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23화 (22/174)

23화

"엉엉. 형아, 가지 마!"

"앙앙. 가지 마, 형아!"

꼬맹이 거지들이 오늘은 단체로 울음을 터뜨렸다.

나를 둘러싸고,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듯.

나와 어린 거지들의 작별은 그렇게 애틋했… 어?

육장로가 손에 뭘 잔뜩 들고 왔다.

"고기만두다!"

그걸 냅다 저 멀리 냇가 반대편으로 던졌다.

"와아아아아! 먹을 거! 먹을 거!"

"고기만두! 고기만두!"

조금 전까지 오열을 터뜨리며 나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던 이 꼬맹이 거지들이 뒤도 안 돌아본다.

나를 뻘쭘하게 홀로 내버려 두고, 그냥 고기만두를 향해 전력 질주를 시전했다.

"챙길 건 다 챙겼나?"

아이들이 사라진 자리를 육 장로가 대신했다.

"거지가 챙길 게 뭐 있겠습니까?"

"고생했네."

"감사합니다, 육 장로님."

"그나저나 나 때문에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어쩌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육 장로는 알 테다.

내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그래서 더 미안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돈 다 썼어요. 저 이제 진짜 거지예요. 물론, 금자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육 장로가 장난기를 살짝 섞어 씩 웃는다.

대견하다는 듯 나를 보며 어깨까지 툭 쳐 준다.

"이거 받게. 가다가 먹어."

아침 일찍 나가더니, 어디서 찬밥 한 덩이를 구걸해 온 모양이다.

어린 거지들 고기만두는 돈 주고 사 온 것 같은데, 왜 내 건 구걸을 해 왔지?

쩝.

그런데 찬밥만 있는 게 아니다.

"이건."

"그 친구 분타가 그곳일세."

"네, 고맙습니다."

난 찬밥과 쪽지를 품에 잘 갈무리했다.

"육 장로님께서는 계속 이곳에 머무실 건가요?"

"이곳으로 올 중요한 정보가 몇 개 있어. 그래서 며칠 더 머물러야 해."

"이곳 아이들은 어쩌죠?"

"시끄럽다고 투덜투덜하더니, 마음이 꽤 쓰였나 보군?"

"어떻게 안 그렇겠어요. 저렇게 어린 녀석들인데요."

"걱정 말게. 가련개(可憐丐)라는 전설적인 거지를 한 명 불렀으니."

"가련개요?"

"모르나?"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옆으로 보고, 뒤로 보고, 앞으로 보고, 돌아서 봐도 불쌍해 보이는 거지가 있어. 내가 봐도 그 녀석은 진짜 불쌍하게 생겼거든. 얼마나 불쌍해 보이는지,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서 돈이며 밥이며 마구 준다네."

"아! 생각났어요. 그 유명한 거지분이요. 굶어 죽어 가는 거지 소굴에 나타났다 하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곳 거지들이 죄다 비만 거지가 된다는 그분이요?"

"맞아, 그 친구. 하하. 그러니 이 녀석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자네는 자네 앞길이나 잘 챙기게."

"네, 육 장로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무운을 빌겠네, 걸이번."

그렇게 개방 임시 총타를 떠났다.

금자를 뺀다면 남은 건 철전 몇 닢뿐인 진짜 거지가 됐다.

하지만 육 장로 상취개와 어린 거지 녀석들 덕분에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다.

따뜻한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날 수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이 장로 무치개…가 아니고.

죽은 걸십이번의 고향이다.

* * *

호남 악양의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거지 소굴.

우리 개방의 일결제자가 이끌고 있는 정식 분타다.

"받으세요."

"이… 이게……."

내 품속에 꼭꼭 숨겨 간직하던 전낭을 이곳의 젊은 분타주에게 통으로 건넸다.

보통의 거지라면 전낭 안에 든 금자들을 보고 눈이 뒤집혔을 테다.

하지만 이곳의 분타주는 눈이 뒤집히는 대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대용개(大勇丐), 그 녀석이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항상 형 같았는데. 흑흑."

육 장로에게 받은 쪽지에는 걸십이번의 신상이 모두 적혀 있었다.

걸십이번의 진짜 이름은 대용개였다.

크게 용감하다는 뜻이다.

"열흘 전 호남 총분타주님이 여러 걸개 분들과 함께 방문하셨습니다. 저기 저 비석을 세워 주시며, 대용개가 얼마나 용감하고 훌륭한 거지였는지 또 무림과 방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는 것까지 모두 알려 주셨습니다. 흑흑."

분타주가 연신 눈물을 흘리면서도 비석을 가리키며 애써 씩씩하게 말했다.

방에서도 걸십이번의 죽음에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대용개의 동료분이라고 하셨죠?"

"네, 광곡개라고 합니다."

비걸개 신분을 대놓고 밝힐 수 없어서, 그냥 비걸개 수련생 때 얻은 별명을 썼다.

"그런데 이 돈은……."

"대용개의 몫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난 주저하는 그의 손에 전낭을 꼭 쥐여 줬다.

이건 우리 비걸개의 전통이다.

먼저 간 동료에 대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고, 당시 우리는 모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알기에.

심안개 서안 분타주를 만났을 때, 내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에 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역시 내가 이 돈을 어떻게 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또 서안 분타를 떠나 호북의 임시 총타로 가는 길에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참고 금자에는 손도 안 댔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육 장로가 나와 작별하며 자신 때문에 돈을 너무 많이 쓴 것 아니냐며 미안해했던 이유도, 또 대견하게 날 보며 어깨를 두드려 준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고.

모두 우리 비걸개의 전통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의 남은 가족에게, 임무를 수행하며 얻게 된 수익의 대부분을 바치는 것이다.

덕분에 이번엔 진짜 빈털터리 거지가 됐지만, 마음만큼은 어느 때보다 더 뿌듯했다.

"아! 광곡개 님, 대용개 동생 녀석을 보시겠습니까?"

"소용개(小勇丐)요?"

"네, 형처럼 훌륭한 거지, 무걸개가 되겠다며 매일 열심히 타구봉법을 수련하고 있습니다."

"네, 만나고 싶네요. 어디 있나요?"

"따라오시죠."

* * *

걸십이번의 동생 소용개를 만났다.

땀을 뻘뻘 흘리며 타구봉법의 1초식과 2초식을 반복해 수련 중이었다.

"광곡개 형? 나, 형 알아. 우리 형이 서신 보낼 때 가끔 형 얘기 썼어."

"뭐라고 썼는데?"

"거지새끼가 구걸을 안 한다고. 미친놈이라고. 큭큭큭. 근데 멀쩡해 보이네?"

아놔!

걸십이번과 꼭 닮은 얼굴을 떠나, 이 녀석 말투가 자기 형이랑 똑같다.

사람 속 뒤집어 놓는데 선수인 형제들이다.

한 대 칠 수도 없고.

"너, 무걸개 될 거라며?"

"응, 비걸개는 나이가 차서 물 건너갔고. 우리 형보다 더 훌륭한 무걸개가 돼서, 나쁜 악당들을 물리칠 거야."

"그럼 나한테 잘 보여야 해."

"쓰읍. 형한테 잘 보여 봤자 별거 없을 거 같은데?"

하아!

이 새끼 걸십이번 친동생 맞다.

싸가지 하고는.

"타구봉법 3초식."

툭툭거리는 말투로 연신 내 속을 뒤집어 놓던 녀석의 눈동자에 순간 지진이 일어났다.

아니, 온몸을 떨고 있다.

타구봉법 1, 2초식은 개방의 방도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지만, 3초식부터 5초식까지는 이결제자가 되어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분타주도 2초식까지 밖에 익히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3초식을 전수해 주겠다고 운을 띄우니.

"형님! 오늘부로 형님이 제 친형님이십니다!"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숙이며 큰 목소리로 나를 형님이라 부른다.

하하하!

이 녀석, 걸십이번과 완전 판박인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사회생활은 걸십이번보다 훨씬 잘할 것 같다.

난 그곳에서 며칠을 더 머물며 소용개 녀석에게 타구봉법 3초식을 전수해 줬다.

무재도 뛰어나고 근성도 좋고, 무엇보다 가끔이지만 예쁜 말도 할 줄 알고 싹싹하게 굴 줄도 아는 괜찮은 녀석이었다.

수련자의 권한보다 높은 타구봉법을 한 초식 전수하는 건 내 권한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매우 엄격한 문제다.

총타에 보고해야 하고, 또 매우 복잡하며 귀찮은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고, 할 것이다.

왜?

우리 가훈 있지 않나.

‘은혜를 갚아라.’

걸십이번 녀석에게 받은 은혜를 다 갚으려면, 앞으로 이 소용개 녀석에게 많은 걸 줘야 할 테다.

보고 있나, 걸십이번?

너한테 받은 은혜, 방금 100분의 1 갚았다.

* * *

무치개가 있는 귀주 귀양의 석창림(石槍林)으로 향하는 길.

"진짜 양아들을 들였대?"

"그렇다니까. 남궁세가주가 결국 양아들을 입양했어."

"오, 그럼 그 친구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되는 건가?"

"소가주뿐이겠어?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대를 이어 세가주가 되겠지."

"운도 좋은 친구구먼."

"어디 그게 운만으로 되겠어? 소문에 엄청난 고수라고 하더라고. 300년 전에 잃어버린 남궁세가의 신물인 제왕검까지 찾아왔다니, 자격이야 충분하지."

"에휴. 나도 어느 집 양자로 들어갔으면 좋겠네."

"큭큭큭. 나이 40이 넘어서 누가 자넬 양자로 받아 주나?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먹어. 밭에 할 일이 태산처럼 쌓였으니."

"그러자고."

이틀을 쫄딱 굶고, 오늘은 더 버틸 수 없어서 저잣거리에서 철전 세 닢짜리 국수를 한 그릇 먹는데 들려온 소리다.

여기만 그런 게 아니다.

이미 오는 길에 숱하게 들었다.

하아! 남궁무검 녀석.

난 지금 싸구려 국수 한 그릇도 아끼고 아껴서 먹는데, 녀석은 고기반찬 먹었겠지?

쪼금, 아주 쪼금 부럽……. 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빨리 가자.

일단 이 장로 무치개부터 만나야 한다.

* * *

귀주 귀양 석창림에 도착했다.

석창림에서도 한참이나 돌산을 타고 올라 이 장로의 은거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음.

여기가 거지 소굴 맞아?

다리 밑도 아니고, 다 무너져 가는 관제묘도 아니고.

더러운 움막도 없다.

깊은 산중, 그것도 그럴싸한 풍경과 어우러지는 기와집이다.

방이 한 칸, 두 칸, 세 칸.

거기에 손님을 접대하는 대청도 따로 딸려 있고.

꽤 오랜 시간 관리를 하지 않아 여기저기 거미줄이 있고 먼지가 그득히 쌓였지만, 분명 대단한 장인이 공을 들여 만든 집이다.

마당도 그럴싸하고.

그런데 저 녀석들은 뭐지?

마당 한가운데.

내 또래?

나보다 한두 살 어리려나?

아무튼 엄청나게 뚱뚱한 남자 거지 한 명 그리고 고양이 상의 여자 거지 한 명.

떡하니 마당에 멍석을 깔고 무릎까지 꿇어 부복하고 있다.

내가 마당에 들어서자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멀뚱멀뚱.

인사를 해야 하나?

근데 쟤들은 왜 여기서 구걸을 하는 거지?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이상한 놈들이네.

모르겠다.

무시하고.

난 이 장로만 만나면 된다.

그렇게 마당을 가로질러 기와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멈춰라!"

마당 한가운데서 멍석을 깔고 구걸하던 뚱땡이 거지 녀석이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막 문을 두드리려다 멈칫.

고개를 돌려 뚱땡이 거지를 봤다.

뚱땡이 거지는 물론, 그 옆의 고양이 상 여자 거지까지 살짝 화난 얼굴이다.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먹을 거라도 하나 던져 줬어야 했나?

내가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는데 뭘 줘?

내가 재차 고개를 갸우뚱하자.

뚱땡이가 노한 음성으로 나에게 따지듯 말했다.

"난 이 장로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석 달을 이렇게 기다렸다."

곧바로 옆에서 구걸하던 고양이 상의 여자 거지가 말을 이었다.

"난 두 달."

헐!

얘들 구걸하던 거 아니었어?

석고대죄?

뭐, 아무튼 제자 되려고 저러고 있었던 거야?

잠깐 오해를 했었군. 큭큭.

이런 데서 구걸을 할 리가 없지.

내가 생각해도 좀 멍청한 발상이었다.

그나저나, 캬!

육 장로 말이 맞았군.

중원 전역에서 이 장로의 제자가 되기 위해 몰려든다고 하더니.

얘들도 그런 거였어.

"웃어?"

"아! 미안. 다른 생각 하다 웃은 거야. 오해하지 마."

다시 침묵.

돼지 거지와 고양이 거지는 그저 무섭게 날 노려보기만 했다.

물론 하나도 무섭지는 않았다.

난 깔끔하게 둘을 무시하고 다시 기와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멈춰라!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냐!"

쩝.

괜한 오해 사지 말고, 설명을 해 줘야겠다.

다시 몸을 돌려 돼지와 고양이를 봤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봐, 보여?"

슬쩍 허리의 매듭을 보여 줬다.

"엇? 삼, 삼결……."

"그래, 나 삼결제자야. 그리고 이 장로님 제자가 되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이 장로님의 부름을 받고 온 거라고. 이제 들어가도 되겠냐?"

"앗! 죄송합니다."

"응, 그래. 계속 수고."

손을 살짝 흔들어 준 후, 이번엔 진짜로 기와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아!

아!

아!

갑자기.

온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또 돌이 된 것처럼 그렇게 온몸이 굳어 버렸다.

엄청난 기운.

아니, 이건 엄청나다는 표현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그냥 천하를 송두리째 집어삼킬 극한의 기운이 나에게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으로 놀라고 두려웠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그런 엄청난 기운을 느끼며 돌처럼 굳어 버린 몸을 가까스로 돌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7척 장신에 한 마리 성난 곰을 닮은 사나이.

인간이 아니다.

이건 기감이고 내 무공의 경지고를 떠나, 그냥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

초인(超人).

혹시나 했는데.

이 장로 무치개.

그는 화경의 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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