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41화 (40/174)

41화

"걸삼번?"

"응, 걸삼번. 네 절친. 네 단짝."

아놔!

내가 왜 바보탱이 걸삼번이랑 절친이고 단짝인데?

기분 나쁘게.

은혜고 뭐고 그냥 확 가 버릴라.

"걸삼번이 왜 내 절친이야?"

"너희 언제나 뒤에서 1, 2등이었잖아. 같은 조였고. 얼굴도 가만 보면 닮았어."

"나 수석이다, 걸십칠번."

"큭. 그래, 그래. 일단 좀 도와라. 한 손이 부족하다."

"됐어. 나, 갈래."

"야! 농담 좀 한 거로 너무 진지하게 그러지 마라."

"휴우. 한 번만 더 걸삼번이랑 절친이니 단짝이니 그딴 소리 해 봐. 뒤도 안 돌아보고 갈 테니까."

"알았다. 일단 앉아라."

걸십칠번이 급하긴 많이 급했나 보다.

나에게 이렇게까지 친한 척한 적이 없는데.

어쩌면 훈련생이 아닌 무림, 그것도 낯선 환경에서의 만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왜, 애국심이라고는 일도 없는 녀석들이 새외로 나가서 같은 민족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고 하지 않던가.

뭐, 비슷한 것 같다.

나도 사실 많이 반가웠고.

"그런데 구출 작전은 무걸개가 하는 거 아니야? 왜 네가 이러고 있어?"

"육 장로님 지시야."

"상취개 육 장로님?"

"응, 아마 다른 장로님들한테 쪽팔려서 그런가 봐."

"아! 그러기도 하겠다. 명색이 비걸개란 녀석이, 근본도 없는 산적들한테 인질로 잡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니. 무걸개 동원하려면 다른 장로님들한테 부탁해야 할 테고. 어지간히도 쪽팔렸나 보다. 그래도 너 혼자는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인근 개방 분타에 거지들을 소집하고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줬어. 그런데 네 눈으로 직접 봐 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쉬고 있는 거지들.

대부분 누워 있다.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이나 벼룩을 잡는 거지들도 있고.

"제대로 무공을 익힌 거지가 없네."

"응, 괜히 데리고 갔다가 피해만 더 커질 것 같아서."

"다른 비걸개들은?"

"나도 급히 여기로 왔어. 다들 바쁘겠지. 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텐데, 그때까지 걸삼번 녀석이 살아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잖아."

"빨리 움직여야겠구나."

"응, 당장 움직여야 해."

"가면서 얘기하자."

"괜찮겠어?"

"나 수석이야, 걸십칠번."

"휴우, 그래. 손이 부족해서 네게 부탁했지만,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지 모르니까. 넌 나서지 마. 그냥 망만 잘 봐 줘. 걸삼번은 내가 알아서 구할 테니까."

"새끼, 일단 가자."

"그래."

* * *

원래 근본 없는 애들이 더 무서운 법이다.

왜?

잃을 것도 없고 내일도 없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오늘 사람을 죽이면 내일 관아에 잡혀가 사형을 당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못 하는 인간들이다.

머리를 장식쯤으로 생각하는 놈들 말이다.

이놈들은 언제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래서 더 무서운 법이다.

왈패, 흑도, 사파.

이 세 부류가 그렇게 갈린다.

왈패는 생각 없이 그냥 몰려다니며 나쁜 짓거리 하다가 잡혀가서 혼나고, 다시 풀려 나오면 또 똑같이 나쁜 짓 하고.

그러다 비명횡사하는 게 왈패다.

계속 강조하지만, 생각이란 게 없기 때문이다.

흑도는 왈패보다 좀 낫다.

생각도 하고, 몰려다니며 하는 나쁜 짓도 꽤 체계적으로 한다.

심지어 상당한 무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럼 흑도와 사파는 뭐가 다르나?

역사나 규모 등등 많은 것에 차이가 있지만, 무엇보다 명예다.

사파는 나쁜 놈들이라고 해도 명분 없는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

뒤에서 하더라도 대놓고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의와 협을 외치며 좋은 일을 하는 사파의 햅객들도 꽤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파를 존경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사파의 무인들은 광명 아래 활보할 수 있지만, 흑도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조직적으로 나쁜 짓을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만나러 가는 놈들은 사파도 흑도도 아닌 왈패다.

근본 없는 산적들.

생각도 없는 산적들.

그래서 더 무섭다.

물론 놈들은 약하다.

생각 없는 놈들이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는가?

성질만 더럽고, 머리와 능력이 받쳐 주지 않기에 왈패인 것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걸삼번 녀석, 살아 있어야 하는데.

- 신법과 은형술이 몰라볼 정도로 늘었는데?

은형술과 신법을 동시에 펼치며 빠르게 이동하는 걸십칠번 녀석의 뒤를 바싹 따라 움직였다.

나를 시험하려는 것인지, 녀석이 중간중간 속도를 갑자기 올리기도 했지만, 우스웠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후 놈이 슬쩍 뒤를 보며 나에게 전음을 보낸 것이다.

- 수석이라니까. 몇 번을 말하냐?

- 응, 그래. 수석. 알았다.

- 그나저나 정말 아무런 정보도 없어? 산적 놈들.

- 아까 이곳 분타 거지들에게 받은 정보에 의하면, 놈들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게 얼마 안 됐데. 그런데 그사이 많은 이들이 실종되고 시체로 발견되고 그랬데.

- 놈들이 한 짓이네?

- 그럴 가능성이 높아. 그런데 아직 목격자도 없고, 현장을 잡지도 못했어. 놈들의 산채를 관아나 인근 무문에서 토벌한 적도 없어서, 확실히 놈들이 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

- 그놈들 맞는데, 뭐.

-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 악질이네. 몇 명이나 죽였대? 실종자는?

- 발견된 시체는 몇 구 안 되는데, 석 달 사이 100명 넘게 실종됐대. 다 놈들의 산채가 있는 표호산 근처에서 실종됐어.

- 걸삼번도?

- 응,임무를 수행하러 표호산을 넘다가 사라졌대.

- 하아! 녀석도 진짜 가지가지 한다. 그래도 명색이 비걸개인 녀석이.

- 됐어, 정확한 상황을 모르니 너무 탓하지 말자. 그래도 우리 동료인데.

- 그래, 일단 가 보자. 그래도 걸삼번 녀석이 명줄은 엄청나게 길어서 살아 있을 거야. 우리 비걸개 훈련할 때도 그랬잖아. 떨어질 만하면 붙고, 떨어질 만하면 붙고.

- …….

- 왜 말을 안 해?

- 응, 네가 방금 했던 말. 나랑 다른 비걸개들이 너를 두고 했던 말 그대로야.

젠장!

* * *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그 산적들의 산채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근본 없는 산적들이라고 해도, 개중 어떤 고수가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일단 날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어둠이 까맣게 내리고.

나와 걸십칠번은 산채에 바싹 다가가 정황을 살폈… 아!

곧바로 발견했다.

가장 시끄러운 곳에 걸삼번 녀석이 살아 있었다.

"차렷!"

"넵! 헤헤."

옷을 홀라당 벗은 걸삼번이, 댓 명의 산적들에게 둘러싸여 차렷 자세를 했다.

"웃지 마."

"넵! 헤헤."

"하하하! 이 새끼는 볼 때마다 웃기네. 야!"

"넵! 헤헤."

"춤춰 봐."

"넵! 헤헤."

"춤추라고! 노래도 부르면서."

"넵! 헤헤. 한 입 주쇼, 두 닢 주쇼. 먹던 거도 좀 주쇼. 랄랄라. 씹던 것도 좋으니, 나에게 나눠 줍쇼. 똥꼬에 낀 콩나물은 나에게 남겨 줍쇼. 랄라."

"하하하하!"

"크하하하하!"

걸삼번의 춤과 노래 사위에 산적들이 몇 명 더 몰려들었고, 그들은 배꼽을 잡고 바닥을 구르며 웃어 댔다.

"그만."

"넵! 헤헤."

"이번엔 음… 그래. X새끼 교미 자세."

"넵! 헤헤."

발가벗은 걸삼번이 마치 개처럼 그렇게 바닥에 엎드렸다.

"교미 시작! 발정 난 수캐의 울음소리까지!"

"넵! 헤헤. 하악하악! 학학! 하악하악! 학학!"

"으하하하하!"

"와! X새끼랑 똑같아! 짖어! 짖으라고! 하하하!"

"멍! 멍멍! 으르릉. 멍멍!"

아마도 녀석은 저래서 살 수 있었나 보다.

하지만, 보는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당장에 저놈들의 목을 모두 베어 버리고 싶다.

그리고 걸삼번 저 새끼.

비걸개 그만두게 하고 무걸개 쪽에 안전한 자리 하나 알아봐 줘야겠다.

- 걸십칠……. 어? 이 새끼는 또 어디 간 거……. 야! 거기서 뭐 해?

- 어서 이리 좀 와 봐!

삼십 장의 거리를 단숨에 점해 걸십칠번 곁으로 갔다.

그리고 아!

어려 보이는 여인이 열세 명.

- 실종된 여인들 같아. 아무래도 오랜 시간 이곳에 잡혀 놈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나 봐.

- 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악질인 산적들이다.

- 이게 끝이 아니야. 따라와.

내 대답도 듣기 전에 걸십칠번이 은밀히 움직였고, 난 녀석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곳.

산적들의 산채 뒤편에 커다란 구덩이가… 젠장!

시체가 몇 구인지 셀 수 없다.

쌓이고 쌓여 그 커다란 구덩이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 산적 새끼들, 죽여야 한다.

모두.

- 일단 걸삼번 녀석부터 구한 후 빠르게 산에서 내려가자. 곧장 총타에 보고하고, 인근 무문과 관아 그리고 가까운 무림맹 지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해. 토벌군을 만들어 최대한 빨리 이곳 산채를 소탕하고 여인들까지 구해야겠어.

걸십칠번 이 녀석.

내공이 나의 4분지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작 40년 치가 전부다.

그런데.

내가 발견하지 못한 걸 모두 발견했다.

그것도 순식간에.

아마 내가 후공마 안두창을 처치하지 못했다면, 이 녀석이 지금의 수석이었을 테다.

뛰어난 녀석이 분명하다.

나는?

걸삼번 녀석의 비참한 모습 때문에 너무 흥분했나?

아니다.

핑계다.

비걸개는 분명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냉철함을 유지하게 훈련받았다.

탐색, 경계, 의심, 수색 등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숨을 쉬듯 자연스레 유지해야 하는 비걸개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걸 놓쳤다.

비걸개의 기본이 안 됐다는 뜻이다.

소인국에 이어 칵뉴족까지 다녀와서 내 비걸개 능력치가 더 떨어진 건가?

아니면, 애초에 나는 비걸개가 적성에 맞지 않았던 걸까?

휴우.

일단 사람들부터 구하고 보자.

- 산적들이 잠이 들면, 걸삼번을 구하자. 걸이번?

- 걸십칠번.

- 응, 말해.

- 정확히 육 장로님이 네게 내린 지시가 뭐야?

- 걸삼번을 구하라는 지시.

- 그 외 조건은? 살상을 금지한다든지, 무공을 숨기라는 수칙 같은 건 없었어?

- 없었어. 그건 왜?

- 하루만 더 지켜보자.

- 왜? 빨리 총타에 보고해서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 필요 없어.

- 뭔 소리야?

- 하루만, 딱 하루만 더 지켜보자. 저 새끼들… 모두 죽여도 되는 놈들인지 하루만 더 지켜보고 결정하게.

* * *

하루를 더 지켜봤다.

아무리 악인들이라 한들, 그들을 심판할 권한은 내게 없다.

하지만 해야 한다.

신이 하지 않으면, 나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살피고 살폈다.

그렇게 하루가 다시 지났고.

한 명이 더 죽었다.

열세 명인 줄 알았던 여인은 총 열여섯 명이었다.

내가 산적들을 지켜보는 사이, 그중 나이가 가장 어린 소녀가 산적들의 끔찍한… 개새끼들.

소녀는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이제 여인들은 열다섯 명 남았다.

더 볼 필요도 없다.

이미 해는 졌다.

산적들도 대부분 잠이 들었다.

- 지금 움직인다.

- 진심이야, 걸이번? 아무리 놈들이 근본 없는 산적이라도 숫자가 100명이 넘어. 그리고 너도 분명하게 봤잖아. 개중에는 꽤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 놈들이 있다고. 특히 산적 두목 녀석은 쉽지 않아. 분명 어디서 사고를 치고 산적으로 둔갑해 이곳에 숨은 고수일 거야. 우리 둘이서는 무리야!

- 둘? 아니야. 나 혼자 한다. 넌… 망만 잘 봐.

나는 걸십칠번에게 그 말만을 남기고 산적들의 산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소인장기공과 은형술을 극대화했다.

내 몸은 바람이 됐고 어둠이 됐으며, 곧 그대로 자연과 동화되어 놈들의 숨통을 끊으러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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