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일부러? 산적들에게 일부러 잡힌 거라고? 너, 설마……."
걸삼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시선을 활활 타오르는 산적들의 산채로 향했다.
이 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무게감이 있었지?
"맞아. 그날 그랬어. 첫 번째 임무를 마치고,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표호산을 넘는데, 비명이 들려 가봤더니 벌써 열댓 명은 죽고, 젊은 여인 댓 명이 산적들에게 끌려가고 있었어."
"그, 그래서?"
"바로 산적들을 해치우고 여인들을 구할까 했지만, 산채에 또 다른 여인들이 더 잡혀 있을 수 있잖아."
이 새끼.
언제부터 생각이 이렇게 깊었어?
아니지.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확실히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일부러 잡혀갔다고?"
"응, 다른 여인들이 더 있나 확인한 다음 구하려고."
"그런데 왜 구하지 않았어? 네가 놈들에게 잡혀간 뒤 보름이나 지났잖아."
"그게……."
걸삼번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데, 진짜 이 녀석이 걸삼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러며 하는 말이…….
"숫자가 너무 많았어."
"어? 인질로 잡힌 여인들?"
"아니, 산적들."
"지, 지금… 지금 너 이 새끼,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산적들이 너무 많고 무서워서. 나도… 그냥… 헤헤. 미안해. 헤헤헤."
아놔!
바뀌긴 뭐가 바뀌어?
기대한 내가 미친놈이다.
에휴.
"그래서 놈들한테 잡혀서 죽지 않으려고 발가벗은 상태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그런 거야?"
"응. 헤헤. 재밌다고 안 죽이더라. 헤헤헤."
"지금 웃음이 나와?"
"미안. 헤헤. 근데 진짜 무서워서 뭘 할 생각도 못 했어. 헤헤. 헤헤헤."
됐다.
이 녀석 이러다 진짜 죽는다.
받은 은혜가 있으니, 녀석만큼은 살리고 싶다.
"야, 걸삼번."
"응, 태한아."
"그래, 백둔."
"응, 헤헤. 내 이름 아직도 기억하네. 헤헤헤."
"옮겨, 무걸개로. 네가 원한다면 내가 직접 육 장로님을 만나서 부탁해 볼게."
"헤헤. 헤헤헤."
"웃지만 말고! 너 이러다 진짜 죽어! 죽는다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간절함에 지른 소리였다.
하지만 걸삼번 녀석은 여전히 헤헤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나 안 죽어."
"야!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너도 알잖… 어?"
녀석이 뭔가 주섬주섬하더니 목에 걸린 목걸이를 꺼내 나를 향해 내밀었다.
"그… 그건?"
"귀혼석. 알지? 넌 행운석. 나는 귀혼석. 헤헤."
"그게 뭐?"
"비걸개 후보생 때 너도 들었잖아. 이 귀혼석은 지하의 혼령들이 보우하사, 귀혼석의 주인을 지켜 준다고."
"너, 너 설마 그걸 진짜로 믿는 거야?"
"봤잖아. 산적들이 나 안 죽이는 거."
"미친! 그건 네가 홀딱 벗고 춤추고 노래해서 그놈들이 살려 준 거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분명 귀혼석이 나를 돕는 것 같아.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았어. 물론 매일 몇 대씩은 맞았지만. 헤헤. 헤헤헤."
"애! 너… 휴우. 언제부터 이렇게 고집이 세진 거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자 걸삼번이 오히려 내 등을 토닥여 줬다.
"나도 알아, 위험한 거. 그런데 태한아."
"……."
"비걸개가 되기 위해 나도 정말 열심히 했어. 네가 다 지켜봤잖아. 그리고 비걸개 임무가 위험한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고. 그런데 고작 임무 한 번 수행한 후 그만두는 건 아닌 거 같아. 하고 싶어. 진심이야."
"너… 너 정말… 어휴. 나도 모르겠다. 대신! 너, 언제든 이 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 싶으면 곧바로 나한테 연통 넣어. 약속해! 내가 어떻게 해서든 괜찮은 무걸개 자리로 옮겨 줄 테니까."
"고마워. 헤헤. 정말 고마워, 태한아. 그리고 나도……."
"너도 뭐?"
"네가 이번에 나 살려 줬잖아."
"귀혼석이 살려 준 거라며?"
"에이. 그건 그거고. 네가 나랑 여인들 목숨 구해 준 거잖아. 그래서……."
"그래서 뭐?"
"언젠가 나도 꼭 너를 한 번 살려 줄 거라고. 진짜로. 꼭 약속."
"어이쿠, 퍽이나 그러겠다. 내 걱정은 말고, 항상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괜히 신분 발각돼서 고문당하다가 죽지 말고. 알았어?"
"응, 알았어. 명심할게. 헤헤. 헤헤헤."
걸삼번과 헤어졌다.
녀석은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러 떠났다.
여전한 녀석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위태위태한 모습에 안타깝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됐다.
녀석은 귀혼석을 말했지만, 발가벗고 노래 부르며 춤추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녀석의 말대로 결론적으로는 살아남지 않았는가.
계속 그렇게 잘 살아남길 바란다.
그리고 녀석이 도움을 청하면, 그때 나서서 도와주면 될 테다.
그나저나 귀혼석이라니.
하여간 엉뚱한 녀석 같으니라고.
나도 얼른 우리 새아빠나 보러 가야겠다.
아! 그런데 내가 걸삼번 녀석한테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
에라이, 모르겠다.
새아빠! 나, 지금 가요!
* * *
배고프다.
배가 고파 진심으로 뒈질 것 같다.
은자 한 냥 남지 않았냐고?
표호산 산채에 잡혔던 여인들 보지 않았나.
얼마나 불쌍한가?
그래서 산채에서 찾은 금은보화와 돈은 물론, 내 돈 은자 한 냥까지 그녀들에게 줬다.
그래서 무일푼.
닷새째다.
굶고 있다.
진심으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무작정 산을 올랐다.
없다.
빌어먹을 호랑이, 곰, 늑대들은 다 어디로 갔냔 말이다!
너무 배가 고파 눈앞이 빙그르르 도는 것 같다.
이건 내공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다.
배가 고프니, 심리적으로 흔들리고, 그게 착시 현상까지 일으키는 거다.
아!
그렇다고 엄한 동물들을 죽일 수는 없지 않겠나.
그 녀석들에게도 새끼가 있을지 모르는데.
나에게 달려드는 미친 멧돼지도 없다.
정당방위가 하고 싶다고!
제발 좀 달려들라고!
없다.
응, 없어.
돌겠다.
결국 사흘을 더 쫄쫄 굶고 산에서 내려왔다.
배탈이 났다.
먹은 것도 없는데 계속 설사다.
아!
먹은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산나물 비슷하게 생긴 걸 보이는 족족 마구 뜯어 먹었다.
그랬다가 배탈이 난 거다.
먹은 것도 없는데 계속 나오는 설사가 신기하다 못해 원망스럽다.
다행히 하루 만에 설사는 멎었다.
운기조식을 죽어라 해서 몸에 있는 나쁜 기운을 다 뺐더니 설사가 멎었… 아! 더 배고프다.
구걸은 죽어도 못 하겠고.
훔쳐?
탐관오리나 악당 놈들을 족치고 그 재물을 조금만 쓱싹할까?
개방에서 모를 리 없다.
더군다나 비걸개는 최대한 몸을 사리고 감춰야 한다.
괜히 악당 물리쳤다고 소문나면 이번엔 진짜 비걸개 자격 박탈이다.
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배는 고프고.
결국!
그래!
무공이 밥 먹여 주냐고?
응.
밥 먹여 줘.
"신용표국이라. 큭큭큭."
조금 큰 상점 수준의 작은 표국이다.
거의 아흐레 동안 굶어서 피골이 상접했지만, 웃음이 나왔다.
죽을 것 같지만, 어깨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한참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신용표국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아저씨가 여기 국주예요?"
"그런데?"
"어디로 가는 표물입니까?"
"그건 왜 묻지?"
"일손이 부족해 보여서요."
"음, 마침 일손이 부족하긴 한데."
"가는 길만 맞다면 제가 힘을 보태겠습니다."
"이 표물들은 하남으로 간다."
"오! 잘됐군요. 저도 하남으로 갑니다. 단기로 일하는 만큼, 품삯은 주시는 대로 받겠습니다."
"우리 표국의 규정에 근거해 가감 없이 줄 테다."
"그거 잘됐군요. 그럼 저를 고용하시죠. 최고의 표사가 무엇인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표사?"
"네, 표사요. 제가 며칠 굶어서 보기에는 좀 그래 보여도, 큭큭. 소문은 내지 마세요. 사실… 저 엄청난 고수예요."
"풉. 큭큭. 그래. 그래, 알았다. 저기 보이지?"
"오! 밥. 밥이다. 하하. 하하하."
"저기서 밥 한 그릇 후딱 먹고, 얼른 움직여라.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아직 짐을 절반도 싣지 못했으니까."
"네? 짐이요? 저 표사……."
"밥 안 먹을 거야?"
"네, 밥. 하하. 밥. 먹어야죠. 하하하. 그래도 표사……."
"표사는 차고 넘쳐. 쟁자수가 부족하지. 하남까지 은자 넉 냥. 밥은 무제한. 하려면 하고 말 테면 말아."
결국 쟁자수가 되어야 했다.
밥이다.
밥.
누군가는 매일 먹는 밥이라 그 소중함을 모른다.
하지만 거지는 잘 안다.
더군다나 나처럼 아흐레나 굶은 거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결심했다.
하남까지 가는 짧은 시간이겠지만, 천하제일 쟁자수가 되기로.
* * *
표사들에게 무시당하는 쟁자수.
선배 쟁자수들의 텃새까지.
하지만 주인공은 묵묵히 자기 일을 해 가며 표행을 나아간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레 복면을 쓴 악당들이 표물을 막고.
그 잘난 체하던 표사들은 악당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다들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을 때, 짜잔!
천하제일 쟁자수 등장.
악당들을 물리치고, 큭큭큭.
주인공을 무시하던 표사들과 쟁자수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된다.
캬아!
얼마나 멋지나?
응, 그런 일 없다.
그냥 매일 고된 하루였다.
수레를 끌고, 밀고.
비 오면 덮개로 덮고.
말들 먹이 먹이고, 씻기고.
수레바퀴가 구덩이에 빠지면 또 그거 꺼내려고 생난리를 쳤다.
와라! 와라! 그렇게 속으로 흑의 복면인들이 나타나길 바랐지만…….
안 왔다.
흑의 복면인도, 산적들도.
그냥 고된 표행길일 뿐이었다.
그렇게 하남에 도착, 열아홉 대에 실린 짐까지 모두 내려 창고로 옮기고.
"하아! 녀석. 올해 열아홉 살이라고?"
"네, 국주 아저씨."
"사실 첫날 네 굶주린 꼴이 하도 안타까워서 밥이나 먹이려고 고용한 건데. 정말 일을 잘하는구나. 일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라. 최고참 쟁자수들과 똑같은 품삯을 주겠다."
"표사는요?"
"허허, 녀석하고는. 아직도 그 표사 타령이냐?"
"네, 못내 아쉽네요."
"나중에 고수가 되면 표사도 시켜 주겠다."
"저 지금도 고수인데. 그것도 엄청난 고수요."
"알았다, 알았어. 여하튼 일자리가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와라. 내, 너라면 사람이 넘쳐흘러도 꼭 최고의 조건으로 고용할 테니까."
"고맙습니다. 그럼 전 가 볼 데가 있어서. 안녕히 계세요."
"오! 그래. 잘 가고. 꼭 다시 보자!"
"네."
신용표국의 장하평 국주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약속했던 은자 넉 냥에, 한 냥 더 주기까지 했다.
* * *
"아빠?"
"아빠!"
"새아빠!"
"아버지!"
"아! 이게 입에서 잘 안 나온단 말이야. 어쩌지? 아빠? 아빠! 아버지가 더 나으려나? 아버지! 할 수 있으려나?"
혼자 걷는 길.
연신 아빠라는 말을 해 봤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도 참 어색하다.
어려서부터 줄곧 아저씨라고만 불렀는데, 갑자기 아빠라고 하면 미친 줄 알겠지?
그래도 해야 하는데.
천하제일인인데.
엄마를 들먹여서라도 어떻게든 낭만개 아저씨한테 무공 전수를 받아야 하는데 말이다.
아빠라는 말은 입에 잘 안 붙고.
아니, 잘 안 나온다.
낭만개 아저씨를 만나면 더 안 나올 텐데.
걱정이다.
그렇게 복잡한 머리로 하남 신양(信阳) 황천(潢川) 분타에 도착했다.
내 집이다.
비걸개 되려고 여덟 살 때 떠나 처음 돌아오는 고향, 집.
우르르르르르.
꼬맹이 거지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우르르 몰려든다.
"아저씨 누구세요?"
"아저씨 아니고 형이야."
"네, 아저씨. 그런데 누구세요?"
이 거지 녀석들이!
"낭만개 분타주는?"
"몰라요. 먹을 거 주면 가르쳐 주지."
"그걸 구걸이라고 하는 거냐? 너 매일 굶겠다."
"안 굶는데? 나 매일 배 빵빵한데?"
"그래, 너 잘났다. 그래서 낭만개 분타주 어디 갔냐고?"
"먹을 거 주면 말해 준다니까."
"없어! 봐 봐. 없잖아. 그러니 알려 줘. 알려 주면 이따가 사다 줄게."
"쳇! 한두 번 속나.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얘들아, 가자! 이 아저씨 쥐뿔도 없는 거지다."
헐!
거지는 자기들이 거지면서, 나한테 거지래.
뭐, 나나 자기들이나 다 거지긴 마찬가지지만.
"태한이냐?"
누군가 나를 알아봤다.
어른 거지다.
"누구… 허걱! 왕삼이 아저씨!"
"오! 태한이 맞구나! 나태한."
"네, 아저씨."
"어서 오거라. 와! 이게 얼마 만이냐? 응? 무걸개 된다고 떠나더니 신수가 훤하구나. 진짜 무걸개가 된 거냐?"
"비슷해요. 총타에서 일하고 있어요."
"누가 왔어?"
"다들 나와 봐! 태한이가 왔어!"
"태한이가?"
"정말 태한이가 왔어?"
더러운 움막 이곳저곳에서 거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11년이나 지났지만, 한눈에 나를 알아보고 크게 반겨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건……."
"그래, 맞다. 너와 네 어머니가 함께 쓰던 움막. 낭만개 분타주가, 네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매일 쓸고 닦고. 하여간 거지가 무슨 청소를 매일 한다고. 하하. 들어가 봐라. 네 어머니가 꾸미고 네가 쓰던 상태 그대로 변한 게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눈물이 찔끔 났다.
더러운 움막 사이로 유독 깨끗한 움막 하나.
엄마와 쓰던 그 상태 그대로다.
움막 안도 내가 이곳을 떠나던 여덟 살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낭만개… 아니, 아빠.
우리 아빠를 당장 만나야겠다.
"분타주 어디 있어요?"
"그것도 11년 전이랑 똑같아. 왜 있잖아. 너희 어머니를 처음 만난 그곳. 거기서 구걸을 하는 건지 잠을 자는 건지. 매일 해만 뜨면 그곳으로 간단……. 엇! 태한아! 조금 있으면 돌아올 텐데 뭘 네가 직접 가? 어라? 벌써 갔네?"
* * *
그곳에 그가 있었다.
나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와 내가 추위와 굶주림에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던 곳이라 했다.
그런 우리 모자를 낭만개가 거두어 줬다.
거지가 됐음에도 구걸을 면하게 해 주고.
생각해 보면 정말 많은 배려와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낭만개다.
무엇보다, 이 인간.
엄마와 나한테 진심이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진심인 사람이다.
이 정도면 아버지라 불러도 되지 않겠는가?
나는 사람이 드문드문 오가는 길거리 한쪽, 양지바른 곳에 멍석을 깔고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낭만개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움찔한다.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몸을 돌려 나를 본다.
눈이 마주쳤다.
동공이 크게 떨리는 낭만개.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나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이제… 이제 그를 목놓아 불러야겠다.
"태한아. 돌아…왔구나."
"네, 아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