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바람이 되어.
어둠이 되어.
스으윽.
한 놈 한 놈.
사람이 아닌 악마들의 목을 그렇게 일일이 땄다.
주저하던 걸십칠번도 어느새 산채로 뛰어들어 은형술을 극대화한 채 악마들의 숨통을 끊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산적들의 목을 따 버렸다.
그러나…….
"죽, 죽었어! 침입자다! 침입자다! 으아악!"
오줌이 마려워 눈을 뜬 어떤 산적 놈이 다른 산적 놈들의 죽음을 봤나 보다.
곧이어…….
둥둥둥둥!
"침입자다!"
둥둥둥둥!
"침입자를 찾아 죽여라!"
산채 이곳저곳에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산적들이 도끼 하나씩을 들고 빠르게 움막을 빠져나왔다.
산적 두목 놈까지 한 손에 거대한 청룡언월도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쉬이이이익.
슥삭!
툭.
놈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목이 베여, 곧 놈의 수급이 바닥으로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놈에게 과분하게 편안한 죽음을 선사해 준 것이다.
"저기! 저기다! 놈이 두목을 죽였다!"
"으아아아아악!"
"도망가지 말고 죽여! 놈은 하나다!"
"여기도 있… 으악!"
부두목으로 보이는 놈이 산적들을 다그쳤지만, 소용없었다.
두목이 죽고, 또 이미 절반이 넘는 산적들이 죽은 마당.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산적들은 도끼까지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한 놈도 살려 줄 수 없다.
목숨의 값은 목숨으로 받는 게 정의다.
난 곧바로 몸을 날려 산채의 입구로 향했다.
생각 없는 산적 놈들이지만, 토벌군을 대비한 준비만큼은 철저히 해 놨다.
토벌군이 산채를 포위하지 못하게, 주변이 모두 절벽인 천연의 요새에 산채를 지어 놓았다.
산채를 공격하려면 외길로 와야 하고, 덕분에 도망가려고 해도 외길뿐이다.
나는 산적 놈들의 머리를 밟고 나아가, 그 외길을 막아 버렸다.
그다음은…….
이를 악물었다.
피와 살점이 내 눈앞에 흩날렸지만, 흐트러지지 않았다.
검을 더 강하게 쥐고 돌진, 돌진, 돌진.
놈들의 목을 모두 따 버렸다.
* * *
산적들이 모두 죽었다.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난 곧바로 걸삼번에게 갔다.
자신이 갇혔던 움막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밖에 우두커니 서 멍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사이 피를 뒤집어쓴 걸십칠번까지 왔고.
"걸삼번, 괜찮아?"
걸십칠번이 걸삼번에게 물었다.
"어? 어. 어. 난… 난… 미안."
걸삼번은 무사했다.
특별히 다친 곳도 없어 보인다.
내가 둘을 향해 말했다.
"일단 여인들을 구해서 시체가 없는 곳으로 이동시켜. 놀라지 않게."
"너는?"
"곧 따라갈게. 일단 움직여. 걸삼번!"
여전히 멍한 얼굴의 걸삼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 어. 아! 미안. 미안해."
"정신 차려. 너보다 상황이 더 심각한 여인들이 있어! 도와야 할 거 아니야."
"알았어, 미안."
곧 걸십칠번과 걸삼번이 여인들이 갇힌 움막으로 향했고.
나는 산채의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목 놈의 통나무집에서 상당한 양의 돈과 금은보화를 찾을 수 있었다.
하나도 빠뜨릴 수 없다.
다른 산적들 움막까지 샅샅이 수색했고, 두목의 거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양의 은자를 거둘 수 있었다.
한 시진가량 산적들의 움막을 몇 번이고 뒤진 후에야 나도 걸십칠번과 걸삼번이 여인들을 보호하고 있는 장소로 움직였다.
* * *
산적들의 산채에서 오십 장가량 떨어진 표호산의 어느 공터.
그곳에 걸십칠번과 걸삼번 그리고 열다섯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 우리가 개방의 방도라고 말했지만, 너무 놀랐나 봐. 계속 이 상태야. 어쩌지?
걸십칠번이 말한 그대로다.
여인들은 극심한 두려움에 한데 모여 서로를 얼싸안고 덜덜 떨고만 있었다.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저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여인들이다.
그간 악마 새끼들이 이 여인들에게 저질렀던 일이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을 것이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개방의 방도입니다."
대꾸가 없다.
여전히 극도의 경계와 극심한 두려움에 떨며 날 볼뿐.
"산적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어요."
여전히 대답이 없다.
하지만 여인들도 용기를 내야 한다.
그들의 심정과 상태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중요한 문제다.
"힘들어도 여러분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첫째. 하루 이틀이 지나면 관과 인근 무문에서 이곳으로 올라올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들에게 지금껏 산적들에게 당했던 일들을 모두 말한 후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던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내가 한 말로 인해 여인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 때문일까?
아니다.
그 후의 일들이 어떻게 될지 그녀들도 알기 때문이다.
나쁜 짓은 찢어 죽일 산적들이 했지만, 이 빌어먹을 인간 세상은 언제나 피해자인 여인들을 향해 손가락질해 댄다.
겉으로는 위로하고 응원하지만, 뒤에서 그들의 수군거림은 2차 가해고 끔찍한 고통일 수밖에 없다.
이를 알기에 여인들이 두려움 속에서도 이를 악물며 눈물을 흘려 대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순간 여인들의 떨림이 뚝 하고 멈추었다.
나를 보는 그녀들의 눈동자에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우두두두두.
난 산적들의 산채에서 쓸어 담아 온 돈과 보물들을 보따리를 풀어 땅에 쏟았다.
상당한 양이다.
조금 전까지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어 댔던 여인 중 몇몇은 놀라움에 토끼 눈이 됐다.
"두 번째 방법은 이걸 나누어 가지시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개방의 고수들이 여러분이 집까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 은밀히 호위해 드릴 것입니다."
여인들의 떨림은 이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여러분들께서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이곳 산채를 통째로 불에 태워 없앨 겁니다. 처음부터 이런 산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여러분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다. 그저 이곳 표호산에서 길을 잃어 헤맸고, 그러다 돈까지 주워 집으로 가는 행운을 얻은 것이지요. 산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흑흑흑."
"엉엉엉엉."
"어어엉. 엉엉."
여인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이는 곧 거대한 곡소리로 변해 버렸다.
그녀들이 땅을 기어 나에게 왔고.
내 발과 다리를 잡고 울고 또 울고, 울었다.
나도 함께 그녀들과 울었다.
아무 일도 없길, 아무 일도 없었으니 계속 평범하게 살아 주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 * *
여인들은 당연히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시간이 좀 걸렸다.
그녀들은 오랜 시간 산적들에게 당한 정신적 충격이 뼛속까지 박혀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두려움에서 극복할 수 있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어야 했다.
또 걸십칠번이 인근 마을을 빠르게 돌며 괜찮은 거지들을 찾아 데리고 오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놀란 여인들을 위해 배려심이란 게 뭔지 아는 거지여야 했고.
당연히 무공도 한 자락 할 수 있는 거지를 골라 데리고 와야 했다.
최소한 일결제자여야 하는데.
일결제자가 중원 전역으로 따지면 수십만 명이 되지만, 이렇게 꼭 필요할 때 찾으려면 쉽지 않은 게 또 일결제자다.
뭐, 그건 걸십칠번이 알아서 잘할 테고.
"개한테 한 번 물린 거예요. 아셨죠?"
"네, 대협."
"산에서 길을 잃었다가 악몽을 꾼 거고요. 아셨죠?"
"네, 대협."
"거기, 아줌마! 졸지 말고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대협! 나, 아줌마 아니에요."
"호호호."
"큭큭큭."
이틀이 지났을 때, 여인들은 이제 제법 해맑게 웃기까지 할 수 있었다.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어쩌면 이들 중 누군가는 이곳에서의 끔찍했던 기억 때문에 힘든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게 될 수도 있고.
그게 다른 여인의 가족들 귀에까지 들어가는 게 걱정이지만.
괜찮다.
누가 믿겠나?
어린 거지 한두 녀석이, 도끼를 든 우락부락한 산적 100명을 한 시진도 안 되어 몰살시켰다면 말이다.
아무도 안 믿을 테다.
그걸 떠나, 그냥 여인들이 오늘처럼 매일 웃으며 살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 * *
"다 도착했네?"
"휴우. 힘들었다. 제대로 된 일결제자가 이렇게 없다니. 아무튼 한 사람당 두 명의 방도가 은밀히 호위해 줄 거야. 타구봉법 실력도 괜찮고, 거지치고는 점잖고 배려심도 많은 거지들이라 여인들도 놀라지 않을 거야."
"수고했다, 걸십칠번. 끝까지 잘 부탁한다."
"……."
걸십칠번이 눈을 껌뻑껌뻑 뜨며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왜 안 가? 방금 작별 인사까지 했잖아."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걸십칠번이 고개까지 들이밀며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내 얼굴을 마구 쥐어뜯는 게 아닌가.
"뭐 해?"
"인피면구 쓴 거 아닌가 해서."
"내가 인피면구를 왜 써?"
"하아! 너 진짜 걸이번 맞구나.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자식! 몇 번을 말하냐? 내가 우리 비걸개 수석 수료생이라고. 그거 운만으로 되는 거 아니다. 하하."
"그래, 녀석아. 이젠 나도 인정한다. 사실 꿈에서도 네가 수석이란 거 인정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젠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미친놈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
"고맙다."
"뭐가? 갑자기 왜 이래? 남사스럽게."
"사실 나도 그래야 하는 거 알았어. 총타에 보고하는 것보다 우리가 움직여야 하는 거. 그런데… 그때 솔직히 좀 쫄았다. 하아! 근본도 없는 산적 따위에게 겁먹은 비걸개라니. 내가 다 한심하다."
"아니야,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어."
"넌 아니잖아."
"난 수석이잖아."
"미친놈. 큭큭."
"하하하."
"아무튼 고마워. 네 덕분에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비걸개가 돼야 할지 제대로 깨달았어. 두고 봐라. 다음에 나를 다시 만나면, 오늘과는 완전히 다른 내가 되어 있을 테니까."
"그래, 꼭 기대하고 있으마. 그리고 이번엔 진짜 좀 가라. 여인들 기다리잖아. 끝까지 호위 잘 부탁하고."
"그래 간다, 걸이번! 너도 무운을 비마!"
걸십칠번이 떠났다.
여인들도 거지들의 호위 속에 두둑한 전낭 하나씩을 들고 떠났다.
* * *
화르르르르르르르.
표호산의 산채는 엄청난 불길에 휩싸였다.
"걸이번, 다했어. 헤헤."
산채가 흔적도 없이 다 타도록 이곳저곳 골고루 불을 지른 걸삼번이 내 곁으로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안 씻어서 더러웠던 녀석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 새까만 숯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이리와 앉아."
걸삼번 녀석과 표호산 산채가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나란히 앉았다.
"헤헤. 헤헤."
녀석이 웃는 건 거의 습관과도 같다.
왜인지는 예전에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걸삼번, 비걸개 그만두는 거 어때?"
"헤헤. 헤헤."
"헤헤거리지 말고 대답을 해. 내가 육 장로님께 말해서 안전하고 괜찮은 무걸개 자리로 옮겨 달라고 부탁해 볼게."
"헤헤. 헤헤."
녀석이 대답은 하지 않고, 또 헤헤거리며 머리만 긁어 댄다.
비듬이 많이 날린다.
"야! 걸삼번. 그만 웃고 대답하라고. 너도 알잖아. 네 녀석이 비걸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너 이번에 진짜로 죽을 뻔했어. 그러니까 비걸개 그만두고, 무걸개 중에 안전한 자리로 옮겨."
언성을 조금 높였다.
다그치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헤헤거리기만 하던 걸삼번 녀석이 웃음을 뚝 그쳤다.
"너 많이 변했어. 그날 후공마 안두창을 물리친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
"그 말이 갑자기 왜 나와? 지금 네 문제를 말하고 있잖아, 새끼야! 너 이러다 죽어! 죽는다고! 너도 네 능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잖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내 말 들어. 내가 어떻게든 무걸개 자리 중 최대한 안전한 자리로 알아봐 줄 테니까."
말이 좀 심했나?
걸삼번 녀석이 처음 보는 차가운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넌 되고 나는 왜 안 되는데?"
"어? 뭔, 뭔 소리야!"
무슨 말인지 안다.
그런데 당황해서 그만 나도 모르게 또 소리를 질러 버렸다.
"나……."
"……?"
"일부러 잡힌 거야. 산적들에게."
걸삼번 이 녀석.
이 녀석도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