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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이번 여행기-35화 (34/174)

35화

흑야국의 키루킹 왕이 이끄는 백만 대군이 베라노성으로 몰려든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성 전체로 번졌다.

일부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다.

내 명령을 하나하나 수행해 가며, 묵묵히 백만 대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수고했습니다, 알폰카."

베라노성의 최고 갑부, 알폰카가 드디어 지도를 완성해 나에게 들고 온 것이다.

"오히려 제가… 나태한 대장군님을 위해, 또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눈물까지 흘리며 감격해했다.

충분히 감격의 눈물을 흘려도 될 정도로 훌륭한 지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지도를 밤새도록 보고 또 보고 계속 보고 다시 또 봤다.

그리고 보름 뒤.

키루킹이 이끄는 백만 대군이 베라노로 진입하였다.

* * *

고스트 플레인(Ghost Plain).

흔히 귀신 평야라는 부르는 곳이다.

나는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베라노성을 나왔다.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하며 수성전(守城戰)을 주장했지만, 나는 과감히 이 전략을 택했다.

귀신 평야의 좋은 자리를 잡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한나절이 지나자 땅이 울렸고, 곧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마어마하다.

말로만 들었지, 백만 대군을 실제로 보는 건 나나 이들이나 모두 처음 아니겠는가?

그냥 보는데 심장이 다 터질 것처럼 떨렸다.

신성제국을 상대로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수도 길마까지 진격한 무패의 군대가 바로 저들이다.

신성제국이 그들을 지배할 당시에도, 심한 견제를 해야 했을 정도로 용맹하고 뛰어난 전사들을 수도 없이 보유한 이들이 또한 저들이다.

무엇보다 키루킹이 직접 훈련시켰다는 흑야국의 20만 기마병은, 얼마 전 우리가 상대했던 흑마대전사들보다 더 무시무시한 명성을 떨치는 자들이다.

하루 만에 다섯 개의 국가를 점령한 사실은 모르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다.

아침에 눈을 떠 식사를 하고, 점심을 먹기 전에 두 개의 국가를 점령.

점식을 먹고 다시 저녁을 먹기 전에 세 개의 국가를 더 점령했다.

그냥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질주해도 닿기 힘든 거리를, 전투까지 치르며 그런 전과를 올린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이 바로 흑야국 최강의 전력인 것이다.

반면, 300의 칵뉴족 전사들이 있다지만, 우리의 10만 병력은 여기저기 사방에서 몰려와 아직 제대로 된 연합 훈련조차 하지 못한… 저들의 눈엔 분명 오합지졸로 보일 테다.

확실히 부정하기 힘든 말이기도 하다.

열 배라는 수적 우위도 저들이 가지고 있다.

이래저래 불리한 싸움이다.

하지만 싸움이란 건 끝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확신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이 싸움.

기필코 이긴… 아하!

뒤를 슬쩍 돌아보니.

우리 병사들, 10만의 병사들이 덜덜 떨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막상 흑야국의 백만 대군을 맞닥뜨리니 무섭나 보다.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까지 준비해 놨다.

"위대한 칵뉴족의 전사들은 앞으로!"

척! 척! 척! 척!

이제는 제법 군인 티가 나는 칵뉴족 전사들이 3열 횡대로 나섰다.

내가 그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구호!"

쿵쿵!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발까지 크게 구르며 우렁찬 칵뉴족의 구호를 외치는 전사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칵뉴족 전사들의 구호는 곧바로 우리 10만 병사들에게 옮았다.

모두가 두려움을 떨치고, 발을 구르고, 칼과 창을 흔들며 우렁찬 구호를 외쳤다.

장관이었다.

이에 흑야국의 백만 대군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키루킹.

안력을 끌어올려 흑야국의 왕 키루킹을 보았는데.

웃는다.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얼굴로 그리 웃었다.

어디 보자.

언제까지 웃을 수 있는지.

우리의 구호가 끝나자, 그가 한 손을 펼쳐 들었다.

흑야국의 자랑, 20만 기마병이 일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로 5만.

우로 5만.

중심으로 10만.

총 20만 기의 기마병이 그렇게 자리를 잡는가 싶더니.

일제히 우리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진격해 왔다.

아마 키루킹은 이 한 방으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 그럴 테다.

원래라면 그의 생각이 맞아떨어졌을 테고.

"돌격 준비!"

내 외침에 우리 10만 병사가 일제히 돌격을 준비했다.

그러자 키루킹의 얼굴에 더 짙은 웃음이 드리웠다.

비웃음이다.

전쟁의 ‘전’ 자도 모르는 애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맞다.

기마병이 돌진해 오면, 자리를 견고히 지키고 긴 창을 들어 적의 예기를 꺾는 게 맞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20만의 기마병이 일제히 몰아치는 모습은 장관이었고, 땅과 대기까지 모두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그렇게 그들이 우리 코앞까지 막 닿으려던 그때.

철퍼덕.

쿠당탕.

와르르르르르르르!

"으아아악!"

철푸덕 철푸덕.

퍽!

퍽!

퍼퍼퍼퍼퍼퍼퍼퍼퍽!

엄청난 기세와 속도로 우리를 향해 돌진하던 20만의 기마병들이, 일제히 고꾸라지고 땅에 처박혀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그때.

내 곁으로 베라노성의 최고 갑부 알폰카 노인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기마병이란 자들이 어찌 땅의 중요성을 저리도 모를까요? 끝났네요. 말의 생명은 발목입니다. 아무리 귀한 말이라도, 발목을 다치면 쓸모가 없고, 주인은 눈물을 머금고 그 말의 목을 벱니다. 흑야국의 기마병들은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습니다. 말을 타지 못한 기마병들이라……. 큭큭큭. 대장군님의 승리를 미리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귀신 평야.

보기에는 멀쩡해도 사방이 늪과 진흙 그리고 진창이다.

그래서 아무리 시간이 촉박해도 상인들은 절대로 이곳으로 물건을 싣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것이 내가 귀신 평야를 선택한 이유다.

"신성제국의 위대한 용사들은 적들을 도륙하라! 칵뉴의 위대한 전사들은 선봉에 서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리 바로 코앞에서 무서운 속도로 말을 몰아 진격하다 진창에 빠지고 고꾸라진 20만의 흑야국 기마병들.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수습하기도 전에 기세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우리의 10만 대군을 맞이해야 했다.

당연히 선봉에는 칵뉴족 전사들이 섰고.

그들이 먼저 나서자 뒤를 따르는 10만의 병사들은 더더욱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푹! 푹!

쉬이이이이이익!

챙챙챙!

채채채채채채채챙!

"으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진흙에 빠지고 늪에 빠진 적들을, 아군은 일말의 자비도 없이 적들을 마구 베어 버렸다.

정말 무지막지했다.

진창 위에 자라난 푸른 풀들은 기마병들이 들이닥치고 고꾸라짐과 동시에 숨겨 두었던 검은 진창의 빛을 띠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세하여 적들의 목을 베자, 검은 땅은 다시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이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진격! 진격하라! 기마병을 구하라!"

시종일관 여유만만, 나를 비웃기까지 했던 키루킹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색이 되어 고함을 질러 댔다.

수십만의 흑야국 대군이 몰려들었지만, 그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말을 타고 달릴 때야 눈 깜짝할 사이였다지만, 그들이 기마병을 구하기 위해 올 때까지.

우리는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던 20만의 기마병 대부분을 죽일 수 있었다.

"퇴각!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대략 8, 9할의 기마병을 눈 깜짝할 사이 도륙한 후, 아군은 빠르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진열을 정비했다.

그 사이 대략 30만에 달하는 적들이 맨몸으로 진창으로 들어와 살아 있는 기마병과 말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X신들.

"진격! 도륙하라!"

적들이 다시 죽음의 늪에 스스로 빠진 거다.

당연히 진격했고.

순식간에 다시 십수만 명의 적들을 벨 수 있었다.

키루킹의 명이 없었음에도, 적들은 사색이 되어 자신들의 진영으로 뛰어 도망갔다.

한 시진이 뭔가.

반 시진만에 백만 대군이 7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우리의 구호는 하늘을 울리고 대지를 흔들었고.

적들은 두려움에 잠식되어 갔다.

흑야국의 왕 키루킹 역시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적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 진영에서 수백 개의 푸른 깃발이 하늘 높게 치솟았다.

곧이어.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둥―

땅이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에 빠진 적들은 더더욱 짙은 두려움에 빠졌다.

이어서 알렉산더와 포사노가 이끄는 2만 기의 기마병이 적의 후진에서 갑작스레 나타나 돌격하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다시 치고 빠지고.

키루킹이 정신을 차리고 군사를 지휘했지만, 적들은 이미 기마병을 잃었다.

우리 기마병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심지어 미리 지형을 점령해 우리 기마병을 막으려 했던 적들은…….

"으아아악! 진창이다! 진흙이야!"

진창에 빠졌고.

"화살이다! 방패!"

매복했던 아군의 화살 세례를 맞아야 했다.

다시 기마병들은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키루킹은 물론 적들은 후미에서 활약하는 우리 기마병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위대한 칵뉴의 전사들은 진격하라!"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적들이 후방에 정신이 팔린 사이.

칵뉴의 전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내달려 적의 전면부를 공격했다.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 공격이다.

당연히 진창이 아닌 미리 확인해 뒀던 단단한 땅만을 밟아 빠르게 움직였고.

콰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300명의 칵뉴족 전사들은 수천의 적들을 베었다.

"퇴각!"

처처처처처처처처척!

적들이 대비할 움직임을 보였을 때는 이미 내 명령에 칵뉴족 전사들은 퇴각을 했고.

쫓아오던 적들은 다시 진창에 빠졌다.

이를 다시 칵뉴족이 몰살하고.

후방에서는 기동력을 앞세운 기마병이 계속 활약하고.

그렇게 적들은 더 정신을 못 차리고.

"진격! 도륙하라!"

이번엔 칵뉴족 전사 300과 정예 5,000이 일시에 단단한 땅을 밟으며 적의 선봉을 공격했다.

"퇴각!"

수만 명을 도륙하고 곧바로 퇴각.

키루킹, 얼굴이 백지장이 되어 버렸다.

건들면 울 것 같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시작한 싸움은, 해가 서쪽 하늘로 사라질 무렵 끝났다.

40만 명이 넘는 적들이 귀신 평야에서 목숨을 잃었다.

"후퇴하는 적을 쫓지 마라! 전열을 지켜라! 기마병 합류!"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도망가는 60만 명의 적들을 향해 우리는 위대한 칵뉴족의 구호를 끝도 없이 외쳤다.

* * *

기세가 꺾인 적들은 무려 70리(27km)를 도망쳤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나는 알폰카와 상인들이 만들어 준 지도를 활용, 곳곳에서 적들을 계속 괴롭혔다.

물론, 칵뉴족 전사들이 언제나 선봉에 섰다.

이들의 용맹함을, 신뢰를 넘어 맹신하는 10만의 대군이 뒤를 따랐다.

적들은 다시 50리(20km)를 퇴각하였다.

첫날과 같은 대규모 전투는 없었지만, 보름 동안 우리는 다시 10만 명의 적을 더 벨 수 있었다.

백만 대군이 이제는 50만으로 줄어든 상황.

나는 알렉산더, 포사노 등의 장군들과 함께 계속하여 적을 어떻게 소탕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신성제국의 수도 길마에서 사신이 왔다.

얼마 전 왔던 그 사신이다.

"나태한 대장군님!"

그는 입이 찢어질 듯 좋아하고, 미칠 듯한 감격에 겨워했다.

"종전(終戰)! 종전입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황제 폐하와 흑야국의 왕이 종전을 결정했습니다!"

끔찍했던 전쟁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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