쳤어요? 나하고 엄마만 있는 움막에, 왜 아저씨가 밤마다 은밀히 들어와요!"
내가 X랄을 하자 낭만개가 당황하여 손까지 가로저으며 황급히 해명을 했다.
"오해다! 오해. 네 엄마가 불러서 간 거다."
나를 더욱 화나게 하는 말이었다.
"지금 우리 엄마 모욕하는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네가 아팠어. 네가 아파서 엄마가 나를 부른 거라고! 말을 좀 끝까지 들어!"
"네? 제가… 아팠어요?"
"그래, 인석아. 너 죽을병에 걸렸었어."
"제, 제가요? 죽을병이요?"
"그렇다니까. 휴우. 비걸개 훈련하면서 벽력탄을 삶아 먹었나? 깜짝 놀랐네. 앉아라."
"아, 네. 죄송해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좀 뻘쭘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 엄마도 꽤 많이 외로웠을 테다.
낭만개 아저씨같이 지극정성으로 잘하는 남자라면, 충분히 사랑해도 됐고, 내가 응원해 줘야 하는 게 오히려 도리일 테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잠깐!
그건 그거고, 내가 죽을병에 걸렸었다고?
설마 구음절맥, 구양폭맥.
뭐, 이런 건가?
무림 영웅전에 나오는 그 죽을병?
치료가 어렵지, 일단 치료만 하면 천무지체에 버금가는 무재를 얻게 된다는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