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 *
신성제국의 수도 길마에 도착했다.
"어멋! 깜짝이야."
"아무리 전쟁이 급해도 무슨 미개한 종족까지 다 부르고 그러지?"
"피부가 까매. 어우, 더러워."
"저 새끼들 원래 홀라당 벗고 다니나? 야만인들 같으니라고."
길마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좋은 구경거리 말고, 멸시와 천대의 구경거리다.
"휴우. 일단 포목점부터 가야겠어요."
옷부터 사 입자.
돈?
없다.
그래서 동물 가죽 1,000필을 들고 왔다.
응, 그거 들고 여기까지 달려서 왔다.
혹시 몰라 떠나기 바로 전날, 칵뉴족 땅의 끝판왕이라는 코끼리라는 녀석도 잡았다.
내가 이곳에 온 첫날 보았던 거대 괴수 악어를 앞발로 가볍게 짓눌러 으깰 수 있는 괴수들의 왕이었다.
그 끝판왕 코끼리의 상아 두 개까지 들고 왔다.
상아의 길이만 오십 장(150m)에 달한다.
그것도 그냥 들고 냅다 달려서 왔다.
아무튼, 이것들을 팔아서 옷부터 사 입자.
쪽팔려서 어딜 다닐 수가 없다.
"와! 이런 사기꾼 놈들. 사자 가죽 한 필에 금자 한 닢이나 주는 걸, 우리 부족에 있을 때는 서른 필에 한 닢을 줬었다고."
"됐어요. 너무 억울해하지 말아요. 그게 다 장사라는 거니까."
땅끝이라는 칵뉴족에도 아주 드물게 상인들이 온다고 했다.
신성제국에서는 엄청나게 비싸게 팔릴 그 가죽들을 무지막지한 싼값에 사 갔나 보다.
"다들 어서 옷 입어요. 봇짐에 넣고 다니라고 산 거 아니에요. 입으라고 산 거지. 어서."
이제 우린 부자다.
그래도 옷은 평범한 걸 샀다.
그렇게 옷을 사 입고 다시 신성제국 수도인 길마의 군영으로 향할 수 있었다.
* * *
또 달렸다.
달려야 했다.
나는 칵뉴족 사람들이 한 명도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가는 게 목표지만, 이들은 아니다.
공을 세워 1,000년 동안 칵뉴족이 살고 있는 땅의 권리를 갖는 게 목표다.
그래서 달렸다.
신성제국에게서 우리에게 내린 임무가, 현재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베라노성 전투에 참전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성제국에서는 약속한 칼까지 모두 지급해 줬다.
철로 만든 갑옷과 방패는 주지 않았다.
나무와 돌로 만든 가짜 칼로 훈련하다가 진짜 칼을 갖게 된 칵뉴족 전사들은 그저 신기한 물건을 얻은 듯 좋아했다.
아무튼 달렸고.
그렇게 도착한 베라노성.
아니, 베라노성이 보였지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태한, 어쩌지? 적들이 이미 성을 겹겹으로 포위하고 있는데?"
대전사 아쿵타가 나에게 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다.
그냥 나에게 물은 것이다.
두 달 반의 검법과 진법 수련을 통해, 나에 대한 신뢰가 많이 쌓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적들을 그냥 다 쓸어 버리고 들어갔을 테다.
"밤까지 기다리죠. 상태를 보아하니 아마도 오랜 시간 이렇게 대치한 것 같아요. 방비가 허술한 밤을 틈타 진입을 시도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그러자."
"엇? 잠깐만요. 성문이 열리는데요?"
우리가 상황을 파악하며 계책을 수립하던 중, 성문이 열렸다.
말을 타고 백기를 든 신성제국 복장의 병사가 성문을 통해 나왔다.
곧, 흑야국의 장군과 병사들이 그를 포위했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아! 내공을 또 써야겠군.
시력과 청력을 끌어올렸다.
"항복? 항복하겠다고?"
"네, 그렇습니다. 흑야국의 위대한 알레이돈 장군이시어. 아무 조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흑야국에 항복합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성 내에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성주의 뜻인가?"
"그렇습니다. 여기, 성주님의 서신을 보십시오."
서신을 받아 읽는 알레이돈 장군.
웃는다.
비웃음이다.
"난 그대들에게 세 번의 기회를 줬다. 하지만 그대들은 세 번의 기회를 모두 거절했다. 항복하는 척하며 기습을 하기까지 했지. 그런데 이제 전황이 불리해지니 항복하겠다고?"
"용서해 주십시오, 위대한 알레이돈 장군이시어."
"용서는 지옥에 가서나 해라."
쉬이이이이익.
툭.
신성제국의 베라노성 성주가 보낸 사신은 그렇게 목이 잘려 죽었다.
알레이돈은 베라노성을 향해 외쳤다.
"항복을 하려면 성주가 직접 나와 무릎을 꿇고 항복하라! 내 친히 성주와 그 가족의 목을 베는 것으로 그대들의 항복을 받아 주겠다."
"와아아아아아아아!"
흑야국 진영에서는 땅을 울리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반대로 베라노성의 분위기는 한없이 침울하기만 했다.
안 되겠다.
일단 상황을 더 지켜봐야겠다.
* * *
이틀이 지났다.
우리는 여전히 성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지역에 몸을 숨긴 상태다.
"에티오, 어때? 바깥 상황은?"
에티오를 비롯한 몇몇 전사를 정찰병으로 보냈다.
베라노성 인근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주변은 모두 흑야국에서 점령했어. 우리가 이곳으로 오기 위해 지나왔던 곳까지 모두 흑야국 손에 들어갔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그들의 분위기를 보아 베라노성은 한 달 넘게 아무런 식량이 반입되지 않은 것 같아."
"자탄봉 전사님은요?"
"나도 에티오가 본 것과 비슷해. 한 가지 더 보태자면, 흑야국 군대가 끝도 없이 신성제국의 수도인 길마를 향해 진격 중이야. 여기 있는 흑야국 군대는 그들에 비하면 미비한 숫자에 불과해."
전세가 흑야국으로 기울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수백 년 이 세계를 지배해 왔던 신성제국이 그들에 의해 무너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줄을 잘 서야 하는데.
흑야국에게 붙어?
칵뉴족 전사들을 설득해 볼까?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칵뉴족 전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태한, 오늘 밤 진격하자."
"성으로요?"
"응, 계속 이곳에 있으면서 동태만 파악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적들이 틈을 보였을 때 돌파하는 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어요."
툭.
아쿵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슬쩍 미소까지 짓는다.
"태한,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다만, 가끔 너는 우리가 누군지 잊는 거 같아."
아!
맞다.
이들은 지상 최강의 전사들이다.
난 그에게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요! 오늘 밤, 성으로 들어가요."
* * *
밤이 찾아왔다.
흑야국 진영은 승리를 확신하는지, 경계가 느슨했다.
아니, 느슨하다 못해 곳곳에서 술을 퍼마시고 퍼질러 자고.
됐다.
이런 상태면 칵뉴족 전사들의 능력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른다.
아무런 피해도 없이 성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막 진격을 지휘하려고 할 때.
쿠우우우우우우우웅―
베라노성의 문이 열렸다.
정문만 열리는 게 아니라, 베라노성의 출입이 가능한 여섯 개의 거대한 문이 모두 열렸다.
기마병들이 선두로, 보병들이 그 뒤를 따라 쏟아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 적들을 물리쳐라!"
"와아아아아아! 공격! 공격!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워라!"
기습이다.
베라노성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 발악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흑야국 진영의 상태를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한 작전… 아!
쿵! 쿵! 쿵!
부우우우우우우우웅!
갑작스레 흑야국 진영의 사방에서 북소리와 호각이 울려 퍼졌다.
술에 취해 잠든 줄 알았던 병사들이 죄다 창과 칼을 들고 일어나 진세를 갖춰 베라노성에서 튀어나온 이들을 상대했다.
손자병법의 허실(虛實)이다.
적병을 나 자신에게 이르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이익의 미끼로 유인하라(能使敵人自至者, 利之也).
흑야국의 알레이돈이란 장군은 만만한 자가 아닌가 보다.
결국…….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계속 전진! 싸워! 싸우라고!"
베라노성에서 나온 병사들은 이미 겁에 질려 도망가려 했지만, 이들을 지휘하는 부관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성주 때문이다.
맨 마지막으로 성을 나온 성주.
투실투실한 살 때문에 말에 타지도 못하고, 상황이 심각함에도 마차에 타서 혼란한 틈을 타 도주만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먼 발치에서 이를 보며 웃고 있는 흑야국의 알레이돈 장군.
베라노성의 성주는 이미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 신세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없었다면 그랬겠지.
"아쿵타 대전사님."
내가 부르자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 칵뉴족 전사 300명이 동시에 따라 일어났다.
그들을 향해 외쳤다.
"위대한 칵뉴족의 전사들은 들으라! 나아간다! 싸운다! 적들을 모두 도륙한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길마에서 받은 철제 검을 모두 빼 들고.
우리는 그렇게 용감무쌍하게 적진의 중심으로 달렸다.
채채채채채채챙!
채채채채채채챙!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괴수들이다!"
"뭐야! 으아아악!"
선두에 아쿵타와 자탄봉 그리고 탈탈루.
그렇게 100명씩 세 줄로 바싹 붙어 진격했다.
난 맨 뒤에서.
그야말로 종횡무진.
그냥 거칠 것이 없었다.
칵뉴족의 땅에서 그러했듯, 이들은 보이는 것은 다 베고, 막는 것은 다 부쉈다.
기마병이 막으면 말부터 사람까지 베어 버렸다.
창병이 막으면 창과 병사를 모두 부숴 버렸다.
화살?
돌도 맨손으로 부수는 이들에게 애초에 화살 따위가 아무리 수백 발 수천 발 날아와도 모두 튕겨 나갈 뿐이다.
"좌로 진격! 우선 성주부터 구한다!"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칵뉴족의 구호.
칵뉴족이 얼마나 용맹하고 무섭게 적들을 도륙하며 빠르게 전진했는지, 아비규환인 전장에서도 이들의 이 소리만 들렸다 하면, 적들이 뒷걸음치기 바빴다.
적들에게 몇 겹으로 포위되어 생포되기 직전인 성주의 마차로 우리는 빠르게 다가갈 수 있었다.
"활로를 뚫어라!"
쉬이이익.
내가 빠르게 성주의 마차에 올랐다.
기겁하며 놀라는 성주.
제정신이 아니었다.
"후퇴를 명령하시오."
"어어어어. 그어… 어어엉."
찰싹!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 따귀를 갈겼다.
"후퇴 명령하라고!"
"후, 후퇴! 후퇴하라! 성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가 마차의 창밖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명령을 내렸고.
이미 절반 이상이 처참하게 죽는 꼴을 보고 있던 베라노성의 장군들과 부관들은 일제히 병사들을 향해 후퇴를 명령했다.
난 다시 마차에서 나와 칵뉴족에 합류해 외쳤다.
"우리 위대한 칵뉴족의 전사들은 마지막까지 적들을 막는다!"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가쿠가! 붕가차차!"
우르르르르르르르르.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성으로 다시 돌아가는 베라노성 군사들.
우리는 그 길목을 지켰다.
수십 배 수백 배, 아니 수천 배의 적들이 그런 우리를 향해 말을 타고 창을 들고, 활을 쏘고, 다시 검을 휘두르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칵뉴족의 전사는 단 한 명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칼을 불끈 쥐며.
오는 족족 죄다 도륙을 해 버렸다.
적들의 시체가 우리 발밑으로 산처럼 쌓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자…….
부우우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우웅―
적진에서 커다란 호각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우리를 향해 몰려들던 적들의 걸음이 멈추었다.
대략 삼십 장.
칵뉴족 300의 전사와 수만 명에 달하는 적들이 그렇게 대치하였다.
"베라노성의 군사는 모두 퇴각하였다. 우리 칵뉴족의 위대한 전사들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성으로 들어간다. 삼재진 인! 퇴!"
척!
척!
척!
척척척!
두 달 반 동안 열심히 훈련한 효과가 있다.
마치 하나의 몸인 것처럼.
적들을 바라보며, 한 발 한 발.
흐트러지지 않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우리는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베라노성에 들어설 수 있었다.
위대한 칵뉴족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