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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이번 여행기-32화 (31/174)

32화

사실 나도 떨렸다.

지금도 떨린다.

비걸개 후보생 때 배운 얄팍한 이론 가지고, 이런 실제 전투를 치르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래도 해야 했고, 해내고 있다.

무엇보다 칵뉴족 전사들이 나에게 더없이 커다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 * *

적들이 공성전에 실패하여 대략 30리(12km) 밖으로 후퇴한 지 닷새가 지났다.

"척후병들이 도착했습니다, 사령관님."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겁쟁이였던 포사노가, 이제는 제법 군인답게 절도 있는 동작과 용맹한 눈빛을 이글거리며 내게 보고했다.

포사노만 그런 게 아니다.

장군들, 병사들과 귀족들 그리고 백성들까지.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얼굴들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내 판단과 명령을 의심하지 않는다.

"장군들과 귀족들을 모두 소집하세요. 척후병의 보고는 모두가 함께 듣겠습니다."

"네!"

잠시 후, 핵심 인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척후병의 보고를 받게 되었다.

적들이 빠르게 수를 불리고 있다고 한다.

흑야국이 아닌, 흑야국에 동조해 신성제국을 공격하고 있는 수많은 국가와 부족들이 힘을 보태 오고 있다는 말이었다.

닷새 동안 이미 그 수가 또 두 배로 늘었다고 한다.

무려 10만 명이 넘는 수다.

하지만 그런 척후병의 보고에 두려워하는 장군과 귀족은 없었다.

칵뉴족 전사들의 위용이 이들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마지막 척후병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라니? 무슨 말인지 정확히 말하라."

내가 물었다.

마지막 척후병은 보고를 하기 전부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껴 더 집중해 지켜보는 중이다.

"흑마대전사. 500명 전원이… 분명… 분명 그들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헉!"

"허업!"

"이, 이런! 이런!"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됐다.

이제는 됐다 싶었던 인간들의 얼굴에 그 전보다 더 짙은 두려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몇몇은 사색이 되어 덜덜 떨기까지 한다.

도대체 흑마대전사가 뭐기에 이런 반응들인가?

그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늠름하기 그지없던 포사노 장군이 씁쓸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못 들어 보신 것 같군요."

"흑마대전사라는 자들을요?"

"네."

"못 들어 봤습니다."

"우리에게 칵뉴족의 전사님들이 계시듯, 흑야국에는 흑마대전사들이 있습니다. 흑야국의 깊은 수풀 속에 숨어 살던 괴인들이었는데, 그들을 흑야국의 왕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다고 합니다."

포사노에 이어 유리스 국가의 메이튼이 설명을 덧붙였다.

"흑야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언제나 선봉에 섰고,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무적의 전사들입니다. 고작 500명으로 5만 명의 신성제국 정예를 물리친 전쟁은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는데, 그냥 허투루 들을 말은 아닙니다."

음, 무적의 전사?

최강이라는 소리잖아?

슬쩍 내 옆에 있는 아쿵타와 자탄봉을 보았다.

내가 통역을 해 주지 않아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래도 분위기는 읽고 있다.

그나저나 칵뉴족이 최강이고 무적인데.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는 없지.

난 척후병을 향해 물었다.

"그들이 언제쯤 도착하는지도 들었나? 어디에서 어느 길을 통해 오는지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척후병이었지만, 임무는 충분히 수행했다.

흑마전사들이란 놈들이 신성제국의 수도인 길마를 공격하던 중 이곳 소식을 듣고 오고 있다고 한다.

며칠 내로 도착하게 될 것이다.

가리면 된다.

누가 진짜 최강이고 누가 진짜 무적인지.

모두에게 증명해 보이겠다.

* * *

와!

저것들 인간 맞아?

숲을 통째로 엎어서 닦아 놓은 커다란 대로.

전쟁 중이라 오가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나는 이틀 전부터 그 넓고 길게 뻗은 길의 한편에 있는 아름드리나무 아래 홀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 말발굽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려 보니…….

아!

와우!

칵뉴족 전사들이 딴딴한 근육질 몸에 쭉쭉 뻗은 팔다리라면.

이 인간들.

아니, 어쩌면 얘들 진짜 인간 아닐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종족인가?

아무튼 신장은 7척(210cm), 8척(240cm)? 칵뉴족과 비슷한데, 덩치가 그냥 곰이다.

곰보다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놈들을 태우고 있는 말들이 다 불쌍해 보인다.

심지어 무기도 전장에서 흔히 쓰이는 칼이나 창이 아닌 도끼다.

그것도 역시 무지막지하게 큰 도끼.

웬만한 장정 두서너 명도 들기 힘들 것 같다.

아무튼 한 명만 그런 게 아니라, 500명이 다 똑같이 생겼다.

곰보다 더 큰 덩치에, 온몸이 죄다 털로 덮여 있다.

아! 진짜 무시무시하네.

그들이 빠르게 말을 달려…….

진짜 말들 너무 불쌍하네.

아무튼 빠르게 말을 몰아 길을 지나려 했다.

그때 내가 펄쩍!

단번의 도약으로 놈들의 길을 막아섰다.

그러자 선두에서 말을 몰던, 다른 덩치들보다 조금 더 큰 덩치가 손을 들어 그들의 질주를 멈추어 세웠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갸우뚱한다.

"어이, 덩치!"

분명 내 말을 알아들었을 텐데, 대꾸가 없다.

계속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만 본다.

"여길 지나려면 이 나태한 님을 쓰러뜨려야 한다, 덩치들아!"

비웃음?

없다.

그냥 또 계속 그렇게 쳐다만 본다.

그래서…….

바닥에 있는 돌을 주웠다.

그리고 던졌다.

쉬이이이익.

툭.

조금 전 그놈.

무리를 멈추어 세운 그 대장 녀석의 얼굴에 정확히 맞았다.

"하하하하! 어때? 무섭냐? 덤벼 보라고, 쫄보들아!"

그러자 곧바로 대장 녀석 뒤에 있던 한 녀석이 말을 몰아 나에게 돌진… 아! 대장 녀석이 막는다.

또 가만히 쳐다만 본다.

심지어 몇몇은 주변을 살피기도 한다.

이 괴수들, 그냥 힘만 센 게 아닌가 보다.

전투와 전쟁에 도가 튼 놈들이다.

매복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다.

"왜? 겁나? 내가 겁나냐고? 이거나 처먹어라!"

주먹으로 엿도 먹여 보고.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약도 올려 보고.

"X발! 어쩌고저쩌고, 너를 낳고 미역국이 목에 넘어가……."

엄마 욕까지 했다.

아! 이건 좀 심했다.

그래도 안 넘어온다.

"겁쟁이 녀석들! 내가 그렇게 무섭냐?"

아!

한 식경 동안 평생 할 욕을 다 했다.

내 어휘력이 많이 부족한가 보다.

했던 말만 계속 반복한다.

결국, 무표정했던 흑마대전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일기 시작했다.

이때다.

산백신법(散魄身法), 벽혼신보(霹魂身步), 쾌(快)!

이 갑자의 내공을 꺼내서 산백신법 중에서도 가장 빠른, 이른바 벽력을 타고 달리는 혼령이라는 신법을 펼쳤다.

그러고는…….

낙백구검(落魄九劒), 무음필살(無音必殺), 할(割)!

소리 없는 필살의 공격법을 펼쳤다.

아! 나는 경지가 얕아 살짝 소리가 나긴 했다.

스으윽.

이내.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던 흑마대전사 수장의 목이 반듯하게 잘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놀란 흑마대전사들.

"새끼들, 그러게 덤비라고 할 때 덤비… 으악! 한 명씩 오라고!"

놈들이 일제히 분기탱천해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나를 덮쳐 왔다.

나는 곧바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다.

병법에서 가장 으뜸으로 쳐주는, 물론 내가 으뜸으로 치는 병법이다.

아무튼 열나게 달렸다.

놈들이 탄 말들은, 그 거대한 괴수들을 태운 채 정말 무지막지한 속도로 나를 쫓아왔다.

아무래도 흑야국에서 명마 중의 명마만을 골라 저들에게 준 듯하다.

그렇게 나는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쫓기며, 막다른 길목에 도착했다.

병목(甁목, 병의 아가리 아래쪽의 잘록한 부분)의 지형.

길은 좁고, 양옆은 수풀로 가득한 가파른 비탈이다.

무엇보다 내가 더 도망쳐야 할 길이, 절벽으로 막혔다.

쿠쿠쿠쿠쿠쿠쿠쿠쿠쿵―

무슨 말을 몰고 오는데, 다그닥 다그닥 소리가 아니라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앞과 양옆이 딱 막힌 좁은 산길에서 놈들을 마주하게 됐다.

"너의 그 귀신같은 검법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인정하마. 하지만 대장을 죽였으니 너도 죽는다."

역시 전쟁과 전투 그리고 싸움에 도가 튼 놈들이 맞긴 맞다.

당황하고 두려운 기색이 역력해 덜덜 떨고 있는, 막다른 길목에 잡힌 나를 대하면서 조금도 방심하지 않는다.

좌로 셋, 우로 셋, 정면으로 다섯.

나의 손끝 작은 움직임이라도 놓칠세라 노려보며,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접근한다.

한 손에는 그 무지막지한 도끼를 들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하늘에서 비가 왔다.

화살로 만들어진 비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탓!

수천 발이 순식간에 그들을 덮쳤고.

도망갈 곳은 없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릉―

쾅쾅쾅!

콰르르르르르르릉―

그들이 지나왔던 길목, 그들이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퇴로가 거대한 돌무더기로 막혀 버렸다.

다시.

촤르르르르르르르르르―

양쪽의 가파른 산비탈에서 거대한 물줄기, 아니다.

기름이다.

기름이 쏟아졌다.

다시, 휘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잉―

이번엔 불화살의 비가 이들을 덮쳤다.

"태한! 받아!"

절벽 위에서 내려오는 밧줄.

난 그것을 얼른 잡았다.

곧바로 엄청난 힘이 나를 절벽 위로 끌어 올… 헐!

온몸에 불이 붙은 괴수!

하나도 아닌 여럿이,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나를 덮쳐 왔다.

진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경할 만큼 대단한 놈들이 맞긴 하다.

하지만…….

타타타타타탓!

열댓 놈이 동시에 불을 뒤집어쓴 상태로 나를 덮쳐 왔고, 또 몇몇은 절벽을 타고 빠르게 기어올랐지만…….

낙백보를 펼쳐 아슬하지만, 정확히 그들의 손을 피했다.

동시에 절벽 위에서는 더 빠르게 나를 끌어당겼다.

"으아아아아아악!"

절벽 아래.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다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내가 악마가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언제나 냉혹하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나만 죽지 않는다.

내 친구와 가족,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가 죽고 사라진다.

그래서.

아프지만.

잔인하지만.

슬프지만.

두렵지만.

죽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칵뉴족 전사들과 흑마대전사들의 격돌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100번 싸워서 100번 이기는 것이 최상이 아니다(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이다(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나는 병법 중 으뜸을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치지만, 『손자병법』을 지은 손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병법 중 으뜸은 싸우지 않고 적을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작전을 결정했다.

나도 조금 궁금하긴 했다.

칵뉴족 전사들과 흑마대전사들이 격돌하면 결과가 어떻게 날지.

물론, 조금 전 흑마대전사들의 대장 목을 베며 알 수 있었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내 편이라서가 아니라, 칵뉴족 전사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사실이다.

뭐, 내 말을 증명할 기회는 영영 없겠지만 말이……. 아! 어쩌면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돌격! 산을 타고 올라 적들을 섬멸하라!"

괜히 무적의 전사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닌가 보다.

절반이 불에 타 죽었지만, 절반이 살았다.

아직도 몸에 불이 붙어 있지만, 그들은 말의 목을 베어 그 피를 뒤집어쓰고, 또 흙을 몸에 뿌리며 불을 껐다.

심지어 일부는 자신의 불붙은 살을 도끼로 잘라 버리기까지 했다.

곧바로, 가파른 비탈을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무섭게 달려 올라오는 흑마대전사들.

그 기세가.

실로 대단하고 두렵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번 작전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부른 베라노성의 군사들은 어떻겠는가?

"으아아악! 흑마대전사들이다!"

"불사신이야!"

"살려 줘!"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는지, 도망갈 생각조차 못 하며 주저앉고 쓰러졌다.

하지만 괜찮다.

그들의 두려움이 깊을수록, 그들은 칵뉴족 전사들의 위대함을 더더욱 깊이 깨닫게 될 테다.

"칵뉴족 전사들 진격! 흑마대전사들을 도륙하라!"

이제 막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와 두려움에 엉망이 되어 버린, 아군 진영을 피바다로 만들려 했던 흑마대전사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명의 목도 벨 수 없었다.

그들의 앞길을 칵뉴족 전사들이 막았기 때문이다.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아마 정상적인 상태로 싸웠다면 이렇게 일방적이지는 않았을 테다.

하지만, 미친 듯 말을 몰아 달려왔고.

기습 화공에 정신적으로 흐트러졌으며.

무엇보다 화공으로 입은 상처가 심각했다.

그들이 한 명 한 명, 칵뉴족 전사들의 칼에 맞아 쓰러지는 이유였다.

그들의 강한 힘도.

그들의 냉철한 정신도.

그들의 용맹함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쌓은 경험과 전설이라 불렸던 명예마저도.

위대한 칵뉴족 전사들 앞에서는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명실상부, 칵뉴족 전사들이 지상 최강의 전사들이라 불리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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