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봉사 활동 5일 차.
"또 윗마을까지 가서 씻고 왔나?"
"네."
"그냥 여기서 씻으라니까."
"마을 사람들이 싼 똥이랑 오줌이랑, 다 여기로 모여 흐르잖아요."
"거지가 유난을 떨기는, 쯧쯧. 됐고. 와서 앉게."
또 술이다.
상취개가 괜히 상취개가 아니다.
항상 상(常), 취할 취(醉).
온종일 술만 마신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 이렇게 나도 함께 마셔야 한다.
이것도 징계의 일환이라고 하니, 뭐라 하겠는가?
같이 마셔야지.
그런데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5일간 술을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상취개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다.
이 거지 노인네는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물이다.
어제 놀라운 사실을 또 하나 알아냈다.
이곳에 나와 상취개 그리고 어린 거지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나와 같은 삼결의 비걸개가 아닌 사결의 비걸개들이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어제 처음 알아챘다.
육 장로 직속의 비걸개들이다.
최고의 비걸개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거지가 은밀히 이 시골 촌구석을 들락거린다.
천하의 모든 고급 정보가 이곳, 그러니까 육 장로 상취개가 있는 이곳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항상 술에 취해 있고, 또 술 때문에 치매 증상까지 있는 양반이, 어떻게 그 많은 정보를 관리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놀랍기만 하다.
"타구봉법은 어떤가? 좀 발전이 있어?"
"아시잖아요. 매일 똑같다는 거."
"음, 내가 자네 맥 좀 잡아 봐도 되겠나?"
"네."
선뜻 왼손을 내밀었다.
너무 쉽게 맥을 내주자 오히려 상취개가 주춤했다.
하지만 곧바로 내 맥문을 잡는 그였다.
아주 간혹 있는 진지한 표정까지 지으며.
총교두는 감지하지 못했다.
우리 개방의 장로인 상취개는 어떨까?
내 소인장기공이 통할까?
아주 살짝 걱정되었지만, 역시나였다.
"오! 진짜로 있군. 1갑자의 내공. 대단해. 정말 놀라워. 열아홉 살에 1갑자의 내공이라니. 그것도 상당히 정순한 내공이구나. 허허."
통했다.
육 장로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최소한 절정 끝자락일 테다.
어쩌면 완연한 초절정 고수일 수도 있고.
하지만 내가 소인장기공으로 갈무리한 내공은 조금도 감지하지 못했다.
다시금 나의 소인장기공에 대한 확신이 서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보고는 받으셨죠?"
"그래, 수천 년 된 산삼과 그걸 먹고 죽은 개새끼 덕분이라고. 자네는 정말 운이 좋은 거지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확실히 이 장로 그 양반이 자넬 탐낼 만하긴 해."
물었다!
언제 이 장로 얘기를 꺼내나 했다.
5일이나 기다렸다.
"혹시 저를 제자로 삼으려고 부르신 걸까요?"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이것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군.
"이 장로 말고도 자넬 데려가려는 장로들이 많았어."
어라? 이건 생각지 못했던 일인데?
"뭘 그리 놀라는 표정을 하나? 자네가 1갑자의 내공을 보유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그랬고 다른 장로들도 그랬고, 지금 자네보다 더 놀란 얼굴을 했다네."
확실히 내 나이에 1갑자의 내공은 사기지.
2갑자가 훌쩍 넘는다는 걸 알면 기절초풍하겠는데?
"자네 비걸개 자격 박탈 말이야. 원래 이렇게 며칠 봉사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영구 박탈이었던 거 대충 눈치채고 있었지?"
"네, 조금은요. 육 장로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계속 비걸개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배려는, 큭큭. 개고기탕 냄새가 그날따라 사람을 미치게 하더군. 하하하!"
"……."
"사실 영구 박탈까지 될 문제는 아니었어. 공과(功過)를 봤을 때, 자네는 개방의 방도로서 훌륭한 일을 해낸 거거든. 그런데 이 더러운 장로들의 욕심 때문에 그렇게 결정을 내린 거라네. 처음에는 대충 징계하고 끝나자고 했다가, 내공이 1갑자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결정된 일일세."
"저를 데리고 가려고요?"
"그렇지, 어떤 장로는 수하로 쓰려고 했고, 또 다른 장로는 제자로 삼으려고 했고. 비걸개 신분이면 자기들이 못 데려가니까, 자격 자체를 박탈시키기로 결정 낸 거라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장로님께 가는 걸로 결정이 난 건가요?"
"거지는 무림인 아닌가?"
그러면서 육 장로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알겠다, 무슨 뜻인지.
"힘센 놈이 형이라는 뜻이군요."
"클클클. 맞아. 고작 서신 한 통 달랑 보냈지만, 이 장로님이 데려가겠다는데 누가 막겠나? 때마침 방주님과 일 장로님도 안 계셨고. 그러니 다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얼굴로 입맛만 다셨지."
더러운 사발에 술을 따라 벌컥벌컥 마신 후 육 장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이 장로님 제자가 되는 거요?"
"그래."
"엄청난 고수라고 하던데요."
"고수지. 엄청난 고수 맞아. 괜히 다들 걸룡이라고 부르겠나?"
역시나 본방 최고의 고수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주지 않는다.
"기대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 장로님이 제자로 삼으려고 부른 거지가 수십 명이고, 또 제자가 되겠다며 제 발로 찾아간 거지가 다시 수백 명이야. 그런데 아직 한 명의 제자도 거두지 않았어."
"아! 제가 제자가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맞아. 아니, 희박한 게 아니라 아예 없어. 오라고 하니 그냥 한번 가 본다고 생각하고 가. 다시 돌아오게 될 테니까."
"네."
"뭔 놈의 거지가 그리도 깐깐한지. 이것저것 따지는 것도 많아요. 아주 그냥 천무지체를 구하려는 건지, 참 나."
제자 요건을 엄청나게 따지나 보다.
뭐, 돼도 좋고 안 돼도 좋고.
사실 안 되는 편이 낫긴 하다.
처음에는 기대 만발이었으나, 차분히 생각해 보니 절대 아니다.
다 이유가 있다.
거지라고 다 같은 거지가 아니다.
나만 해도 그냥 거지가 아닌 비걸개 아니겠는가?
거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보통 거지, 그냥 거지, 흔히 보이고 말하는 그 거지 말이다.
개걸개(丐乞丐)라 한다.
빌어먹는 거지다.
주요 임무도 구걸해서 배때기 부르게 먹는 거다.
길거리에서 정보를 물어 오는 건 부업이다.
부업이라 우습게 보이지만, 중원 전역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거지가 한 달에 한 가지씩만 정보를 물어 온다고 쳐 보자.
감당 안 될 엄청난 양이다.
개방 거지의 9할 9푼 9리가 이런 개걸개다.
그다음은 나.
비걸개가 있다.
비걸개에 대해서는 다들 이제는 충분히 아니까 설명할 필요 없고.
그리고 무걸개(武乞丐).
소림사에도 학승(學僧)이 있고 무승(武僧)이 있듯, 우리 거지들도 전문적으로 무력을 수련하는 거지들이 있다.
이들을 무걸개라 한다.
총타, 그러니까 방주와 몇몇 장로들이 거느리고 있는 무력대가 모두 무걸개들이다.
그다음으로… 없다.
응, 딱 세 종류 거지만 있다.
좀 있어 보이려고 여러 종류 있다고 말한 거다.
그냥 세 종류 거지가 전부다.
거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
이 장로의 제자가 된다는 건, 비걸개가 아닌 무걸개가 된다는 뜻.
그런데 왜 싫냐고?
무걸개도 구걸한다.
젠장할!
미친 거 아니야?
수련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구걸까지 해야 한다.
항상 그런 거는 아니지만, 분명 무걸개도 구걸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싫다.
걸룡 무치개의 제자가 된다는 게, 그 엄청난 무학을 고스란히 전수받는다는 게 정말 욕심나지만.
몇 번을 말한 대로, 구걸하는 건 죽는 것보다 싫다.
거기에 더해 옷도 누더기 거지 옷을 입는다.
이래저래 힘센 거 빼고 다 마음에 안 든다.
* * *
봉사 활동 7일 차.
"육 장로님, 내기 하나 안 하실래요?"
"내기? 갑자기 무슨 내기?"
육 장로는 물론 이곳 거지 소굴의 어린 거지들과도 상당히 친해졌다.
"수련하는 데 진전이 없습니다. 그 돌파구를 찾고 싶어요."
"도와달라는 말이군?"
"네."
"그냥 말하지."
"재미없잖아요."
"풉. 그래. 무슨 내기를 할 텐가? 만약 자네가 이기면 내가 진심으로 가르쳐 줌세."
"아직 어떤 문제인지 말하지도 않았는데요?"
"외공 때문 아닌가?"
아! 이 양반 말이다.
사람을 참 헷갈리게 한다.
좀 있어 보이다가도 술 먹고 헬렐레하는 거 보면 또 한심해 보이다가 다시 뭔가에 집중해서 일할 때면 진짜 개방의 장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지금처럼 장난 좀 치려고 하면 또 이렇게 의중을 꿰뚫어 사람을 놀라게 한다.
"맞아요. 근골, 체력, 무재……. 요약해 말하면 외공이 맞네요. 그것 때문에 타구봉법 전반결 후초식에 아무런 진전이 없어요. 그냥 몸뚱이가 찢어질 것처럼 아프기만 하고요."
"난 알지."
"정말 그 해법을 아세요?"
"물론이지."
"알려 주실 거죠?"
"원래 그냥 물었으면 대가 없이 알려 줬을 텐데, 자네가 내기를 먼저 제안했지 않은가? 자네가 내기에서 이기면 내 성심성의껏 정답을 알려 주지."
"내기에서 지면요?"
"적당히 알려 주겠네. 클클."
아! 괜히 내기하자고 했다.
그냥 밤에 개고기 한두 근 더 사서 물어봤으면 알려 줬을 텐데.
됐다.
어차피 이 내기, 내가 이긴다.
"좋아요. 일단 나가시죠."
육 장로를 데리고 더러운 움막 밖으로 나왔다. 그런 후.
"얘들아! 모여라!"
"와아아아! 먹을 거! 먹을 거!"
어린 거지들이 또 환장하며 몰려들었다.
"무얼 하려고 애들까지 부르나?"
난 품속에서 짚으로 감싼 달걀 꾸러미 두 줄을 꺼냈다.
달걀이 각기 다섯 알씩 총 열 알이다.
"제가 이 달걀들을 깰 겁니다. 그리고 저는 이 달걀 열 알에서 총 스무 개의 노른자가 나오는 것에 걸 겁니다."
"와아아아! 먹을 거! 먹을 거! 두 배! 노른자 두 개!"
어린 거지들이 또 환장을 했고, 육 장로도 재미있는지 피식 웃는다.
"나도 행운석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고 있네.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나?"
"한번 보시죠."
"좋네, 내기 수락이네."
오랜만에 어린 거지들이 조용해졌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내 손에 들린 달걀에 초집중 상태다.
아놔!
이렇게 조용하면 얼마나 예뻐.
온종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먹을 거 타령이니.
쩝.
안쓰럽긴 하다.
"자! 시작한다."
그렇게 첫 번째 달걀을 깼다.
탁!
결과는?
"와아아아아! 노른자 두 개! 노른자 두 개!"
아이들이 다시 환호성을 질렀고, 육 장로도 신기하다는 눈빛을 했다.
"다시."
탁!
"와아아아! 노른자 두 개! 먹을 거 두 배! 신기해! 또! 또 해 줘!"
탁!
탁!
탁!
열 개의 달걀을 모두 깼다.
그리고 노른자는 정확히 스무 개가 나왔다.
"와아아아! 달걀이 두 배로 늘었다! 먹을 거 많다! 먹자! 먹어!"
아이들은 환장하며 좋아했고, 육장로도 눈이 화등잔만 해져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기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 * *
"검을 아무리 휘둘러도 박이라는 굳은살은 박이지 않고 살이 찢어져 피만 납니다. 보법과 신법을 수련하면 관절이 퉁퉁 붓고, 근육은 찢어져 지독한 고통에 쓰러지고 맙니다. 육 장로님 말씀대로 문제는 외공입니다. 제 몸은 내공을 받쳐 주긴커녕 무공을 익힐 기본조차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구나."
"정말 간절합니다, 육 장로님."
"그래, 그래서 뭘 알고 싶은 겐가?"
"외공을 빠르게 상승의 경지로 이끌 수 있는 비기를 알려 주십시오."
피식 웃는다.
그러고는 또 사발 가득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워 버린다.
"참, 녀석하고는. 그 나이에 1갑자나 되는 내공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이제는 외공까지 욕심을 내? 뭐, 천하제일인이라도 되려고? 하하."
천하제일인?
그런 거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다만, 지금 너무 답답하고 힘들다.
그래서 간절하다.
빠르게 외공을 내공만큼 상승의 경지로 끌어 올릴 방법 말이다.
"분명 그 해법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가르쳐 주신다고 약속하셨고요."
"자, 정답을 알려 줄 테니 새겨듣게."
"네, 육 장로님."
나는 자세까지 바로잡아 앉아 가며 육장로의 입에 집중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자네는……."
"네."
"기본자세부터 틀려먹었어."
"네? 그게 무슨……. 지금 비기를 알려 주기 싫어서 괜한 말을 하려는 거 아니시죠?"
"쯧쯧. 듣는 자세도 글러 먹었군."
"아, 아닙니다. 새겨듣겠습니다."
"무공은 공평한 거라네."
뭔 소리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천하제일의 갑부나 거지나, 무공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다는 말이야."
"좀 더 풀어서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요?"
"땀을 흘린 대가만큼 그 성과를 얻는다는 거지."
"하지만 분명 타고난 무재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다 핑계야. 아니, 있어도 극복해야지. 상승의 경지로 가려면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많은 땀과 피를 흘려야 해. 그것만이 유일한 길일세. 무인들이 고수를 존경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 다른 장로들이 이 장로의 말에 한 수 접어 주는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고."
"……."
"나보다 더 많이 노력했고, 더 많은 땀과 피를 흘려 지금의 경지에 이른 거야. 그러니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지. 무재? 신공? 영약? 기연? 부수적인 것밖에 되지 않아. 감히 당대의 거지 중 그 누가 무치개 이 장로보다 더 극한의 수련을 극복해 냈다고 말할 수 있겠나? 결국 무공은 피와 땀, 그것으로 결과를 얻게 된다네."
힘이 빠지는 소리다.
엄청난 외공의 비급이나 비기 같은 걸 원했는데.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육 장로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인자한 미소까지 지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부른다.
"걸이번."
"네, 육 장로님."
"무공에 왕도란 없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