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6화 (15/174)

16화

알았다.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어지는 법.

모든 일에는 분명 빛과 그늘이 존재한다.

소인국에서 2갑자의 내공을 얻었지만, 대신 치명적인 손실이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나의 비걸개 역량이 퇴보했다.

왜?

비걸개의 주요 임무는 뭐다?

첩보다.

그런데 암투가 난무하는 무림과 달리, 소인국 사람들은 아침 이슬처럼 맑고 순수하지 않은가.

그들과 함께한 1년 동안 나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또 누군가와 심리전을 펼칠 필요도 없었으며, 계략을 꾸밀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된 거다.

이곳 횡산에 온 지 한 달이 지나고 있다.

개이번이 모으고 정리한 정보는 완벽했다.

내가 뭘 비집고 들어갈 틈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더 찝찝했다.

혹시 몰라 여기저기 살피고 들쑤시며 정보를 캐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어느 날은 내가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다녔더니, 철검방의 방주가 나를 불렀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보라고, 왜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는 고생을 사서 하냐고 하더라.

그러면서 내가 궁금했던 내용을 모두 알려 줬다.

증거, 증인, 기록지, 장부까지 죄다 보여 주며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능력한 비걸개의 끝판왕이 된 느낌이었다.

특히나 걸십이번과의 접촉은 아예 불가능했다.

횡산의 정세 때문이다.

평범했던 광산에서 50여 년 전 현철이 수백 근이나 채광되었다.

당연히 엄청난 수의 사람과 돈이 몰렸다.

돈과 사람이 모이니 세력도 생겨났다.

그렇게 이곳 횡산에 원래부터 있었던 삼류 무관과 문파들이 연합하여 만든 게 바로 철검방이다.

철마방은 이곳의 지주들이 연합하고, 돈으로 외부에서 무인을 데리고 와 만든 세력이다.

횡산이 원래 철보다는 말로 유명했고, 이곳의 지주들은 죄다 마방(馬房)을 운영하던 자들이라 이름도 철마방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흑오회.

이들은 횡산의 현철과 돈을 노리고 외부에서 몰려든 흑도와 사파 무리들의 연합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원래 이곳 출신인 철검방과 철마방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외부에서 온 흑도 무리인 흑오회와는 적대적 관계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걸십이번과 접촉할 수 없었던 이유다.

뭐, 이젠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나도 많이, 아니 그냥 다 내려놨다.

한 달 정도 대충 더 머물다 총타나 가봐야겠다.

"왕삼아."

- 걸이번.

"네, 조룡 형님."

- 네, 개이번 선배님.

"우리 철검방 소방주님하고 철마방 소방주님이 철선루에 가서 술 한잔하자고 하시네. 같이 가자."

"저도요?"

"그래, 내가 소방주님들한테 말 잘해 놨어. 네가 숨은 고수라고."

- 그러니 적당히 분위기 맞추고, 떠나기 전에 한몫 두둑이 챙길 생각이나 해.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아, 네."

그래, 가자.

어쩌면 처음부터 난 이런 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 *

철선루(鐵仙樓), 자시(子時, 밤 12시) 경.

"마셔! 하하하! 뭐해, 왕 삼이. 자네도 잔 비우라고."

"네, 넵. 하하. 저 소피 좀."

"어여 다녀와. 춘월이가 자네를 제대로 벼르고 있으니까."

"네, 소방주님."

아! 취한다.

철검방, 철마방의 소방주와 개이번 그리고 기녀 여섯 명까지.

술을 수십 병이나 마셨다.

소방주 녀석들, 말은 명령조에 조금 거칠어도 나를 엄청 배려해 준다.

철선루에서 가장 예쁘다는 춘월이를 내 옆에 붙여 준 것만 해도 그렇다.

스윽.

앞섶 깊은 곳을 살폈다.

아직 제대로 있군.

조금 전 우리 철검방의 소방주가 내게 전낭을 하나 건넸다.

살짝 가벼웠다.

실망하려던 찰나, 셋이 나를 보며 히죽히죽 웃기에 전낭 안을 확인해 봤다.

멀건 게 아닌 누런 게 들어 있었다.

금자.

가훈이고 유언이고 그냥 비걸개 때려치우고 여기에 말뚝 박을까?

피식 웃었다.

타락한 거지가 된 느낌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능력함에서 오는 상처가 타락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내 꼴이……. 어?

저, 저 새끼.

기루의 뒷마당, 비틀거리며 바지춤을 풀고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려고 하는데, 나보다 먼저 온 놈이 있다.

걸십이번이다.

쉬이이이이익.

새끼, 얼마나 처마신 거야?

저러다 오줌 줄기가 담벼락 넘겠네.

질 수 없지.

솨아아아아아아악!

놈의 오줌 줄기가 냇물이라면, 난 폭포수다.

큭큭큭.

난 어깨를 한 번 들썩인 후 녀석을 향해 턱을 치켜세웠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걸십이번.

비틀비틀, 게슴츠레한 눈을 떠 나를 본 후에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려 버리는 걸십이번.

비걸개의 수칙을 지키기 위해 나를 모른 척하는 게 아니다.

술에 만취해서, 그냥 내가 누군지도 못 알아보고 있다.

저 녀석이 성질은 더러워도 일 처리는 확실했었는데.

별수 없나 보다.

너나 나나 뭐,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마음먹은 대로만 되면 그게 어찌 인생이겠냐?

그렇게 오줌을 다 휘갈긴 녀석이 바지춤을 올리고는 비틀비틀, 철선루 본관을 향해 갔다.

- 한 식경 후, 별관 뒤뜰. 너는 두 번째 측간, 나는 세 번째 측간. 암구호 변비, 변비, 똥이 안 나와. 답, 조용히 쌉시다.

어라?

저 새끼 뭐야?

취한 거 아니었어?

그나저나, 됐다.

녀석과 접선할 수 있게 됐다.

뭐, 이제 와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말이다.

* * *

"끄응. 끄으으응. 아, X팔. 변비 때문에 똥이……. 끄으응. 똥이 안 나오네."

"거, 조용히 좀 쌉시다. 자기만 똥 싸나? 집중 좀 하게."

"아, 네. 죄송합니다."

걸십이번이다. 바로 옆 칸.

- 취한 거 아니었어?

- 임무 수행 중에 진짜로 취할 수는 없잖아.

새끼, 여전히 투덜거리는 말투다.

- 그런데 너, 벽으로 막혀 있는데 전음 가능하네?

원래는 안 됐다.

미천한 무공 실력만큼이나 전음 실력도 미천해서.

가까이 붙어 제대로 볼 수 있는 상대에게나 전음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2갑자가 훌쩍 넘는 내공 덕분에 가능해진 거다.

- 응, 너무 무시하지 마. 이 정도는 가뿐하다고.

- 음, 그렇군.

-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야? 흑오회에도 비걸개 선배가 잠입하고 있었어? 우리 선배는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 아니, 없어. 나만 따로 투입됐어.

- 왜? 첫 임무는 선배와 함께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 사연이 있어. 원래 호각문이라는 문파로 임무를 받았는데, 호각문이 무림맹에 입맹할지 안 할지 동태를 살피는 거였어. 그런데 내가 호각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녀석들이 입맹을 해 버렸지 뭐야.

- 아! 새 된 기분이었겠군. 그래서 이곳으로 온 거야?

- 응. 가장 가깝기도 했고, 10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안전한 곳이기라고 해서 네가 임무를 마치고 떠날 때 함께 복귀하라는 명령까지 받았어.

- 한 달만 대충 버티다 가자. 봐서 알겠지만, 별 볼 일 없는 곳이다.

대답이 없다. 뭐야? 무시하는 거야? 그렇게 약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 너…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뭐지? 뭐라도 발견했나?

- 무슨 소리야?

- 걸이번 너 이 새끼…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한 거야? 네 선배라는 새끼는 또 뭐고?

갑자기 술이 확 깼다. 걸십이번 저 녀석,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그때.

- 현철이 유통되고 있다.

* * *

하루가 지났다.

나는 온종일 내 방에 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걸십이번의 말이 사실일까?

- 경계가 삼엄해서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어. 흑철광산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건 확실해. 현철을 얻어야 해. 소량의 현철만 얻어 그걸 증거로 총타에 보고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삼엄한 경계 때문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해.

아!

X팔.

현철이, 현철이 유통되고 있었어.

언제부터?

모른다.

분명한 건, 걸십이번의 말이 사실이라면 흑철광산에서 채광되는 현철은 중원이 아닌 새외로 유통된다는 뜻.

그랬기에 발각되지 않았고, 그 어떤 소문도 잡을 수 없었다는 것.

흑철광산에서 빠져나온 현철은 곧바로 새외로 가게 될 것이다.

그전에, 증거를 잡아야 하는데.

아니, 근데 걸십이번 말이 맞긴 맞아?

뭘 잘못 본 거 아니야?

개이번이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는 분명 완벽한데.

설마… 개이번이 이곳 사람들과 결탁한 건가?

아니면, 이곳 사람들이 개이번을 완벽히 속였다는 건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 걸십이번은 불가능하지만, 나는 가능하다.

왜?

소인국에서 2갑자의 내공만 얻어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밤, 내가 간다.

* * *

닷새가 다시 지났다.

나는 매일 밤 은밀히 철검방을 빠져나와 흑철광산으로 갔다.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예전에 한 번 말했지만, 장기공은 은형술의 한 갈래라 할 수 있다.

나의 장기공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남과 동시에, 은형술 역시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 냈다.

그걸 떠나, 이미 소인국에서 먹이 활동을 하며 갈고닦은 내 기감은 비걸개 총교두가 직접 맥문을 잡아 확인해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다.

이곳의 삼류 따위에게 발각되는 일은 절대 없다.

문제는, 닷새가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어?

저 새끼, 철검방주인데?

곧이어, 철마방주와 흑오회주까지 은밀히 움직이며 이곳 흑철광산으로 모여들었다.

* * *

"아이고. 흑오회주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하하."

"철검방주님, 철마방주님. 두 분 다 평안하셨습니까?"

"에이, 열흘 전에 봐 놓고 무슨 예의들을 차리시나. 빨리 앉아서 분배나 확실히 하고 흩어집시다."

"네, 네, 그러시죠들."

흑철광산의 외진 곳에 지어진 목조 건물.

그 안에 횡산의 3대 무문 수장들이 모였다.

난 지붕에 올라 작은 구멍을 뚫어 이들을 감시하는 중이다.

아! 감이 온다, 와.

뭐가 있긴 있었어, 젠장할.

그때, 또 다른 인물이 등장했다.

흑철광산의 광산주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정확히 삼등분해 놨습니다. 확인하시죠."

현철이다. 주먹 크기의 현철이 여러 개다.

"이번엔 양이 왜 이 모양이야?"

"아시지 않습니까? 현철의 양이 계속 줄고 있다는 걸요."

"우리 말고 딴 데 빼돌리는 거는 아니고?"

"제가 목숨이 한 개인데, 어찌 그런 무모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나저나 개방에서 왔다는 어린 거지는 어떻습니까?"

"쯧쯧. 자네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네, 그럼 믿겠습니다. 그리고… 값을 좀……."

"허어! 이 사람 아주 돈에 눈이 멀었구먼! 우리가 제값을 쳐주고 있는데, 뭔 소리야? 진짜 나 화나는 꼴 봐야 정신 차릴 거야?"

"아이고, 아닙니다.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봐. 광부들 좀 다그쳐서 제대로 일하라고 하고. 말을 안 들으면 때려. 그런 놈들은 맞아야 일을 제대로 한다고."

"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광산주가 나갔다.

"진짜 괜찮은 거야?"

철마방주가 철검방주에게 물었다.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그 어린 거지새끼? 걱정 말라니까. 요즘 뻔질나게 기루를 들락날락하며, 기녀들 후리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한 달 정도 있다가 갈 거라고 그러더군."

"조룡과 나머지 거지새끼들은?"

"조룡 그 새끼는 더하지. 아주 돈에 환장한 놈이야. 우리가 건네는 정보도 맹신하고 있고 말이야. 그리고 개방 분타, 큭큭큭. 아놔, 거지새끼들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안 처먹어. 아오!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아무튼 그놈들은 돈만 있으면 개방이 아니라 우리에게 충성할 테니, 아무 걱정 말라고."

"음, 아무튼 자네만 믿네. 돈과 정보는 계속 보낼 테니, 방심하지 말라고. 상대는 개방이야."

"네, 저희 흑오회에서도 약속한 돈과 정보는 틀림없이 보내겠습니다. 철검방주님만 믿습니다."

개이번이 모았던 그 정보들, 수백 권의 책자와 수만 장의 서류들.

아! 글씨체가 달랐던 이유가…….

미친 새끼.

저놈들이 건넨 정보를 그냥 보관하다가 나에게 준 거였어.

개이번 이 새끼, 진짜 돌았나?

비걸개나 되는 새끼가 10년 동안 저놈들 손바닥에서 놀아났다는 거잖아!

"그런데 흑오회주님."

"네, 철검방주님."

"요즘 그쪽 애들이 자꾸 우리 애들을 건드리며 분란을 일으킵디다. 무슨 딴마음을 품고 계신 거예요?"

"그럴 리가요. 애들 단속 철저히 하겠습니다."

둘 사이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고, 철마방주가 나섰다.

"우리는 지금 황금알을 낳는 오리를 함께 키우고 있습니다."

"거위 아닌가?"

"어험, 그거나 저거나. 아무튼 지금까지 잘해 오고 있는데, 만약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욕심을 내면 그 오리는 죽는 겁니다."

"거위라니까."

"욕심내지 맙시다, 흑오회주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흑오회주는 그렇게 말하며 철검방주를 슬쩍 보았다.

"나? 나는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현 상태에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오. 알지 않소? 내가 돈을 얼마나 많이 모으고 있는지."

"그래, 그래. 철검방주도 또 흑오회주님도 지금까지 해 왔던 것만큼만 계속합시다. 끝도 없이 황금알을 낳는 오리의 배를 가르는 우는 범하지 말자고요."

"거위라니까."

말들은 그렇게 했지만, 세 사람 사이에는 은근하면서도 미묘한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다.

원래 그렇다.

나쁜 새끼들은 서로를 믿지 못한다.

그래도 칭찬해 줄만 하긴 하다.

나쁜 새끼들끼리 그 오랜 시간 아슬아슬한 동거를 계속 이어 왔다는 게 말이다.

됐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

오늘 저 현철을 일부 빼돌려 총타에 보고한다.

그러면 총타에서 무림맹에 바로 정보를 보낼 것이고, 곧바로 무림맹에서 직접 움직일 테다.

어쩌면 황궁에서 움직일 수도 있고.

어떻게 되든, 저 새끼들의 황금알을 낳는 오리인지 거위인지는 죽게 된다는 뜻이다.

세 사람이 각자의 현철을 들고 목조 건물에서 나와 흩어졌다.

나는 그중 철검방주의 뒤를 은밀히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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