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한 대 칠까?
이 장로 무치개를?
그건 아니지.
아무리 내가 지상 최강의 전사가 됐어도, 상대는 무치개.
방귀 한 방으로도 날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험.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성을 높였다.
"아니, 이 장로님!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새아빠 타령입니까? 그리고 말은 정확히 해야지.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재혼도 하지 않으셨… 어? 어? 설, 설마……?"
무치개가 나를 보며 여전히 그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껌뻑껌뻑했다.
나는 나 나름대로 놀라 눈을 껌뻑껌뻑.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고, 무치개가 대신 말했다.
"혼인식을 치르는 거지는 없다. 그냥 함께 살면 그게 부부지. 나는 분명 네 어머니와 네 새아버지가 신양 황천 분타에서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인간!
때릴 수는 없고.
아니다!
우리 엄마와 낭만개 아저씨는 아무런 사이도… X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저 인간.
무치개 저 인간이 말한 천하제일인이 진짜로?
진짜로 그 실없는 낭만개라고?
진짜?
진짜로?
아니다.
그럴 리 없어.
그 인간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매일 먹고, 자고, 싸고, 누워 있고, 그러다 우리 엄마만 보면 찬밥 한 덩이 들고 헤헤거리며 졸졸 따라다니는.
정말 한심함의 극치를 보여 주던 그런 인간인데!
그런 인간이 천하제일인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이번엔 언성을 조금 높이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가 싶더니…….
"일단 앉자."
의자 없다.
응, 그냥 마주 보며 땅바닥에 앉았다.
심장이 여전히 터질 것 같았지만,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무치개의 표정과 분위기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보통은 칠룡사봉이라고 하지. 간혹 팔룡삼봉이니 구룡칠봉이니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칠룡사봉이야. 그렇지?"
갑자기 칠룡사봉은 왜?
대꾸하지 않았지만, 이 장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무림 후기지수 중 최고를 일컫는 말. 우리 개방에서도 줄곧 칠룡사봉에 이름을 올렸지. 하지만……."
뭔 소리를 하려는 거야?
"하지만 그중 최고라는 칠룡사봉의 수좌. 살아남기만 한다면 열에 서넛은 기필코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노려 볼 수 있다는 칠룡사봉의 수좌 말이다. 우리 개방에서는 그 수좌 자리를 1,000년 동안 한 번도 차지한 적이 없었다."
"설마……."
"응, 아니다. 끝까지 들어라."
"……."
"1,000년 동안 열에 다섯은 소림, 무당, 남궁이 차지했지. 나머지는 다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몇백 년에 한 자리씩 차지했고, 정말 가뭄에 콩 나듯 구파와 오대세가가 아닌 곳에서 걸출한 인재가 나와 차지했었고. 하지만 우리 개방은 없었다. 내가 있기 전까지는."
자랑하는 건가?
"내가 무림에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 우리 개방은 언제나 칠룡사봉에서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다. 왜 무림 영웅전 보면 주인공 졸졸 따라다니며 도움 주는 역할 있잖아? 계속 그래 왔다."
자랑인데?
"이 장로님께서 젊은 시절 칠룡사봉의 수좌였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다."
"자랑하시는 거예요?"
"아니다."
자랑 맞는데?
"난 그 어린 나이에 소림사의 방장도 만났고, 무당파의 장문인도 만났으며, 남궁세가의 세가주와는 독대도 했다. 우리 개방에서는 어떻겠느냐? 1,000년 만에 나온 칠룡사봉의 수좌인 나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구변단도 수십 알이나 복용했다. 무서울 게 없었고, 두려울 게 없었지."
그런데 왜 지금 여기 처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는 거지?
"기고만장했지. 교만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
아파?
무치개가?
호랑이가 아니라 용도 때려잡을 것처럼 생겼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날, 그놈을 만났다."
그놈?
아! 낭만개 아저씨를 만난 거구나.
"나만 보면 굽실대기 바빴던 다른 거지들과 달리 놈은 눈치며 코치며 아무것도 없었어.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데다, 아무리 거지여도 형편없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거지가 원래 그래야 거지 아닌가?
그냥 딱 거지의 표본인데?
"나를 무시하더군. 나이도 어린 놈의 새끼가, 모두가 나에게 굽실대고 있는데도, 눈길 한번 안 줬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단 말이군.
"뭐, 그런 거에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내가 한심한 놈은 아니었다."
응, 자존심 상했어.
딱 봐도 보여.
"그런데 이 녀석이 하라는 구걸은 안 하고 여자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거야. 그래서 한 마디 해 줬지. 물론 살짝 겁을 주기 위해서 힘도 조금 쓰려 했었고. 그리고 그날 비가 왔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
"먼지가 나더라.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져 온몸이 홀딱 젖었는데, 그놈이 때리니까 실제로 먼지가 났어. 내 몸에 덕지덕지 말라붙었던 먼지와 때가 펄펄 눈처럼 날리더라. 새하얗게."
"맞, 맞은 거예요? 낭만개 아저씨한테?"
무치개가 아주 살짝 감정 표현을 했다.
처량한 얼굴.
무시무시하게 생긴 얼굴로 어찌 저런 처량한 표정을 지을 수 있나 싶었지만, 실제 그렇게 보였다.
그 얼굴로 고개를 두 번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무섭게 때리더라. 아팠다. 몸도 아팠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그때까지 내가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정말 아팠다. 놈의 구타가 멈춘 후에도 나는 일어설 수 없었다.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
"낭만개 놈은 쓰러진 나를 뒤로하고 그냥 가 버렸다. 난 그러고도 한참이나 비를 맞으며 울었다. 내 눈에서 나는 눈물인지, 하늘에서 쏟아진 비 때문인지. 그날 정말 많이도 흘렸다. 그날부터였다. 내가 이곳으로 와 은거하고, 또 사람들이 나를 무치개라고 부른 것이."
아! 조금 혼란스럽다.
낭만개 그 실없는 인간이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생긴 무치개를 때렸다는 것도 믿기 힘들고.
무치개가 무공(무, 武)에 미친(치, 痴) 거지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낭만개 때문이라고 하니.
이걸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
무치개가 나를 상대로 거짓말할 리는 없는데.
툭 건들면 울 것 같은 얼굴을 보니,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 진짜 비렁뱅이 낭만개가 그랬다는 게, 아!
돌겠네.
"잠깐만요, 이 장로님. 천하가 주목하던 칠룡사봉의 수좌였던 이 장로님께서 무명의 젊은 거지에게 두들겨 맞았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요?"
"본 방의 가장 큰 힘이 너는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아! 정보……. 소문을 차단했군요. 그래도 보는 사람이 많았다면, 그 입을 다 막기는 힘들었을 텐… 아! 맞다. 혹시 그 자리에 상취개 육 장로님도 있었어요?"
"나와 낭만개를 제외하고 자리에는 정확히 여섯 명의 거지가 더 있었다. 지금 본 방의 방주님과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의 장로가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였어.
그랬던 거였어!
이제야 당시 육 장로의 반응이 이해됐다.
아니, 우리 방에서 무당제일검이라느니 화산제일검이니, 다른 문파와 달리 최고수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 이유!
누가 봐도 무치개가 최고수인데, 그걸 사실이라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까지!
이제 다 이해가 간다.
발표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발표할 수 없었던 거야.
낭만개가 있으니 이 장로 무치개가 최고수라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육 장로에게 낭만개에 관해 물었을 때 딸꾹질까지 하며 두려워했던 건, 설마?
"육 장로님께 낭만개 아저씨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딸꾹질까지 하고 두려운 기색을 보이며 답을 피하더군요. 낭만개가 무서워서 그랬었나 봐요."
"아니, 그건 아니야. 상취개 녀석은 나를 무서워해서 답을 피했을 거야. 그 사실이 알려지면, 내가 또 무슨 X랄을 할지 모르니까. 낭만개 녀석에게 무참히 깨진 그날 이후, 그 화를 지금 방주님하고 장로들에게 많이 풀었거든. 특히 상취개 녀석이 나에게 많이 맞았지."
"아… 네. 네."
상취개 육 장로가 낭만개에 대한 언급을 피했던 건 이 장로 때문이었구나.
잠깐!
낭만개에 대해서는 비걸개 후보생 당시 총교두와 교두들도 알고 있었다.
총교두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었다.
‘쯧쯧. 그런 시골에서 그렇게 썩을 사람이 아닌데. 휴우.’
서안 분타의 심안개 역시 낭만개에 대해 알고 있었고.
낭만개에 관련한 정보는, 일반 거지들에게 알려 줄 수 없는 상급의 정보라는 느낌까지 그에게서 받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 낭만개에 대해 분명 호의적이었다.
마치 ‘개방의 전도유망했던 거지가 지금 시골인 황천 분타에서 썩고 있는 게 안타깝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문을 완벽히 차단하지는 못했나 보군요."
"그렇다. 아무리 본 방이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무엇보다 처음 낭만개의 존재가 알려진 후 방에서는 은밀히 많은 지원을 그에게 해 주었다. 우리 연배에서도 제법 고수 축에 끼는 거지들은 낭만개의 존재에 대해 알 테다."
결국 그렇게 된 거였어.
이제까지 엉킨 실타래처럼 이해되지 않았던 게 다 풀린 느낌이다.
"장로님, 궁금한 게 또 생겼어요. 그처럼 대단한 낭만개 아저씨… 아니, 낭만개 분타주는 왜 지금 그러고 있는 거예요? 변두리 시골의 분타주에, 심지어 일결제자예요."
"그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 그도 지금 그러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으려나?"
"무슨 사건요?"
"그 녀석이 원래부터 말을 잘 안 들었어. 언제나 제멋대로였지. 방에서 집중 지원과 관리를 시작한 후에도 놈은 변하지 않았지. 전대 방주님께서 그런 놈을 몇 번이나 직접 찾아가 설득하기까지 했었다. 아무튼 말은 죽어라 안 듣고, 고집은 지랄맞게 센 녀석이, 결국……."
"여자를 좋아하게 된 거군요?"
"어떻게 알았냐?"
"그냥. 그냥 감이요. 이름이 낭만개잖아요. 우리 엄마 뒤꽁무니 졸졸 쫓아다닐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요."
"아무 여자나 좋아하고 그렇진 않단다. 만약 그랬다면 낭만개가 아니라 발정개나 난봉개라고 불렸겠지."
"음… 네."
"한 번 사랑에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해.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사랑 때문에 생긴 사건이군요?"
무치개가 고개를 끄덕인 후 답했다.
"당시 낭만개의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렸지. 녀석이 사랑에 빠진 여인은 열아홉 살이었다."
"딱 좋은 나이네요."
"하지만 여인은 이미 혼사가 정해져 있던 몸이었어. 그런데도 놈은 그녀를 사랑했지. 아니, 그 이야기를 듣고 미친놈처럼 더 그녀에게 집착했다."
우리 엄마 말고 다른 여자 좋아했다고 하니, 괜히 좀 그렇네.
"사실 그럴 만도 했지. 그녀가 혼인할 상대가 예순아홉 살의 늙은이였고. 사랑해서 혼인하는 게 아니라, 그 늙은이에게 진 빚 때문에 팔려 가는 거였으니까."
조금 뻔하지만, 뻔해서 더 애틋한 이야기인 것 같다.
"지금은 늙어서 죽고, 병에 걸려 죽고, 싸우다 죽고, 어찌저찌 많이 죽어 몇 안 남았지만, 당시에 무림 최고의 고수를 꼽으라면 당연히 무림사존이라 불리던 자들이었다."
갑자기 뭔 소리야?
"네 명이 아니라 일곱 명의 최고수를 꼽으라면, 무림사존 뒤에 무림삼룡이 더 붙었지. 그리고 다시 무림 12대 고수를 부를 땐 무림사존, 무림삼룡, 그 뒤에 무림오호가 붙었다."
"설마… 그 늙은 신랑이 그중 한 명이었단 말이에요?"
"그렇다. 무림오호에서도 최고라 치던 자. 직접 거느린 문도의 수만 5,000명이 넘고, 그를 섬기는 문파가 수십 개에 이르러 다 합치면 몇만 명이 된다는 말까지 있었던, 당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자리까지 위협하던 단령도문(斷靈刀門)의 문주였다."
"빚으로 사람 막 강제로 혼인시키고, 그거 위법 아니에요?"
"황법에도 어긋나고 무림의 도리에도 맞지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힘 있는 놈 앞에서 그 법과 도리를 따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 더군다나 그저 시골의 평범한 처자를 위해 단령도문과 척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주먹이 법보다 앞서고, 센 놈 앞에서는 도리를 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그렇다. 물론… 사랑에 미친 한 사나이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지."
"그래도 무림 12대 고수면 화경의 고수거나 그에 근접한 고수였을 텐데요. 거기에 직접 거느린 문도의 수만 5,000명이라면서요? 낭만개 아저씨… 분타주라고 무슨 방법이 있었겠어요?"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고 아느냐?"
"네."
"뜻을 풀이해 봐라."
"혼자서 칼 한 자루를 들고 적진으로 곧장 쳐들어간다는 뜻……. 설마?"
"그랬다. 그 미친놈이. 그리고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한 그 일을 해냈다. 단령도문을 박살 내고, 늙은 문주까지 죽여 버렸다. 현재 무림에 단령도문이라는 이름의 문파가 없는 게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