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7화 (16/174)

17화

교묘하군.

철검방주는 철검방으로 가지 않았다.

횡산의 서쪽 끝자락.

철검방의 쌀을 비롯한 곡물의 일부를 보관하는 창고다.

대놓고 경계를 삼엄하게 할 수 있을뿐더러, 외진 곳이라 오가는 이도 거의 없다.

철검방주가 탄 마차와 그를 호위하는 호위 무사 열댓 명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어둠을 틈타 담을 넘었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난 후.

삼엄한 경계라고 해 봐야 대부분이 삼류다.

그나마 댓 명의 이류 무사와 일류 두 명이 있다.

일류 무사 중 한 명은 철검방주가 떠나자마자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나머지 한 명이 세 명의 이류 무사와 댓 명의 삼류 무사를 이끌고 창고를 나와 말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철은 놈의 손에 들려 있다.

난 빠르게 신법을 발휘해 놈들의 앞을 점한 후.

쉬이이이이이익!

타타타타탓!

"누구냐! 으악!"

하아!

미리 복면을 쓰길 잘했다.

이류와 삼류는 순식간에 제압했지만, 마지막에 일류 녀석이 쓰러지기 전에 나를 봤다.

괜찮다.

어둠이 잔뜩 깔렸고, 내 얼굴은 복면으로 완전히 가렸으니.

죽이진 않았다.

조금 강하게 기절을 시켰으니, 몇 시진 푹 자고 일어나면 절뚝일 수는 있을 거다.

나는 곧, 일류 무사 녀석의 품에서 주먹만 한 현철 세 덩어리를 빼내었다.

어쩌지?

이거 세 덩어리 다 가지고 가?

걸십이번이 소량만 있어도 된다고 했는데.

그래, 욕심내지 말자.

내가 할 일은 증거를 수집하고 보고하는 것까지다.

문제는…….

아놔! 돌겠네.

이 현철이, 씨팔 조금만 떼어 내려고 하는데 도대체 부서지지도, 잘리지도 않고.

아!

순도 100분지 100의 현철.

검에 강기까지 주입해서 자르려고 해도 잘리지 않는다.

어쩌지?

곧 날이 밝을 것 같고, 이 녀석들도 깨어날 텐데.

그냥 한 덩어리만 가지고 갈까?

그럼 더 이상할 텐데?

에라이, 모르겠다.

세 개 다 들고 간다.

* * *

쾅!

"왕삼! 왕삼, 일어나! 일어나라고!"

오랜만에 밤새도록 몸을 썼더니 많이 피곤했나 보다.

늦은 시각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개이번이 문을 부술 듯 열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아… 뭔데요? 어?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요?"

"어서 일어나 준비해."

"뭘요?"

"전쟁이야."

"네?"

"조금 전 우리 방주님하고 철마방의 방주님이 흑오회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셨어. 어서 준비해. 우리가 선봉에 서야 하니까."

뭐야?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어? 설마?

"무슨 일 때문에 전쟁을 선포한 건데요?"

"몰라, 흑오회에서 우리 무인들을 습격했대."

"죽었대요?"

"그건 아닌데, 귀한 물건을 흑오회에서 훔쳐 갔다는군. 전쟁을 일으킬 만큼 중요한 물건."

이 새끼들이 미쳤나.

현철 때문에 전쟁을 해?

아니, 잠깐.

나 때문인가?

하아, 돌겠네. 어쩌지?

일단 빨리 총타에 보고를 해야겠다.

"뭐 해? 어서 검 챙겨서 나가야 한다니까."

그런데 개이번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선배."

"쉿! 조룡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조룡이고 개룡이고,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바빠 죽겠는데, 뭔 소리야?"

"비걸개 수칙 6항, 임무 중 절대 문파 간의 세력 싸움에 직접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 비걸개 수칙 3항, 비걸개의 임무는 정보를 획득하고 보고하는 것으로 끝난다. 비걸개 수칙 9항, 피치 못할 사정이 발생하고, 판단이 어려울 경우 총타에 보고하고 지시에 따른다. 비걸개 수칙 12……."

"야!"

"……."

"장난해?"

이 새끼가 미쳤군.

"장난하냐고!"

"내가 장난하는 거로 보여?"

"하아! X팔. 야, 너 지금까지 받은 돈은 어쩌려고? 네가 마신 술이며, 기녀들을 품는 데 쓴 돈은? 코흘리개들한테 삼재검법이나 가르치는 교두에게 이런 방과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며, 식사, 품삯. 그게 가능한 걸로 보여? 어떻게 보고할 건데?"

"X새끼."

"걸이번. 네가 나를 어떻게 욕해도 좋아. 하지만 말이야. 말했지? 융통성, 합리성. 이곳에서 정보를 얻고, 계속해서 이 지역을 감시하려면 우리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돈 때문이 아니고?"

"이봐, 걸이번!"

놈이 소리를 질렀다. 진짜 화난 얼굴이다.

"그래, 나 돈 좋아해. 하지만 지금까지 모든 게 증명해 주고 있잖아! 내가 얼마나 노력했고, 또 제대로 이곳을 감시하며 정보를 습득하고 있는지."

"미친 새끼."

"뭐? 지금 너 말 다 했어?"

"현철."

"현철이 뭐? 지금 그 얘기를 왜 해?"

"계속 채광되고 있었다고, X신 새끼야."

이 새끼 진짜 모르고 있었나 보다.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말도… 말도 안 돼."

"내가 이미 확인했어. 증거까지 확보했고."

이제는 덜덜 떨기까지 한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절대 그릴 일이 없다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듯하다.

하지만 놈도 비걸개다.

빠르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다.

"일단, 일단 가자. 내게 과오가 있다면, 그 죗값을 치르겠다. 우선 전쟁부터 끝내고,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끝까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너, 지금까지 이놈들에게 이용당했던 거야. 너나 나나, 개방에서 보낸 사람들인 것까지 모두 알고 있었고, 일부러 현철을 뺀 나머지 진짜 정보를 네게 흘렸던 거라고."

"내가 책임질 일은… 내가 책임진다. 하지만 전쟁은 치러야 한다."

"끝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

"어차피 상대는 흑도들이 모여 만든 흑오회야. 너도 정파의 무인이라면! 의와 협을 숭배하는 개방의 방도라면 싸워야 할 거 아니야!"

"미친놈. 그 모든 것보다 비걸개의 임무가 우선이란 거 안 배웠어?"

"난 간다. 가서 적들을 죽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철검방주와 철마방주에게 직접 확인하겠다."

흑오회가 흑도들의 모임인 건 중요치 않다.

저 새끼 눈빛.

탐욕이 이글거린다.

지금까지 모아 놓은 돈을 모두 날려 버릴 수 있다는, 그 탐욕과 초조함이 지금 개이번의 뇌를 지배하고 있다.

됐다.

내가 말릴 수준으로 미친 것도 아니고, 상관할 바도 아니다.

"그래, 가라. 난 총타에 직접 보고를 올리러 갈 테니까."

이곳이 아닌 다른 곳.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도읍으로 가면 전서구를 날릴 수 있다.

개이번은 분노와 탐욕 그리고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그렇게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나갔다.

아니, 막 나가려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나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로. 놈이 손을 천천히 움직여 검의 손잡이로 가져갔다.

뽑지 마라.

뽑으면 이번엔 진짜로 죽인다.

비걸개 수칙 18항.

배신자는 즉결 처분한다.

스르릉.

놈의 검이 검집에서 세 치가량 뽑혔다.

더 뽑으면 죽는다.

그런데 그때.

쉬이이이 척!

놈이 재빠르게 검을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훗, 깜빡 잊고 있었군. 네놈이 비걸개 수석 수료생이란 걸. 난 내 방식대로 진실을 파헤치겠다. 공조는 끝이다."

놈은 그 말만을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곧 철검방의 무인들이 병장기를 들고 우르르 몰려 정문을 통과하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전쟁이 일어날 모양이다.

철검방과 철마방이 합심한다면, 아마 흑오회는 한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할 테다.

내가 새벽에 현철을 훔친 게 불씨이긴 했으나, 결정적 원인은 그게 아니다.

욕심이다.

셋이 나눠 먹던 걸 둘이 나눠 먹으려는 욕심.

됐다.

그게 무엇이 됐든, 나는 내 임무에만 충실하면 된다.

어제 빼돌린 현철을 품에 넣고, 나는 곧바로 이웃 마을을 향해 움직……. 아! 망했다.

흑오회에 걸십이번 있는데. 이 새끼, 거기 있다가 그냥 개죽음당할 텐데.

어쩌지?

구해 주면 안 되는데.

그게 우리 비걸개의 수칙인데.

나한테 구걸한 밥을 제일 많이 나눠 줬던 걸십이번인데.

그냥 죽게 둬?

하아!

X팔.

난, 이웃 마을이 아닌 흑오회를 향해 몸을 날려야 했다.

* * *

챙챙챙!

채채채챙!

퍽!

퍼펑!

"끄아아악!"

"살려 줘!"

"막아! 막으라고!"

"아아악!"

흑호회 본진.

난데없이 들이닥친 철검방과 철마방 무인들이 흑오회 무인들을 거의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수백 명에 달하는 흑오회 무인들이 죽어 나갔다.

처음 보는 전장은 정말 끔찍했다.

그리고, 그 끔찍한 곳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간이 한 명 있었다.

개이번.

저 새끼가 진짜로 미쳤나 보다.

눈에서 광기를 마구 뿜어대며, 실제로 미친놈처럼 마구 검을 휘둘러 흑오회 무인들을 도륙하고 있다.

말리고 싶었지만, 무력으로 놈을 제압하고 싶었지만,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지금 나는 임무 수행 중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아! 사실 여기 있어도 안 되는데.

아니지, 전쟁이 어떻게 치러지는지 확인하는 것도 주요 임무지.

암, 그렇지.

그런데 걸십이번 녀석은 어쩌지?

놈이 위험해도 도와줘서는 안 되는데?

돌겠네.

아니, 살아 있긴 한 건가?

아! 저기 있다.

챙!

채채챙!

챙챙!

퍼펑!

열댓 명에게 휩싸여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상처를 잔뜩 입었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없다.

호흡도 거칠지 않고, 전력을 다하지 않고 일부 힘까지 숨기며 싸우는 중이다.

걸십이번을 둘러싼 철검방과 철마방의 무인 중 일류는 한 명, 나머지는 죄다 이류와 삼류다.

일류 무인 한 명만 어떻게든 제압한다면, 이곳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을 테다.

그리고 그때!

퍼퍼퍼펑!

걸십이번이 위태위태한 척 싸우다, 결정적인 순간 검기까지 발기해 일류 무인을 죽였다.

곧 커다란 빈틈이 생겼고, 걸십이번은… 큭큭큭.

그래, 잘 가라 걸십이번.

네가 위험했으면 착한 내가 구해 줬을 테고, 그러면 간신히 붙은 비걸개에서 떨어져 구걸하러 다녀야 할 뻔했다.

큭큭큭.

몸을 잔뜩 숨긴 채 걸십이번이 도망가는 걸 보고 있는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지.

하하!

됐다.

놈이 산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나도 총타로 보고하러 가야겠다.

그렇게 나는 몸을 돌려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전장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멈춰라! 간악한 흑도의 개종자 새끼야!"

콰콰콰쾅!

광기에 젖은 익숙한 목소리.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몸을 돌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불안함과 불길함, 아니 그냥 무서워 볼 수 없었다.

내가 몸을 돌려 그곳을 봤을 때, 무슨 일이 벌어져 있을지 확인하는 게 너무 두려웠다.

그래도 해야 했다.

나는, 나는 그렇게 천천히 또 천천히 몸을 돌려 전장을…….

X팔!

이제는 완전히 광인이 되어 버린 개이번이…….

* * *

쓰윽.

녀석이 오늘도 퉁명스러운 표정과 함께 나에게 더러운 손을 내밀었다.

손에는 나뭇잎으로 감싼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먹어."

"오! 고기야? 고기? 고기가 어디서 났어?"

"어디서 나긴? 오늘이 방가장네 막내딸 시집가는 날이라, 다들 구걸하러 간다고 아침부터 난리 났었잖아. 거기서 구걸해 왔지."

"고기다, 고기. 헤헤. 매번 고맙다, 걸십이번.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은혜 하나는 꼭 갚거든. 이거 나중에 열 배, 아니 백배로 갚는다. 약속."

"은혜는 됐고. 넌 제발 꼭 비걸개 돼라. 거지새끼가 구걸을 안 해서 어떻게 먹고살려고 그러냐? 한심하긴. 쯧쯧."

녀석은 그렇게 싸가지 없게 말을 하면서도 툭, 역시나 커다란 나뭇잎에 둘둘 만 밥 한 덩어리까지 더 던져 주고 난 후에야 자리로 돌아갔다.

매번 저런 식이다.

녀석 덕분에 나는 매일매일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X팔.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녀석이 죽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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