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걸십이번!"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그렇게 쓰러진 걸십이번을 향해 달려갔다.
죽었다.
목이 9할가량 잘렸고, 그곳을 통해 피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이미 죽어 버린 녀석을 그렇게 끌어안았다.
"걸… 걸십이번……. 흑흑, 은혜도 못 갚았는데, 이렇게 먼저 가면 어떻게 해……. 흑흑. 엉엉. 미안, 미안해. 미안해. 엉엉엉."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놈이 투덜거리며 줬던 찬밥 한 덩어리가 생각나 내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그때 뒤에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개이번의 놀란 음성이 들릴 듯 말 듯.
"걔, 걔도… 우리… 비걸……."
무시했다.
아니,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그것도 아니다.
걸십이번의 죽음이 너무 슬퍼, 내가 미칠 것 같았다.
내 온몸을 걸십이번의 피가 적시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녀석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고 울고 또 울며 오열을…….
개새끼!
쉬이이이익!
개이번이다.
놈이 개 자 배 비걸개들의 절기인 연환칠응검(連環七鷹劍)의 절초를 갑자기 내 뒤에서 펼친 것이다.
나를 죽여 살인멸구…….
그러고 싶었겠지.
나만 죽으면 놈이 지금껏 모은 돈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난 놈의 연환칠응검을 피하지 않았다.
죽은 걸십이번을 꼭 끌어안은 채 그 상태 그대로 놈의 검을 등으로 받았다.
퍼퍼퍼퍼퍼퍼펑!
검기다.
놈은 확신했을 테다.
내 몸에 정확히 일곱 개의 구멍이 뚫려 죽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난 놈에게서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감지함과 동시에 내공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호신강기.
언감생심, 검기 따위가 2갑자가 훌쩍 넘는 호신강기를 파훼할 수는 없다.
천천히, 나는 놈의 공격을 등으로 고스란히 받아 낸 뒤 그렇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우우우우우우웅—
내 주위로 대기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였다.
새하얗게 질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렇게 나를 보는 개이번 빌어먹을 거지새끼.
"비걸개 수칙 18항, 배신자는 즉결 처분한다."
저딴 놈을 상대로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자, 무지막지한 강기가 양 주먹에 지랄 돌풍처럼 맺혔다.
이제는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는 개이번.
난 놈을 노려보며,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천천히 다가갔다.
"제, 제발… 살려 줘. 살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쾅!
쾅!
쾅!
쾅!
때렸다.
한 방에 죽이면 안 됐다.
힘을 조절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갑작스레 늘어난 내공 때문이 아니라, 걸십이번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또 개이번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다.
콰콰콰콰쾅!
쾅!
쾅!
쾅!
그래서 비스듬히 때렸다.
쓰러진 놈을 때리고, 때리고, 다시 또, 계속.
그렇게 놈의 면상을 수십 번이나 갈겨 댄 후 또 때렸다.
쾅!
쾅!
쾅!
이미 한참 전에 놈의 머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때렸다.
죽은 놈의 몸에 올라타, 원래 있어야 할 놈의 머리가 없는 그 땅을 계속해서 내리쳤다.
눈물이 계속 쏟아져서, 그 눈물이 멈출 때까지 때렸다.
결국 내 눈물이 멈춘 후에야 나의 주먹질도 멈췄고.
개이번의 머리가 있어야 할 그곳엔, 석 장이 넘는 깊이의 구덩이만 깊게 파여 있었다.
소매로 대충 얼굴을 훔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쟁은 이미 멈춘 상태다.
내가 개이번에게 첫 번째 주먹을 날렸을 때부터 모두의 동작이 멈췄다.
수천 명의 무인이, 쓰러진 상태로 또 피를 뒤집어쓴 상태로 그냥 놀람을 넘어 경악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고작 반 갑자 내공의 개이번이 마을 최고수로 인정받던 동네에서, 어디 2갑자가 넘는 권강을 본 적이라도 있었겠는가.
동네 코흘리개들 주먹다짐에 갑자기 적토마를 탄 여포가 나타나 방천화극을 휘두른 격이리라.
그렇게 모두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질려 전쟁을 멈추었다.
동작을 멈추고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나 하나의 눈치만 살피며 사정없이 떨고 있다.
내 임무는 이미 실패다.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 한다.
나는 나만을 보고 있는 수천의 무인들, 그 전장을 한 번 쭉 눈으로 훑은 후 목소리에 내공을 실었다.
"철검방, 철마방, 흑오회 수장들 앞으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공도 싣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나오라고."
타타타타타타타탓!
곤륜파의 운룡대팔식을 보는 듯했다.
아니, 유령문의 유령신보가 저럴까?
모르겠다.
아무튼 셋은 정말 귀신과 같은 속도로 달려와 내 앞에 섰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덜덜 떨어대는 사지가, 그들이 지금 얼마나 놀랐고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차렷 자세로 덜덜 떨며 나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까 초집중 상태인 세 명의 수장.
하지만 아니다.
놈들의 그런 표정으로 내 화가 다 풀리지 않는다.
"대답."
"넵!"
나직한 나의 한 마디에, 마치 군영의 신병이 그러하듯 우렁차게 대답하는 놈들.
목소리가 조금 작았으면, 그 핑계로 몇 대 때려 주려고 했는데.
아쉽다.
그런 내 기분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나 보다.
두려움에 덜덜 떠는 와중에 또 흠칫하는 세 놈들이다.
"지금 바로 각자의 문파로 돌아간다. 딱 한 명, 단 한 명이라도 이탈자가 생기면, 한 명에 한 대. 너희가 맞을 거야."
조금 전 내 주먹의 위력, 권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본 인간들이다.
"아 씨, 대답 계속 안 할래?"
"넵! 넵!"
울먹이며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세 사람.
"곧 무림맹에서 사람들이 찾아갈 거다. 숨겨 놨던 현철에 관련된 장부며 기록이며 모두 잘 보관하도록. 만약 글자 하나라도 빼돌렸다가 걸리면, 알지? 글자 한 자에 한 대씩. 너희가 맞을 거야."
"넵!"
이번엔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돌아가 아무도 나오지 마라. 문밖으로 나오면 그 즉시 죽는다. 도망가면 땅끝까지 쫓아가 죽인다. 죽일 거다. 반드시, 반드시! 죽이고 말 테다. 대답."
"네에에에엡!"
수천의 무인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땅에 쓰러진 사람들까지 목이 터져라 그렇게 외쳐 답했다.
다시 세 명의 수장을 향해.
"실시."
눈알만 굴린다.
구우우우우우우우웅.
내 주변으로 돌풍이 몰아치며, 주먹에 권강이 맺히기 시작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실시."
"네엡!"
"회군! 회군! 방으로 돌아간다! 부상자 한 명도 빼놓지 마!"
"회군! 우리도 철마방으로 돌아간다! 죽은 놈들까지 모두 챙겨! 어서!"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회군하기 시작했다.
다친 사람들은 물론, 시신까지 한 구도 빼놓지 않았다.
삽시간이었다.
그리고 흑오회의 앞 커다란 벌판에는, 그들이 뿌려 놓은 핏빛 대지와 두 구의 시체만이 남게 되었다.
걸십이번과 머리가 사라진 개이번의 몸뚱이.
걸십이번을 어깨에 올리고, 개이번은 땅에 질질 끌며 나도 움직였다.
* * *
"야! 술. 술을 왜 이것만 사 왔어?"
"아이고, 넉넉히 사 왔는데, 분타주가 다 마셨잖아요."
"더 사 와."
"나도 좀 먹읍시다. 에잇 X팔!"
"어라? 저 새끼가 지금 욕했냐?"
"왜요? 한 대 치시게? 맞을 때 맞더라도 좀 먹고 맞읍시다."
쉰 명에 달하는 거지들.
명색이 개방의 방도란 놈들이,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 왁자지껄했다.
거지가 거리로 나가 구걸을 하지 않으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턱이 있겠는가.
"어? 분타주, 저 새끼 또 왔는데요?"
"뭘 가지고 오는……. 허걱! 저, 저 새끼 사람 죽였나 봐요!"
"에이, X팔 놈. 시체를 왜 이리로 들고 와? 적당히 아무 산에나 묻어 버리지."
놈들이 뭐라 하건, 그냥 갔다.
그렇게 놈들 코앞까지 가.
툭.
툭.
걸십이번과 개이번의 시체를 땅에 내려놓았다.
머리가 사라진 개이번을 알아보지 못했고, 걸십이번의 존재는 처음부터 몰랐던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분타주가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다.
"뭐야? 삼결제자면 다야? 이런 뒤치다꺼리나 하라고 우리가 있는 건 줄 알아? 어린놈의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
퍽!
쉬이이이이이이잉.
쿠당탕탕.
그냥 주먹 한 대 날렸더니, 저 멀리까지 날아가 벽에 부딪힌 후 쓰러졌다.
분타주가 맞아 쓰러졌는데도, 이게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가?
애들이 쓰러진 분타주와 나를 번갈아 보며 눈만 껌뻑껌뻑한다.
뭐, 현실감이 없으면 있게 해 주면 된다.
"너희, 좀 맞자."
퍽퍽퍽!
퍼퍼퍼퍼퍽!
퍽퍽퍽!
"으아아악!"
"거지 살려!"
"아! 사람 죽는다!"
"살려 주세요!"
퍽퍽퍽!
퍼퍼퍼퍽!
퍼퍼퍼퍼퍽!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렸다.
계속 때렸다.
그렇게 나는 무려 한 시진이나 쉰 명에 달하는 거지들을 사정없이 마구 두들겨 팼다.
얼마나 고기들을 많이 처먹었는지, 뱃살이 두둑해 타격감이 끝내줬다.
그래서 더 팼다.
퍽퍽퍽!
퍼퍼퍼퍼퍽!
"엉엉엉."
"살려 주세요, 대협. 엉엉."
울고불고 무릎을 꿇고 빌어 대는 거지들.
그래서 또 때렸다.
"그냥 죽여라!"
"으아아악!"
"죽여, 악마야!"
"엉엉엉. 으아아악!"
욕해서 더 때렸다.
때리고, 때리고, 나중에는 내가 너무 지쳐 때릴 수 없었다.
근육들도 찢어질 것 같고, 숨은 가빠지고, 무엇보다 놈들을 때린 내 주먹은 물론 발까지 피부가 찢겼다.
확실히 내 근력과 체력, 지구력, 거기에 피부까지. 2갑자의 내공을 받쳐 주지 못하고 있다.
아! 뼈마디까지 욱신거리네.
그래서 결국 주먹질과 발길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응, 조금 쉬고 다시 때렸다.
계속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고. 밤새 놈들을 때렸다.
* * *
밤새도록 거지들을 두들겨 팬 후 아침이 되어 다시 마을로 나왔다.
총타에 보내는 전서구는 어제 이미 띄웠다.
정오가 되기 전 횡산으로 수백 명에 달하는 무림맹과 주변 문파의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철검방, 철마방, 흑오회에 흑철광산까지.
그들은 온 곳을 쥐잡듯 잡고, 또 사람들을 취조했다.
반항은 없었다.
난 해가 지기 전까지 상황을 주시하다가 다시 횡산 분타로 돌아갔다.
* * *
개방 횡산 분타로 돌아왔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새로운 이들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죄다 거지들이다.
"자네가 걸이번인가?"
"네, 그렇습니다."
"난 서안 분타주 심안개(心眼丐)라고 하네."
"네."
나이가 지긋한 거지.
사결제자다.
아마 거지가 안 됐다면, 학문을 익히는 학사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외모다.
그리고 그가 데리고 온 20여 명의 거지들.
이곳 횡산 분타의 거지들과 달리 죄다 허리에 매듭이 있다.
이결제자가 여럿이고, 일결제자가 열댓 명이나 된다.
나에게 밤새 맞아 부러지고 피 흘리다 퉁퉁 부어 버린 횡산 거지들을 한데 모아 대충 포박한 후 감시 중이다.
뭐, 감시하지 않아도 도망갈 상태가 아니긴 하다.
"일 처리를 제대로 해 주었군. 한 명도 도망간 놈이 없어. 대신 이놈들이 걸을 수 없어서, 우리 애들이 수레를 몇 대 구하러 가 시간이 좀 지체가 되고 있네."
"죄송합니다."
"자넬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닐세."
"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나쁜 건 아니었다.
아마 이번 일에 대해 심안개 분타주도 상세히 보고받고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나를 탓하지도 않고, 또 적개심을 품거나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냥 좀 어색할 뿐이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저도 포박하시죠."
내가 양손을 내밀어 심안개에게 말했다.
하지만 심안개는 내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분명한 의미를 담은 말이다.
심안개가 개인적으로는 나를 죄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반대로 공식적으로는 나를 죄인이라 인정한다는 뜻이다.
착잡했다.
"그냥 가세. 어차피 나에게는 비걸개를 심판할 권한 같은 건 없어. 자네에 대한 처분은 총타에서 내릴 걸세."
"네."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나와 심안개 사이에서는 이렇다 할 대화가 없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가 내 곁을 지나가며 전음을 보내기 전까지는.
- 자네, 우리 개방에서 방규(幇規)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아나? 그건 바로 의(義)와 협(俠)일세. 잘해 주었네. 더 이상 비걸개는 못 하게 될지 몰라도, 벌을 받거나 하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은 말게나.
아! 위로가 안 된다.
내가 비걸개가 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마음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어쩌면 이제, 나도 거리로 나가 구걸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