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다그닥 다그닥.
백마를 천천히 몰아 알레이돈 장군이 선두로 나섰다.
나를 보는 눈에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너도 이제 끝이구나. 네 제사는 성대히 치러 주겠다. 이건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뜻이다."
"말은 고마운데,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끝까지 두려움이란 게 뭔지 모르는… 막아!"
냅다 또 달렸다.
신법을 펼쳐.
남은 내공을 죄다 끌어 올려.
산백신법(散魄身法) 극쾌(極快)!
하지만 이곳의 검사와 기마병들도 그냥 그렇고 그런 군인이 아니다.
특히 대장군을 곁에서 보호해야 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민첩했다.
내가 그들에게 닿기도 전, 수백의 기마병과 검사들이 알레이돈을 둘러쌌다.
하지만…….
낙백구검(落魄九劒), 8초식 폭멸(爆滅)!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다시!
다시!
다 썼다.
내공 완전 고갈.
하지만…….
연이어 펼친 폭멸은 2,500명에 달하는 적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말, 말도 안… 커억."
알레이돈 장군은 온몸으로 또 입으로 검은 피를 쏟아내며, 다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의 생을 마감했다.
난 그의 목을 잘라 번쩍 들었다.
"칵뉴족 전사들에게 항거하는 자는 모두 죽는다!"
나의 외침!
나의 경고!
허장성세다.
내공 고갈이라 기마병 한 명만 달려와도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서른두 명의 칵뉴족 전사들이 때맞춰 우렁찬 구호를 외쳤고.
나의 말도 안 되는 신위에 칵뉴족 전사들의 구호까지 이어지자, 적들은 감히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하였다.
하지만 모두가 다 겁쟁이는 아니다.
허장성세는 어디까지나 어리숙한 겁쟁이들에게나 통하는 것이고.
안타깝게도 흑야국에는 산전수전을 모두 겪어 낸 용맹한 장수들이 분명 있었다.
"적들은 고작 서른세 명이다! 봐라! 저놈도 지쳤다! 우리 흑야국의 국왕께서 약속하셨다! 저 칵뉴의 하얀 사신을 죽이는 자에게 황금 1,000근과 장군의 작위를 주신다고 하였다! 죽여라! 죽이는 자는 흑야제국의 영원한 영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수천의 흑야국 군사들이 나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몰려들었다.
엿됐다.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곧바로 서른두 명의 칵뉴족 전사들이 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이내 싸움은 끔찍한 백병전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탈탈루.
그리고 칵뉴족 전사들.
분명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똑같다.
언제나 그렇듯 그들은 용맹하게 적들을 도륙한다.
아플 텐데.
지쳤을 텐데.
남은 힘 따위는 전혀 없을 텐데.
그들은 싸우고 전진하고 또 베고 또 전진하고.
하아!
난 멀었다.
진정한 칵뉴족의 일원이 되려면.
"끄응."
난 검에 의지해 일어섰다.
그리고…….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나도 외쳤다.
칵뉴족의 구호를.
그리고.
달렸다.
서른두 명의 칵뉴족 전사들이 온몸을 바쳐 7,500의 적들을 도륙하는 그 중심으로.
나를 던졌다.
* * *
쿠르르르르르르르릉―
동쪽에서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약속이나 한 듯 서쪽에서도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진이 아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또 달려서 오기에 이렇게 땅까지 흔들리는 것이다.
제발 적이 아니길 바랐다.
그리고, 나의 간절한 바람은 현실이 됐다.
동쪽서 자탄봉과 100명의 칵뉴족 전사들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냈던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왔다.
다시 서쪽에서 아쿵타와 에티오가 일백 수십의 칵뉴족 전사들을 그리고 포사노, 얀테 등이 1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우리를 구하러 왔다.
하지만 이미 상황 종료.
피가 바다가 되어 넘실거렸고.
시체는 산을 넘어 산맥처럼 쌓였다.
그리고 나와 탈탈루 그리고 서른한 명의 칵뉴족 전사들.
우리는 그 피의 바다와 시체의 산맥 위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은 상태로 그들을 맞이했다.
우리의 모습을 본 어느 어린 병사가…….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울먹이며 외쳤다.
이는 곧바로 모두에게 전염이 되었다.
또다시 칵뉴족의 전설이 써지는 순간이었고.
나에게도 별명이라는 것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칵뉴의 하얀 사신’이 바로 그것이다.
* * *
칵뉴의 하얀 사신.
지상 최강의 전사 칵뉴족.
서른세 명 대 1만 명의 싸움.
10만의 흑야국 정예 전멸.
소문은 삽시간에 이 세상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 소문을 듣고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패잔병들은 그 수를 세기도 힘들 정도였고.
수백, 수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이끌고 우리와 합류하는 장군들도 있었다.
흑야국에 점령당했던 몇몇 국가의 국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찾아왔고, 수많은 부족의 족장들이 전사들을 이끌고 몰려들었다.
일만 수천 명에 불과했던 베라노성에 5만 명이 훌쩍 넘는 군대가 집결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그 정점은…….
"칵뉴의 하얀 사신님. 알렉산더라고 합니다. 크릭 공화국의 왕이자, 현재 독립연합국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5만 명의 대군이 베라노성을 찾아왔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젊은 왕이 이들을 이끌었다.
크릭 공화국은 그 군대를 다 합쳐도 5,000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국가였다.
그런데 알렉산더라는 젊은 왕이 크릭 공화국과 비슷한 처지의 약소국들을 연합해 독립연합국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듣기로 이들 역시 흑야국을 상대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칵뉴의 하얀 사신님, 우리는 수백 년 동안 신성제국에 사내와 여인을 노예로 바치고, 엄청난 세금을 지불해 왔습니다. 흑야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자, 그들의 횡포는 더 심했습니다."
"말씀하시려는 요지가 뭐죠?"
"칵뉴족 역시 오랜 시간 신성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지요. 칵뉴의 하얀 사신님께서 우리 독립연합국을 이끌어 주십시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 전쟁이 신성제국과 흑야국의 싸움인 줄만 알았는데, 돌발 변수가 생긴 것이다.
신성제국이나 흑야국에 비한다면 아직 미비한 전력에 불과하지만, 만약 나와 우리 칵뉴족이 저들과 연합하게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 세계의 판도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알렉산더라는 저 금발의 젊은 왕은 선뜻 그 최고의 자리를 나에게 주겠다고 한다.
젊어서일까?
아니다.
그의 눈에는 용맹함과 슬기로움 거기에 정의로움 또한 가득 차 있다.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칵뉴족 전사들과 상의해 봐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저와 우리 독립연합국 사람들은 칵뉴족의 전사님들을 존경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당연히 칵뉴족 전사님들의 의견을 들어야겠지요. 기다리겠습니다."
"네, 곧 돌아오죠."
* * *
아쿵타, 자탄봉, 탈탈루 그리고 300의 칵뉴족 전사들.
모두가 반대했다.
내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알렉산더와 독립연합국을 함께 이끄는 핵심 인사들은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신성제국에서 칵뉴족에게 칵뉴족 땅의 권한을 주기로 했습니다. 칵뉴족 전사들이 용맹한 최강의 전사들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들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순간 곳곳에서 아쉬움이 가득한 탄성이 쏟아졌다.
내가 말을 이었다.
"이번 전쟁을 마치고 우리는 우리의 땅으로 돌아갈 겁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영원히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
실망, 아쉬움, 안타까움, 간절함 등등.
활기차기만 했던 알렉산더의 얼굴이 결국 그렇게 변하고 말았다.
"칵뉴의 하얀 사신님."
"네, 알렉산더 님."
"저희도 함께 싸우게 해 주십시오."
"방금 분명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싸움은 신성제국을 위한 싸움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땅의 권한을 갖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만요."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음, 우리와 함께 싸워 적들의 힘을 약화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우리끼리 싸워 봐야 신성제국이고 흑야국이고, 그 누구도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우리나라를 점령해 온갖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게 바로 흑야국이고요.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저희도 함께 싸울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난 그들의 요청을 허락했다.
베라노성의 병력이 10만 명으로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이는 곧 내가 10만 대군을 총지휘하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 * *
알렉산더가 이끄는 독립연합국 5만 명이 합류하고 이틀이 지났을 때.
신성제국의 수도 길마에서 황제의 사신이 나를 찾아왔다.
사신은 황제의 명을 받아 나를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10만의 군사와 수만 명의 베라노성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명식은 성대하고도 화려하게 치러졌다.
내가 정식으로 신성제국의 대장군 직위를 맡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임명식이 끝난 뒤.
황제의 사신은 나와의 조용한 독대를 요구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나태한 대장군님."
"딱 한 가지입니다."
"네."
"황제 폐하께서 우리 칵뉴족과의 약속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칵뉴족 땅의 권한을 1,000년 동안 주시겠다고 했던 그 약속 말입니까?"
"네."
사신이 웃는다.
그러더니 여러 서류 뭉치 중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넨다.
곧바로 그것을 펴 보니…….
"1,000년이 아니라, 칵뉴 땅의 권한을 영원히 칵뉴족에게 일임한다는 황제 폐하의 선언과 그 증서입니다."
"아! 증서까지 준비해 주셨군요."
"설마 황제께서 상을 미리 내리셨다고 전쟁 중 고향으로 돌아가고 그러지는 않으시겠죠? 하하."
"물론입니다. 칵뉴족 전사들은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신의로운 전사들입니다."
"하하! 하하하! 황궁에서도 그리 생각하여 이렇게 미리 상을 드린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베라노성의 소식을 듣고 이만저만 기뻐하신 게 아닙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더 필요한 게 있으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돈, 작위, 땅, 여자, 노예, 무기, 원하시는 건 뭐든 다 드릴 것입니다."
"폐하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모두 칵뉴 땅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런 것들은 그곳에서 쓸 데가 없습니다."
"아! 그래도……."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언제든지요."
"그나저나 수도인 길마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나를 만난 후 미소가 떠나지 않던 사신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진지해졌다.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솔직히 말씀드리죠. 덕분에 살았습니다. 황성(皇城)이 있는 수도 길마의 상황도 이곳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곳보다 더 심각했죠. 일12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황성을 포위했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요."
그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서웠고 강했습니다. 항복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난립하는 상황에 직면했는데, 그때 이곳 베라노성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칵뉴족의 전사들과 칵뉴의 하얀 사신님의 소식 말입니다. 모두가 희망을 갖게 됐고, 그렇게 버티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사신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점령한 땅에 칵뉴의 하얀 사신님과 최강의 칵뉴족 전사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후미를 공격당할까 두려웠던 겁니다. 그래서 흑야국의 왕이 직접 100만 대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진격 중입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찝찝했을 거다.
뒤에 칼을 든 놈이 있다는 데, 누가 찝찝하지 않을 수 있겠나.
우리부터 깔끔히 정리하고, 다시 길마를 칠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전략이고.
"칵뉴의 하얀 사신님. 아니, 나태한 대장군님."
"……."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그들을… 흑야국 국왕의 목을 베십시오."
사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이미 준비하고 있었고.
이제 진짜 싸움이 벌어질 테다.
아니, 이건 최후의 결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