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36화 (35/174)

36화

멍청한 신성제국의 황제 새끼.

다 이긴 싸움을 자기가 멈추어 버렸다.

흑야국은 이제 흑야제국이 됐다.

신성제국과 동등한 위치의 제국이고, 흑야국의 왕 키루킹은 이제 황제가 되었다.

이곳 세상에 두 개의 제국, 두 명의 황제가 세상을 나누어 통치하게 된 것이다.

상관없다.

황제가 두 명이 되고 세 명이 되고는.

신성제국 황제가 멍청한 것도, 결국 제 손해고.

우리는 우리 땅만 얻으면 된 거다.

아! 어쩌면 황제가 진짜 두 명이 아니라 세 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당장에는 아니지만.

"알렉산더 님."

"네, 나태한 대장군님."

"도와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이미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로 뭉친 제국이라면, 그것이 신성제국이었건 흑야제국이었건, 우리가 상대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둘로 나누어졌고, 명목상 평화 협정이라지만, 둘은 서로를 견제하기 바쁠 겁니다. 이런 대치 상황이라면, 저희도 충분히 해 볼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칵뉴의 하얀 사신님."

알렉산더는 떠났다.

올 때는 5만 명을 이끌고 왔지만, 갈 때는 13만 명을 이끌고 떠났다.

사방에서 베라노성으로 병사와 장정, 군대와 귀족, 약소국의 왕들이 몰려들었고.

알렉산더와 의기투합한 것이다.

난 진심으로 그들이 잘 되길 기도하였다.

돕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지만, 칵뉴족 전사들의 임무는 끝났다.

칵뉴족은 이제 칵뉴의 땅으로 돌아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 *

"키루킹 황제가 직접 찾아왔다고요?"

칵뉴 땅으로 돌아가기 전, 뭐 형식적이긴 하지만 신성제국의 수도 길마로 가서 황제에게 보고도 하고 상도 받고 그래야 했다.

그렇게 칵뉴족을 비롯한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길마로 향하는 길.

느닷없는 소식이었다.

흑야제국의 키루킹 황제가 단 몇십 기의 병력만을 이끌고 나를 만나러 왔다는 소식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가 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약속하네. 열 개, 아니 스무 개의 나라를 자네에게 주겠네. 여자? 매년 1,000명의 미녀를 주겠네. 자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줄 것을 약속하네. 나와 함께 영원한 제국의 주인이 되시게, 칵뉴의 하얀 사신."

거절했다.

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키루킹의 눈빛에 야욕이 이글거렸다.

세상을 정복할 야욕이고, 그 야욕을 달성하면 그가 어떻게 변할지 그냥 보였다.

실제의 전장에서는 그가 용맹할지는 몰라도, 마음이 싸우는 전장인 심리전에는 어설픈 그런 남자였다.

뭐, 토사구팽이 아니더라도 나는 칵뉴족과 함께 칵뉴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그렇게 부와 권세를 오래 누릴 시간이 없다.

거절.

* * *

신성제국 수도 길마 입성.

와!

하늘에서 꽃잎이 눈처럼 뿌려진다.

성 곳곳 높은 곳에서 금색의 나팔이 계속 울려 퍼지고.

거리에는 셀 수도 없는 백성들이 끊임없이 늘어서 귀환하는 우리를 향해 환호성을 지로 허리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멋졌다.

그렇게 만난 신성제국의 황제.

흑야제국의 키루킹 황제와 비슷한 말을 했다.

응, 거절.

욕심은 가득하고, 겁은 많고.

키루킹과 다르게 질척이기까지 한다.

어떻게든 나와 칵뉴족 전사들을 잡아서 자신을 지키게 하고 싶은 모양이다.

응, 계속 거절.

그의 제안을 거절했음에도 공은 공이기에, 그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상을 주었다.

다 가지고 가기도 힘들다.

그래서 몇 가지만 받았고.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최고의 갑옷과 방패 그리고 검이다.

칵뉴족 전사들은 그걸 봇짐에 쌌다.

큭큭큭.

아놔, 이 인간들 어째?

됐다.

이제 쓸 일도 없는데, 더러워지는 것보다 저렇게 싸매고 가서 움막에 장식으로 걸어 두는 편이 더 낫겠다.

* * *

칵뉴의 땅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

길마의 시내로 향했다.

황제의 최고 정예 부대라는 신성수호검사단이 직접 나와 우리 칵뉴족을 호위하며 길 안내를 맡았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지만, 우리가 온 것을 알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와 환호성을 질러 대며 우리를 찬양했다.

그렇게 도착한 어느 평범한 집 앞.

다른 집 대문과 창문이 모두 활짝 열리고,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하기 위해 밖으로 모두 뛰쳐나왔지만…….

이 집만큼은 창문과 대문이 모두 꼭꼭 닫혀 있다.

사람 역시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고 그 집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이! 또라이! 집에 있어?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어이! 또라이!"

큭큭큭.

기억하는가?

또라이.

아니, 토라이우스.

신성제국의 전쟁에 필요한 병사를 징집하기 위해 변방국을 돌아다녔고, 그러다가 우리 칵뉴족에게까지 왔던 그 녀석 말이다.

경멸의 눈으로 우리를 무시하고 천대했고.

지상 최강의 전사인 아쿵타와 자탄봉의 목을 서슴없이 베려고 했던 그 미친놈.

큭큭큭큭큭.

아놔!

생각할수록 웃기네.

그래서 더 큰 목소리로…….

"어이! 이봐, 또라이우스!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끼이이이이익.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얼굴을 빼꼼히 내미는 토라이우스.

간사한 웃음이 가득하다.

겁에 질렸음에도, 어떻게든 살고 싶어 저런다.

허리를 잔뜩 숙이고, 저게 걷는 건지 기는 건지, 그렇게 우리 앞에 오더니.

털썩.

오체투지.

"대에에에에에자아아앙구우우운니이이임!"

"새끼, 나 말고. 인사는 칵뉴족 전사들에게 해야지."

"지이이사아아앙! 최에에가아아앙의 저어언사아아니이임!"

이 새끼 절을 몇 번 하는 거야?

칵뉴족 전사들도 그런 토라이우스가 웃겼는지, 키득키득 웃는다.

그럼에도 토라이우스는 연신 절을 하며 대장군과 지상 최강의 전사를 외쳐 댔고.

"야. 야! 조용!"

"헙! 넵!"

"뭐 해?"

"네?"

"데리고 왔잖아. 미개한 인간들 다 끌고 오라며? 그런 다음 너를 찾아오면 특별한 상을 주겠다고 했잖아. 설마 나를 상대로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지?"

덜덜덜 떤다.

눈알을 마구 굴리며.

"어라? 이 새끼 거짓말한 거네? 안 되겠다. 넌 혀를 뽑아……."

"엉엉엉! 살려 주세요. 엉엉엉! 대장군님! 지상 최강의 전사님들! 엉엉엉! 살려 주세요."

결국 그는 오줌을 지리며 오열을 했다.

* * *

똑같은 일상이다.

칵뉴의 땅에 돌아온 지 석 달이 지나간다.

아래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차림으로 온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를 뛰어다닌다.

가끔 신성제국에서 있었던 거대한 전쟁이 꿈을 꾼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곳의 삶은 평온하다.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 아! 하나 있다.

이젠 나도 동네 꼬맹이 녀석들이 아니라, 칵뉴족 전사들과 온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를 뛰어다니며 사냥을 다닌다.

"어! 바위산이다! 얏호! 바위산이다! 와아아아아아아!"

내가 제일 먼저 발견했고.

내가 제일 먼저 외쳤으며.

내가 제일 먼저 달렸다.

물론 이곳에 돌아온 후 내공은 한 번도 쓰지 않았고, 지금도 쓰지 않는다.

그래도 칵뉴족 전사들에게 뒤질세라, 열나게 바위산으로 달렸고.

퍽퍽퍽!

퍼퍼퍼퍼퍼퍽!

쾅쾅쾅!

콰콰콰콰콰콰쾅!

퍼퍼퍼퍼퍼퍽!

우르르르르르르.

콰르르르르르르릉.

쾅쾅콰콰콰쾅!

주먹으로.

다리로.

머리로.

몸통 박치기로.

그냥 냅다 바위산을 부숴 버렸다.

이렇게 신나는 걸 왜 여태 몰랐을까?

내 몸에 흐르는 전사의 피가 다 신나서 날뛰는 느낌이다.

그렇게 바위산을 모두 부숴 버리고.

"헉! 헉! 헉!"

쾌감을 마음껏 누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뭐야?

왜 다들 나를 쳐다보지?

칵뉴족 전사들이 하나같이 미소를 지으며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

"왜? 뭐? 어쩌라고?"

아쿵타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 피부도 우리처럼 까매지고, 반말도 자연스럽게 하고. 바위는 누구보다 제일 잘 부숴. 이젠 진짜 우리 부족의 일원이 다 됐네."

"마음만큼은 이곳에 온 첫날부터 나도 칵뉴족이었다고!"

"그래! 그래! 인정한다, 칵뉴의 하얀 사신! 푸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내가 진짜 칵뉴족의 전사가 된 날이었다.

* * *

"에티오."

에티오 녀석과 밤하늘을 보며 누웠다.

내가 이곳에 온 첫날 나를 온종일 업고 뛰었던 그 녀석 말이다.

나와 동갑이고 현재는 가장 친하게 지내는 녀석 중 한 명이다.

그나저나 이곳은 참 별도 많다.

중원의 두 배?

아니, 열 배는 족히 넘을 것같이 많은 별이 밤하늘을 장식하고 있다.

"왜?"

"칵뉴의 뜻이 뭐야?"

"여태 그것도 몰랐어?"

"응."

"참 나."

"그러지 말고 그냥 알려 주지?"

"두 가지 뜻이 있어. 아마도 처음 칵뉴라는 말을 썼을 때는 첫 번째 뜻을 썼을 것 같은데. 지금은 두 번째 뜻으로 통하지."

"첫 번째 뜻이 뭔데?"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라."

"아! 칵뉴족이 처음 생겼을 때는 많이 혼란했던 세상이었나 봐."

"아마도."

"그럼 지금 통하고 있는 두 번째 뜻은 뭐야?"

"격파하라."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칵뉴족과 정말 너무나 어울리는 뜻이라는 생각에서였다.

* * *

"야, 나태한! 너는 먹을 거를 내가 매일 이렇게 가져다줘야 하냐? 발이 없냐? 손이 없냐? 흥!"

야야가 오늘도 먹을 걸 나에게 가져다주러 왔다.

야야는 새침데기처럼 나를 한 번 째려본 후 내 움막을 나갔다.

아니, 나가기 전.

"야야."

내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겠는가?

눈 딱 감고, 한 번만 그녀의 소원을 들어줘야겠다.

"왜 불러?"

"소원이랬지?"

"뭐가?"

"내… 끄응, 내 병아리……. 휴우. 진짜 딱 한 번만이다. 쓰담쓰담……."

내 말에 그녀가 새침한 얼굴을 싹 지우고 화색이 됐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참 나.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딱 한 번. 빠르게."

야야가 고개를 폭풍같이 끄덕이며 곧바로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

그래, 딱 한 번.

딱 한 번이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고.

그녀가 나의 병아리를……. 어라?

"얘들아! 어서 와! 태한이가 병아리를 개방했어! 어서들 와!"

야야가… 야야가 말이다.

젠장!

동네 여인들을 죄다 불러 모아 나의 병아리를 농락했다.

나는 그날 밤새도록 굴욕감과 수치심에 홀로 울어야 했다.

* * *

칵뉴족의 옷을 벗었다.

사실 옷이랄 것도 없는, 거기만 살짝 가린……. 아! 며칠 전 부족 처녀들에게 당한 그 끔찍했던 기억이…….

젠장!

잊자.

잊어.

만약 행운석에 대한 내 추론이 맞다면 오늘이다.

나는 칵뉴족의 옷을 벗어 내 움막의 한쪽에 가지런히 개 놓은 후.

사실 갤 것도 없는데.

아무튼 예쁘게 놓고.

중원에서 입었던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이곳 사람들과는 나만이 알 수 있는 표현으로 애틋한 작별 인사는 다 했고.

곧 무림으로 돌아갈 테다.

오늘이 정확히 이곳에 온 지 1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가부좌를 튼 상태로, 행운석이 작동되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땅이 흔들렸다.

지진?

응, 아니다.

서너 달 전, 신성제국의 전장에서 느꼈던 그 울림이다.

갑자기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고.

나는 곧바로 움막에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부족의 모든 이들이 이미 밖으로 나와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젠장!

빌어먹을!

왜?

도대체 왜?

신성제국의 황제와 흑마제국의 황제가 나란히 말을 탄 채로 서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30만? 40만? 50만?

아니다.

족히 80만 명은 되는 군대가 순식간에 칵뉴족을 포위했다.

내가 선두로 나가 물었다.

"왜?"

신성제국의 황제가 아닌 흑마제국의 황제가 답했다.

"두려워서. 너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리의 목을 칠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서 죽는 거다. 너희가 용맹해서. 너희가 너무 강해서. 너희가 지상 최강의 전사들이라서."

X팔!

개새끼들.

그때.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표정의 변화가 없다.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신성제국과 흑마제국의 수십만 대군이 눈앞에 있는데, 칵뉴의 위대한 전사들은 구호를 외치며 내가 가르쳐 준 전열을 갖추었다.

대전사 아쿵타와 족장 릴농푼탄이 선두에 섰다.

젊은 전사들, 늙은 전사들 그리고 부족의 여인들과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싸울 준비를 하고 나왔다.

그런데, 아!

저 멀리서 엄청난 모래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족히 20만 명은 돼 보이는 군대가 더 오고 있는……. 어라?

신성제국과 흑마제국 황제들의 낯빛이 안 좋다.

저들 편이 아니란 소린데?

누구지?

아니, 이때다!

갑자기 나타난 제3 세력으로 두 명의 황제가 당황한 사이!

어차피 싸워야 할 거.

이제 당당한 칵뉴족의 전사인 내가 나선다.

중원의 무복을 입고, 무림의 검을 뽑아, 소인국에서 얻은 2갑자의 내공을 끌어 올렸고, 칵뉴족에서 익힌 용맹함과 강인함으로 돌진했다.

"칵뉴족의 전사들은 적들을 도륙하라!!"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공격 명령을 외침과 동시에.

나의 모든 것을 건 검강이 신성제국과 흑마제국 황제가 있는 적진의 중심으로 쏟아져 나갔고.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일천에 달하는 칵뉴족 전사들이 일제히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다시!

하나도 남길 필요 없다.

단전은 물론 혈도에 있는 내공까지 모두 끌어서.

엄청난 검강을 적들에게 쏟았고.

이제 남은 내공은 없다.

그래도 끝나지 않았다.

생명의 근원인 원기가 있다.

나는 그것을 꺼내 마지막 검강을……. 번쩍!

[전쟁이 끝날 무렵 에티오피아 정부는 북한에 포로를 석방하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칵뉴 대대 병사들이 항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칵뉴 대대는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칵뉴 대대는 238번의 전투를 치렀고, 238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자기 부대원의 시체를 두고 가지 않았으며, 이는 칵뉴 대대 병사들이 전투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칵뉴 대대의 모습은 한국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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