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30화 (29/174)

30화

쿠우우우우우우웅.

우리가 성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굉음을 내며 거대한 성문이 닫혔다.

우리는 그제야 몸을 돌릴 수 있었다.

성안에 있던 수천의 병사와 다시 수만의 백성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두려움과 존경, 선망 등 온갖 감정이 그들의 눈에 섞여 있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내가 앞으로 나섰고, 내 뒤를 마치 호위무사인 것처럼 아쿵타와 자탄봉이 지켰다.

"성주님은 어디에 계시오?"

사람들을 향해 물었지만, 고요하기만 했다.

감히 내 물음에 두려워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때.

"베라노성의 장군 포사노라고 하오. 우선 소속과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베라노성을 지키라는 신성제국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온 칵뉴족의 전사들입니다."

답은 포사노라는 장군에게 했지만, 우리를 둘러싼 수만의 사람들이 술렁였다.

"일단… 따라오십시오."

난 포사노 장군의 뒤를 따랐다.

* * *

성주의 방에는 포사노와 다른 복장의 몇몇이 더 있었다.

그리고 죽었다.

돼지 성주가 죽어 있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내가 포사노 장군에게 물었다.

"아마 많이 놀라 심장이 멈춘 것 같습니다."

"심장마비?"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돼지가 어지간히도 쫄보였나 보다.

전장에서 칼이나 화살에 맞아 죽은 게 아닌, 놀라 심장마비로 죽은 걸 보면.

아니면 아까 내가 싸대기를 너무 세게 때렸나?

그건 일단 모른 척.

"왜 무모하게 돌파를 시도한 것입니까?"

역시나 포사노 장군이 답했다.

씁쓸한 얼굴로.

"이틀 전, 항복의 의사를 표하기 위해 보낸 사신을 흑야국에서 죽였습니다. 그런 후 성주님과 그 가족만 죽이면 우리의 항복을 받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성주님은 그날 이후 매일 잠도 못 주무시며 불안해하셨습니다."

"배반자가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워했나 보군요."

포사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 내의 식량이 모두 떨어졌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밀 한 톨도 남지 않았습니다. 성주님께서도 어제 온종일 물 외에는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고요. 백성들 중에서 이미 아사자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 사달이 날 줄 알았지만, 성주님께서 돌파를 명령했습니다."

성주가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나 보다.

죽을 줄 알면서까지 무모한 작전을 펼친 걸 보면.

그때, 화려한 복장의 노인이 나서 말했다.

"백성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성주님의 사망은 잠시 비밀에 부쳐야 할 듯합니다."

이곳의 귀족인 듯했다.

"일단 자리를 잡고 대책을 논의하시죠."

또 다른 이가 의견을 냈고,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 * *

베라노성의 귀족 몇 명과 장군들 그리고 우리처럼 베라노성을 구하러 온 타국과 부족의 수장들이 모두 자리했다.

"성주님께서 사망하셨으니, 우선 우리를 이끌 지도자부터 선출해야 합니다."

아까의 그 귀족 노인네다.

"맞습니다. 저는 조금 전 우리의 목숨을 구한 저 젊은 장수를 추천합니다."

우리처럼 외지에서 베라노성을 구하기 위해 온 자인 듯했다.

그러자 포사노 장군과 비슷한 복장을 한 베라노성의 다른 장군이 나를 향해 물었다.

"혹시… 이름과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나태한, 열아홉입니다."

"음……."

"어허."

"어험."

"다들 반응이 왜 그렇습니까? 조금 전 보지 않았습니까? 젊은 장수의 용맹함과 뛰어난 판단력을요! 저 젊은 장수가 아니었다면, 우린 이미 적들의 칼에 목을 잃었을 것입니다!"

"어찌 한 번의 전투로 그 사람의 능력을 모두 판단할 수 있는가?"

"맞습니다. 우리는 물론 성안에 있는 수만 명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나도 저 젊은 장수가 우리의 지도자가 되는 걸 찬성합니다."

"어험. 신중히 결정해야 할 문제요."

옥신각신.

뭐, 그렇다.

나를 두고 저들끼리 삿대질에 고함을 지르며 다투기 시작했다.

"태한, 저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내 뒤에 서 있는 아쿵타가 물었다.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통역해 줘."

자탄봉까지 통역을 원했고.

난 저들의 말을 고스란히 아쿵타와 자탄봉에게 통역해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귀족과 장군들은 서로의 멱살까지 잡으며 더 격렬하게 다투고 있었다.

"가자, 태한."

"네?"

내가 막 저들의 욕지거리를 고스란히 통역하고 있을 때, 아쿵타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두려워하고 있어."

아쿵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두려워 저러는 것일 테다.

아쿵타가 말을 이었다.

"저런 사람들과 함께해 봤자 방해만 돼. 가자. 가서 적들을 물리치자."

"네."

난 아쿵타, 자탄봉과 함께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어디가!"

"아직 회의 안 끝났어!"

"이런 미개한 인간들이 있나!"

"저러니 내가 반대를 하는 거야!"

회의장을 벗어나는 우리 뒤로 욕설이 난무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 * *

아직 아침은 찾아오지 않았다.

회의장을 빠져나온 나와 아쿵타, 자탄봉 그리고 칵뉴족 전사 300명이 성벽 위에 올라 적진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당장 급한 게 식량이라고?"

아쿵타가 시선을 적진에 고정한 채 내게 물었다.

"네."

"가지고 오자."

"뭘요?"

"식량."

"우리끼리요?"

"응."

"저기 대충 봐도 몇만 명인데요?"

"우리도 많잖아."

"300명이요."

"많네."

"숫자 셀 줄 몰라요?"

"……."

그냥 빤히 쳐다본다.

미소까지 지으며.

그러더니.

"애들이 굶어 죽고 있다며? 애들은 살려야지."

그때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탈탈루가 끼어들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내가 웃지 말라고 해도 계속 웃는 인간.

매일 실실 웃기는 하지만, 칵뉴족에서도 알아주는 용맹한 전사 중 한 명이 그다.

아무튼 그가 끼어들어.

"너희가 아까 저 백인들 따라간 사이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 근데 쟤들도 많이 놀랐나 봐. 죽기도 많이 죽어서 겁에 질렸고. 지금 쟤들도 정신없어. 잘 봐 봐. 시체도 아직 다 수습하지 못했는데, 두려움과 피로 때문에 쉬고 있잖아."

탈탈루 말이 맞다.

적들은 여전히 겹겹으로 베라노성을 포위하고 있지만, 흐트러진 진열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른 오늘 다시 공격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태한, 탈탈루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음…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요. 문제는……."

"……?"

"식량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순간 아쿵타와 탈탈루 그리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탄봉까지 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전사님들! 전사님들!"

아까 회의장에서 봤던 중년의 사내가 숨을 헐떡이며 성벽을 올라 우리에게 다가왔다.

베라노성 사람이 아닌, 우리처럼 외지에서 온 인물이었다.

"저는 메이슨이라고 합니다. 유리스라는 나라에서 지원 온 군대를 이끌고 있습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네? 아, 네. 방금 우리 외부에서 지원 온 국가와 부족의 장수들과 합의를 봤습니다. 우리 모두 칵뉴족의 나태한 장군님을 총지도자로 추대하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요."

"그럼……?"

"저기, 적들이 적진의 어느 곳에 식량을 보관하고 있는지 아세요?"

"알기는 하지만… 그건 왜……?"

고개까지 갸우뚱하며 묻는 메이슨 장군.

"가져오려고요."

"뭘요?"

"식량."

"……."

이해를 못 한 얼굴이다.

황당하고 놀라고 그런 게 절대 아니다.

명확히 말했음에도, 그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음, 그러니까 저기 가서 적들의 식량을 가지고 오신다고요?"

"네. 위치만 알려 주십시오."

"나태한 장군님?"

"……?"

"방금 했던 말 취소하겠습니다. 당신을 우리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하는 거 취소입니다. 그럼 전 이만."

"가기 전에 알려만 주고 가세요. 식량이 어디에 있는지."

"휴우우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나는 걸 간신히 참는다는 그런 한숨 말이다.

"저쪽. 저기 보여요? 동쪽에 주둔 중인 적진의 후방 우측. 그쪽에 식량을 잔뜩 쌓아 놓고 있다고 하더군요. 보이죠? 겹겹에 겹겹에 다시 겹겹으로 식량을 보호하고 있는 거. 에잇, 미친놈들. 괜히 시간 낭비만 했네."

투덜거리며 조금 전 올라왔던 성벽 계단을 내려가는 그였다.

상관없다.

"아쿵타, 자탄봉, 탈탈루 전사님."

"응!"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어요."

"그래!"

동쪽 성문을 열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열어 주지 않아 몇 대 때렸더니, 활짝 열어 줬다.

작전?

응, 그런 거 없다.

나는 칵뉴족 전사들에게 지금껏 가르쳤던 것을 반복해 강조했을 뿐이다.

이건 내 계책이 계책인 게 아니라, 상황 자체가 계책이 되는 것이다.

방비하지 않은 곳을 공격하고,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 나아간다(攻其無備, 出其不意).

『손자병법』의 시계(始計)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번 작전 중 가장 힘들었던 건, 해가 뜨기 전에 움직여야 하는데 200대의 수레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

다행히 베라노성 주민의 도움으로 베라노성 군영에서 보관하고 있던 200대의 수레를 찾아 강제로 빼앗아 올 수 있었다.

말 몇 마리가 끌어야 하는 가장 큰 수레만 골라 빼앗았다.

그렇게 동쪽 성문이 열렸고.

아쿵타, 자탄봉, 탈탈루와 80명의 전사들이 선두에서 섰다.

거대한 200대의 수레는 중간에.

그리고 나와 20명의 전사들이 후미를 맡았다.

"진격!"

성문이 열리자마자 내가 외쳤고, 아쿵타와 자탄봉, 탈탈루 그리고 300의 칵뉴족 전사들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적진을 향해 곧장 달려 나갔다.

해가 막 뜨려고 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으아아아아악!"

"검은 악마들이 또 왔다!"

"칵뉴족이다! 으아아아악!"

자다가 봉창을 뚜드려도 저렇게 놀라지는 않을 테다.

완전 방심하고 있던 찰나, 우리의 기습은 그렇지 않아도 어제 낮에 봤던 두려움이 더해 그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도망가는 적을 쫓지 마라! 진열을 유지한 채 군량미를 향해 더 빨리! 더 빨리 진격한다!"

그야말로 거칠 것 없는 질주였다.

잠에서 덜 깬 적들.

또 놀란 얼굴로 막사를 나온 적들.

모두 우리를 보자마자, 아니 우렁찬 칵뉴족의 구호를 듣는 즉시 도망가기 바빴다.

멀고 먼, 겹겹으로 적들이 둘러싼 군량미 보관소까지 우리는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빠르게 식량을 수레에 실어라!"

보통 사람이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칵뉴족은 괴력의 전사들이다.

한 사람이 몇 가마니나 되는 식량을 한 번에 훌쩍 들어 수레 위로 던져 버렸다.

우리의 수레 위로 순식간에 적들의 식량이 높게 쌓였다.

부우우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우웅.

그때 적들의 움직임이 변했다.

흑야국의 알레이돈 장군이 잠에서 깨어나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를 지휘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던 적들이 다시 우리를 빠르게 포위하고 있었다.

이건 시간 싸움이다.

챙기지 못한 엄청난 양의 식량에 불까지 지른 후.

활활 잘도 탄다.

"돌격! 성으로 회군한다! 진열을 갖추고 돌파! 막는 적은 모두 격파하라!"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군량미 보관소로 올 때보다 시간이 지체됐다.

하지만 미미한 차이일 뿐.

선두에서 아쿵타, 자탄봉, 탈탈루를 비롯한 고작 80명의 칵뉴족 전사들이 적들을 마른 볏짚을 베어 버리듯, 적들을 쓸어 버리며 길을 뚫었다.

나와 후미의 전사들은 적들을 거의 상대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무지막지한 기세와 속도로 베라노성을 향해 달려 나갔다.

부우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웅.

알레이돈 장군의 진영에서 계속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적들은 마지못해 우리의 앞길을 막는 듯했다가도, 막상 우리와 마주하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또 비명을 지르며 도주하기 바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알레이돈 장군의 진영에 있던 기마병 1,500기가 무서운 기세로 우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가 더 빠르다.

그들과 맞닥뜨리기 전.

이제는 해가 완연히 동쪽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시점이었다.

우리는 베라노성 동문에 이미 도착하였… 아!

X팔!

빌어먹을 새끼들.

성문이… 닫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