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 *
번쩍!
어흐으으으으응!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나를 덮쳤다.
마치 한입에 나를 통째로 삼키려는 듯 무서운 기세로 그렇게 덮쳤다.
당황하지 않고.
응, 왼팔을 내줬다.
커흥! 크으으으으응! 으르르응!
마치 내 왼팔을 몸에서 통으로 뜯어내려는 듯, 호랑이는 와락 물어 버린 내 왼팔을 마구 흔들어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생각부터 정리.
아! X팔.
하필 그 순간.
그날인 건 알았지만, 하필 그 순간 무림으로 돌아올 게 뭔가?
어쩌지?
80만 대군이다.
그것도 분명 신성제국과 흑야제국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일 게 분명하다.
칵뉴족의 젊은 전사들의 수가 300.
원로들까지 합치면 500.
다시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가세해도 1,000명이다.
1,000명 대 80만 대군.
어흐으으으응! 으으으응!
호랑이 새끼가 계속 내 팔을 물어 마구 흔들어 댄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생각 좀 하자고.
내가 무림으로 넘어오기 전 단 두 방에 내 모든 내공을 쏟아 적들을 향해 퍼부었다.
1만 명?
턱도 없다.
진짜 잘해야 5,000?
8,000도 불가능하다.
여전히 80만 대군을 1,000명의 칵뉴족, 그것도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한 1,000명이 상대해야 하는데.
지상 최강의 전사들인 칵뉴족이라면 가능할까?
아니다.
신성제국과 흑야제국의 황제들이 진짜 등신 머저리가 아니고서는, 분명 철저한 준비를 하고 왔을 테다.
아!
X팔.
어쩌지?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잠깐!
그때 분명 20만 명에 달하는 제3의 세력이 빠르게 오고 있었어.
신성제국과 흑야제국의 황제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설마… 설마?
알렉산더다.
만약 알렉산더가 이끄는 연합국 병사들과 칵뉴족 전사들이 힘을 합친다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 아놔!
어흐으으으으응!
퍽!
퍽! 퍽!
"X새끼야!"
퍽퍽퍽!
퍼퍼퍼퍼퍼퍽!
"생각 좀! 응!"
퍽퍽퍽!
"생각 좀 하자고! X새끼야! 아니, 호랑이 새끼야!"
퍽퍽퍽!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호랑이가 자꾸 나의 심각한 상념을 방해해 무자비하게 때렸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머리로 박아 버리고.
몸통으로 들이받고.
나중엔 번쩍 들어 놈을 거꾸로 땅에 메다꽂았다.
끼이이잉. 깨애애앵.
결국 호랑이는 X새끼처럼 낑낑대는 소리까지 내다가 절명.
탁! 탁!
손을 탁탁 털어 버린 후.
"눈치 없는 새끼. 사람 생각하는 데 방해하니까 그 꼴이 나지. 쯧쯧."
혼잣말을 했다.
아! 괜히 했다.
그냥 속으로 생각할걸.
묘안개와 저육개 말이다.
상황이 심각하다.
내가 소인국에서 돌아왔을 때 걸일번, 걸삼번, 걸사번의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 녀석들보다 상태가 더 안 좋다.
둘 다 얼마나 놀랐는지 턱이 빠져 무릎까지 내려왔고.
얼음이 됐는데, 진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눈동자마저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한 혼잣말 때문인 것 같다.
눈치 없어서 저 꼴이 났다는…….
"어험. 어험. 괜, 괜찮아?"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에게 말을 걸었지만.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는다.
눈알이라도 움직이면 호랑이 꼴이 날까 봐 두려워하는 거다.
괜히 미안하네.
"괜찮아, 움직여도 돼. 봐 봐. 호랑이 죽었잖아."
그래도 안 움직인다.
묘안개와 저육개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있다.
눈을 깜빡이지 않아 나오는 거다.
아놔! 눈 엄청 따가울 텐데.
어쩌지?
모르겠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당장! 움직여!"
소리를 질렀더니, 털썩!
이번엔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됐다.
움직였으니.
그리고 난 오늘 무림으로 돌아올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옷까지 갈아입지 않았겠는가?
이 상황도 예측하고 준비해 뒀다.
"어험. 많이 놀랐지? 그게… 실은… 외공을 숨기고 있었어. 왜 그런 말이 있잖아. 무림에서는 3할의 힘을 숨겨야 한다고. 그래서 숨겼던 거야."
그때였다.
여전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이었지만, 묘안개가 천천히 떨리는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피, 피부가… 피부가 갑자기 까매졌어…요. 오빠."
어?
오빠?
그렇게 부르라고 할 때는 안 부르더니.
좀 그렇네.
괜히 애들 겁줘서 억지로 오빠 소리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 이건 생각지 못했네.
칵뉴족 사이에서만 있어서, 내 피부가 이렇게 까매진 줄 몰랐다.
살짝 탄 건 알았지만, 여전히 그곳에선 내가 너무 하얬으니 말이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묘안개와 저육개에 비하면 내가 그냥 흑인 그 자체가 된 것 같다.
뭐라고 말하지?
대충 하자.
지금 내가 뭐라고 해도 귀에 다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 이거? 내가 익힌 외공의 부작용이야. 며칠이나 한두 달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와."
그때.
조금은 안심한 듯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저육개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런… 그런 외공도 있어…요? 형."
아놔! 저 녀석까지.
인상 쓰지 말자.
애들 겁 더 먹겠다.
웃으면서.
"응, 내가 익힌 외공이 좀 특이하거든."
"아, 네. 그렇군…요. 형."
아! 갑자기 내가 동네 꼬맹이들 골목으로 불러 겁준 다음 삥이나 뜯는 그런 놈이 된 기분이다.
됐다.
천천히 풀어 주자.
"일단 움직이자. 나 때문에 많이 지체됐잖아."
"네, 형."
"네, 오빠."
아놔! 이것들 어째?
* * *
"붉은 돌이다. 드디어 적월산의 붉은 돌을 찾았어!"
우리는 11일째 되던 날 적월산 봉우리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호랑이 두 마리, 곰 세 마리, 늑대 서른일곱 마리를 때려잡아야 했다.
그렇게 도착해 결국 적월산 봉우리에서만 볼 수 있다는 붉은 돌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4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인데.
더 큰 문제가 있다.
"헉! 헉! 헉헉!"
"헉헉! 헉헉!"
묘안개와 저육개가 한계점에 이르렀다.
사실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왜 지금까지 아무도 무치개 이 장로의 제자가 될 수 없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헉! 헉! 오빠… 헉헉! 먼저… 먼저 가! 헉헉!"
상태가 진짜 심각하긴 하다.
"우리와 함께 가려면 오빠도… 헉헉! 이 장로님 제자가 될 수 없을… 헉헉! 거야."
"묘안개 말이 맞아, 형. 헉헉! 헉헉! 형 먼저… 헉헉! 가!"
무림으로 돌아와 운기조식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잠깐만 운기조식을 해도,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양의 기운을 단전에 끌어모을 수 있다.
요 며칠 동안, 칵뉴의 땅에서 마지막에 쏟아부은 검강으로 인해 텅 빈 단전의 울부짖음이 들릴 정도로 내 몸은 내공을 갈구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왜?
지금은 시험 기간 중이니까.
만약 몸에 내공을 지니고 돌아간다면, 이 장로의 경지로 보아 금세 알아챌 것이다.
그래서 하지 않았다.
뭐, 상관없다.
칵뉴족에게서 얻은 강인함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르니까.
"먼저… 먼저 가, 오빠."
"우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형."
너희가 나를 버리고 갔으면 나도 그랬겠지.
그런데 우리 집 가훈이 또 그렇지 않단다.
와락!
지쳐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묘안개를 와락 안아 들었다.
그런 후.
"뭐 해, 저육개? 어서 업혀."
"형! 나… 나 300근 넘어."
"진짜로 가 버리기 전에 어서 업혀."
주춤주춤.
저육개가 미안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내 등에 슬며시 업힌다.
"달린다. 둘 다 꽉 잡아!"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탓!
곧바로 달렸다.
계속 달리고 또 달리고, 그냥 달렸다.
칵뉴족의 땅에서와 다를 게 없다.
그냥 온종일, 앞만 보고 달렸다.
바위가 앞을 가로막으면 부수고.
물이 나오면 뛰어들고.
절벽이 나오면 다시 뛰어내렸다.
호랑이가 나타나면 주먹으로 때리고.
곰이 나타나면 머리로 들이받고.
늑대들이 나타나면 냅다 발로 차 버리면서 계속 달렸다.
지상 최강의 전사들은 애초에 그런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나도 칵뉴족의 일원이다.
그래서 계속, 계속, 달렸다.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사실 조금 힘들긴 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달렸더니 피로가 살짝 왔다.
그래서 칵뉴족의 구호를 외쳤다.
계속 외치며 또 달렸다.
몰려 왔던 피로가 사라지고, 없던 힘이 불끈 치솟았다.
그리고 계속.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 * *
마당에 그가 있었다.
이 장로 무치개.
진즉 우리의 기운을 감지한 모양이다.
놀란 얼굴로 그렇게 우리가 달려오는 방향을 보고 있었고.
내가 묘안개를 안고 또 저육개를 업은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자.
무심해 보이기만 했던 그가 이례적으로 놀란 얼굴을 다 했다.
무려 시험 합격 기한을 하루나 더 남겨 둔, 14일째에 도착한 것이다.
사뿐.
쿵.
묘안개와 저육개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한테 안기고 업혀 오는 것만으로도 둘은 상당히 지쳤다.
그래도 이 장로 앞인지라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녀석이었다.
잠시간 이어진 정적.
그걸 깬 건 이 장로였다.
"내공을… 썼느냐?"
"아니요."
"그래 보인다. 한 줌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알면서 왜 물어봤대?
다시 잠시간 이어진 침묵.
그러더니 이 장로가 우리 셋을 쭉 훑어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 셋 모두 나의 제자가 되겠느냐?"
셋 다 합격이다.
"넵!"
"넵!"
가장 먼저 묘안개가 힘차게 대답했고, 곧바로 저육개가 답했다.
이 장로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나에게로 향했다.
"아니요. 전 아닙니다, 이 장로님."
이 장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표정은 그대로였다.
대신 옆에 있는 묘안개와 저육개가 더 놀라 흠칫하는 모습이었다.
"왜지? 다들 내 제자가 되려고 안달이 났는데? 역시 비걸개가 더 좋아서인가?"
"네."
"그럼 내 제자 시험에는 왜 참가한 거지?"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알고 싶은 거?"
"네."
"그게 무엇인데?"
"이 장로님께서 왜 저를 그토록 간절히 제자로 삼길 원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너를?"
"네."
"……."
이 장로가 잠시 입을 굳게 다문 후 내 눈을 보았다.
그러더니…….
"너를 제자로 삼으려고 안달이 난 사람이, 유일한 네 장점인 내공을 봉인했겠……. 휴우. 외공이 갑자기 늘었구나? 외공만 따진다면 철사방의 방주라 한들 네게 한 수 접어 줘야겠구나. 어떻게 된 일이냐? 내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한데."
"질문은 제가 먼저 했습니다, 이 장로님. 그리고 그것 역시 궁금합니다. 저를 제자로 삼으려고 하시더니, 삼순산공독을 먹여 탈락시키려 했던 이유요. 왜 그러신 거죠?"
"제자가 되면 알려 주겠다."
"제자가 되지 않고 그 이유를 알려고 기를 쓰고 시험에 합격한 것입니다."
"시험에 합격한다고 알려 주겠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만한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난 그런 약속한 적 없다니까."
"길을 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보십시오. 누구의 말이 도리에 맞는 말인지."
"여긴 오가는 사람이 없다."
내가 고개를 돌려 옆을 봤다.
묘안개와 저육개가 동시에 움찔했다.
내 시선도 시선이거니와, 곧바로 닿은 이 장로의 무시무시한 눈빛 압박 때문이다.
그가 눈빛으로 둘을 협박하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묘안개가 먼저 용기를 냈다.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장로님, 아니 사부님."
이 장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곧이어…….
"저도 걸이번 형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부님."
얼마나 무서웠으면 저 덩치가 덜덜 떨고 이 장로의 눈까지 피하며 저리 말했겠는가.
아무튼 됐다.
두 녀석이 용기를 내 줘서.
이 장로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너희는 잠시 물러나 있어라."
마당 한가운데 있는데 어디로 물러나란 걸까?
용케도 묘안개와 저육개가 자리를 피해 줬고.
나와 이 장로만이 남아 한참이나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했다.
"천하제일인 때문이다."
아놔!
이 인간이!
아니, 이 거지가!
어디서 사람을 놀리려고.
"어험. 이 장로님. 갑자기 여기서 천하제일인이 왜 나옵니까? 지금 저를 놀리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난 분명 천하제일인 때문이라고 답을 줬다."
아! 이 거지가 정말!
사람을 뭘로 보고.
"그게요. 이 장로님. 네, 그렇다고 칩시다. 천하제일인. 하아! 누가 천하제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또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여는 이 장로.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거냐?"
이 개ㅆ!
아! 욕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았다.
욕했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
다시 차분하게, 그래 이럴수록 냉정하게.
"네, 몰라서 묻습니다. 도대체 그놈의 천하제일인이 누구고, 그 천하제일인이라는 인간과 제가 무슨 상관인가요? 좀 알려 주시죠."
"음……."
다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이 장로.
이번엔 긴 한숨까지 쉬다가.
"나는 지금 너의 새아버지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