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그가, 다가온다.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한 발, 또 한 발.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렇게 천천히 또 천천히.
어쩌지?
일단 쥐어패야 하나?
아니면 자리를 피할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개이번은 어느새 한 걸음 앞까지 왔다.
칼 뽑지 마라.
뽑으면 뒈진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이번은 계속해서 살기를 슬금슬금 흘리며 내 코앞까지…….
씩.
씩?
놈이 웃는다. 뭐지?
"큭큭큭. 이봐, 걸이번 후배."
"……?"
"장난이야, 장난. 하하하! 분위기가 그럴싸해서 장난 좀 쳐 봤다고. 졸기는, 하하하!"
내 어깨에 손까지 올리며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는 개이번.
하지만 농담이 아니다.
이건 경고다.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했다가는, 진짜로 죽일 거라는 경고.
그 덕분에 놈은 까마득한 후배에게 두들겨 맞는 불상사는 면하게 됐다.
곧, 개이번이 철완개 분타주를 향해 눈짓을 보냈고 분타주가 뒤에 있는 거지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덜거덕 덜거덕.
수레?
갑자기 웬 수레?
거지들이 낡은 수레를 하나 끌고 오는데 음, 책자가 수십 권에 서류 뭉치가 다시 수만 장은 되는 듯하다.
"뭡니까?"
내가 개이번을 향해 물었다.
"하여간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후배님 같으니라고. 내가 더도 말고 딱 열흘만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았나?"
"……."
"내가 지난 10년 동안 모은 정보들이야. 대부분은 총타로 보고한 것들이지만, 확실치 않아서 아직 보고하지 않은 내용도 있다네. 휴우, 내가 이거 깔끔하게 정리해서 보여 주려고 열흘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건데. 성미하고는."
난 투덜거리는 개이번을 뒤로하고 수레로 다가가 책자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이곳 횡산의 주요 세력의 변천사와 현 상황을 일목요연하면서도 상세하게 정리해 놨다.
다른 책자에는 이곳의 주요 인물들에 관한 정보가 또 빼곡히 적혀 있다.
무공, 재력에서부터 사소한 습관과 현재 누구와 외도하는지까지.
다른 책자에는 주요 인물 외에도 많은 이들의 정보가 담겨 있다.
포목점 주인, 기루에 새로 들어온 기녀, 철마방 숙방의 숙수가 셋째 아들을 언제 낳았는지까지.
흑철 광산에서 철이 언제 얼마나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또 가격의 책정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그 유통 과정이 전부 기록되어 있다.
이걸 모두 혼자 다 수집하고 정리한 건가?
"놀랐나?"
응, 놀랐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개이번을 봤다.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개이번.
"융통성이라는 거야.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거고."
"부정할 수 없군요."
"더 볼 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검방에는 내가 말해 두지. 길거리에서 웬 아녀자를 보고는 뒤를 졸졸 따라갔다고. 아마 며칠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고. 철완개 분타주 따라가서 천천히 읽어 보도록 해."
"네."
개이번은 그 말만을 남기고 내가 조금 전 올라왔던 그 길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총타에 어떤 보고를 올릴지, 또 내가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내가 불러 세웠다.
"선배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는 개이번.
"아닙니다."
사실 사과하려고 그를 부른 거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아직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이번은 그런 나를 잠시 보는가 싶더니 피식 웃고는 손까지 흔들어 준 후 다시 걸음을 떼었다.
* * *
정확히 사흘 동안 횡산의 쓰러져 가는 관제묘, 그러니까 이곳 개방 분타에서 개이번이 모은 정보를 검토했다.
확실히 엄청난 양과 질의 정보다.
아마 일꾼으로 잠입하였다면, 절대로 모을 수 없었을 것들이다.
그가 얼마나 대단히 또 열심히 임무에 임했는지 이젠 의심할 필요 없다.
하지만 분명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비걸개의 수칙을 어긴 것 또한 사실이다.
여전히 모르겠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한 가지 더.
아무리 개이번이 뛰어나고 열심히 했다고 해도, 그가 모은 정보의 양과 질이 실로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냥 철검방, 철마방, 흑오회에서 대놓고 정보를 줬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개이번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훌륭한 비걸개인가?
아니면,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한 건가?
그것도 모르겠다.
동료들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만난 비걸개니 말이다.
"대충 다 본 것 같은데, 이젠 좀 가지? 삼결제자가 눌러앉아 있으니까, 다른 거지들이 불편해하잖아. 구걸도 안 하면서. 쯧."
이곳의 분타주 철완개다.
나이는 쉰네 살, 일결제자다.
첫날부터 나한테 반말이고, 지금까지 계속 반말이다.
아무리 거지들이 근본도 없고 위아래를 우습게 안다지만, 분명한 위계가 존재한다.
매듭이다.
난 삼결, 철완개는 일결.
"거, 대충해. 거지가 그렇게 꼼꼼해서도 안 돼. 대충대충 술도 먹고, 돈도 좀 챙기고, 그렇게 쉬다 가면 될 걸, 누가 알아준다고 그렇게 열심히 해?"
아씨, 계속 반말하네.
짜증이 나서 슬쩍 허리춤의 삼결 매듭을 일부러 보여 줬다.
하지만…….
"흥."
되돌아오는 건 콧방귀뿐.
아! 저 인간 진짜 막 나가도 너무 막 나가네.
일단 개방의 매듭부터 정리 좀 하자.
무결제자, 그냥 거지다.
개방에 입방한 거지.
일결제자, 무공 좀 되는 거지다.
타구봉법 1초식과 2초식을 제법 휘두를 줄 안다.
그리고 이런 산골이나 내가 살던 시골의 분타주도 일결제자다.
철완개가 그렇고, 낭만개 역시 일결제자다.
그다음 이결제자.
타구봉법을 무려 5초식까지 익혔다.
개중에는 일류 무사급도 있다.
횡산과 같은 이런 마을 여러 개를 총괄하는 분타주거나, 행정 구역과 그 규모 면에서 도읍이라 불릴 만한 곳의 분타주가 바로 이결제자 되시겠다.
다음, 삼결제자.
타구봉법을 10초식까지 익혔다.
항주, 소주, 낙양, 서안과 같은 진짜 대도읍은 아니지만, 인구가 수십만 명은 족히 되는 커다란 도읍의 분타주가 이에 해당한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타구봉법은 대단한 것이고, 이를 10초식까지 익혔다는 건 보는 관점에 따라 엄청난 고수라 불릴 수 있는 이들이다.
대부분의 비걸개가 비공식적이지만 삼결제자에 포함된다.
사결제자.
타구봉법을 15초식까지 익힌 진짜 고수들이다.
항주, 소주, 낙양, 정주, 서안, 무한 등 중원의 대도읍을 총괄하는 분타주다.
구파와 오대세가가 있는 지역을 총괄하는 분타주 역시 사결제자다.
이쯤 되면, 이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엄청난 고수다.
사결제자 중 절정의 고수가 꽤 있다는 소문은 절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오결제자.
타구봉법 16, 17초식.
개방 총타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대단한 무력의 대주들이 이에 포함된다.
또, 도읍이 아닌 하나의 성을 총괄하는 분타주가 바로 오결제자다.
그냥 고수도 아닌, 무지막지한 고수들이다.
개중에는 초절정 고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육결제자.
개방의 장로 여섯 명이 바로 육결제자다.
이들은 타구봉법의 전반결 마지막 초식인 18초식을 익히고 있다.
이들의 무공 경지에 대해선 함부로 평가하기도 어렵다.
중원의 모든 거지에게 거의 신선처럼 떠받들어지는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칠결제자.
부방주와 전설처럼 들려오는 거지들의 수호자가 칠결제자라 한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팔결제자.
방주다.
걸왕(乞王) 귀행개(鬼行丐)가 바로 그다.
"이보시오, 철완개 분타주."
"왜?"
"내 허리에 세 개의 매듭 안 보이시오?"
"보여. 뭐? 어쩌라고?"
아놔, 저 거지를 그냥 확!
휴우, 참자.
무식하고 성질이 더러우니 거지가 됐겠지.
"됐수다."
"그만 가 봐. 우리 애들이 어렵게 구걸해 온 밥 뺏어 먹지 말고."
"안 그래도 가려던 참이었소. 그리고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사흘 동안 구걸한 밥은 한 번도 먹지 않았소. 어디 거지들이 구걸은 하지 않고 객잔에서 음식을 사다 먹을 생각을 하는지. 쯧쯧."
"돈이 있는데 왜 구걸을 해? 이게 바로 융통성이고 합리적인 거라고! 안 나간다, 잘 가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거지 소굴을 나왔다.
아니, 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또 왜?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분타주 글자 아오?"
"글자를 알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그럼 여기 다른 거지 중에 글자 아는 거지 있소?"
"없어! 거지들이 글자는 알아서 뭐 해?"
"알았소."
난 다시 등을 돌려 거지 소굴을 나왔다.
내 뒤로 철완개의 잔소리가 들려왔다.
"철검방주님하고 철마방주님이 살벌하긴 해도 다 좋으신 분들이야. 여기 거지들이 구걸하지 않고 이렇게 배불리 먹고사는 게 다 그분들 덕분이라고! 괜히 들쑤시고 다녀서 우리 거지들 굶어 죽게 만들지 말고, 적당히 대충하다가 가, 어린 놈의 새끼야!"
하아! 저 인간.
내가 여기 뜨기 전에 제대로 손 한번 보고 간다.
이건 개인적인 화를 풀려는 게 아니라, 개방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어험, 몇 대만 때리고 가야겠다.
안 그러면 화병 나 죽겠다.
사실 이해를 못 하는 것도 아니다.
개방은 확실히 다른 무문과 그 속성을 달리한다.
1대 제자니, 2대 제자니 하는 항렬이나 배분 같은 건 아예 없다.
한 명의 사부를 모시는 경우에나 자기들끼리 사형이니 사제니 하고 부르지, 보통 거지들은 그냥 ‘어이’, ‘아저씨’, ‘거기’ 등 그냥 부르는 게 호칭이다.
정식 방도만 50만 명이고, 그냥 거지들까지 합치면 수백만 명 아니겠는가?
남쪽 끝자락의 광동 거지가, 저 멀리 북쪽의 하북 거지를 만나 사숙이라고 부르고, 사질이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할 터.
무엇보다 대부분의 거지가 글자도 모르고 예의란 걸 배우지 못했다.
휴우, 됐다.
그러려니 해야지.
그나저나 이상하네.
분명 사흘 동안 읽었던 책자며 서류며 글씨체가 다른 게 여럿 있었는데, 이곳 분타의 거지들은 글자를 모른다고 하고.
개이번 혼자 그 많은 정보를 기록했다는 뜻인데, 왜 글씨체가 다르지?
다른 조력자가 있나?
쩝.
그것도 알아봐야겠네.
* * *
철검방으로 돌아가는 길.
확실히 이곳은 부유한 동네다.
대도읍이라고 착각할 만큼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동시에 내 머리도 지끈거린다.
동네는 부유하고, 거지들 배때기는 부르고, 개이번은 홀로 엄청난 양의 정보를 모았고.
철검방, 철마방, 흑오회의 세력 구도가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정작 10년 동안 이곳 횡산은 전쟁은커녕 칼부림 한번 제대로 일어난 적이 없다.
철완개 말마따나 내가 괜히 들쑤시고 다니다가 일을 그르치는 게 아닐지 걱정도 되고. 개이번 말대로 적당히 하다가 총타로 가야 하나?
그게 맞는 걸까?
그렇게 수많은 사람 사이를 걷고 있을 때.
걸십이번 녀석을 봤다.
분명 걸십이번이다.
내가 개미 밟지 말라고 지랄발광할 때, 나에게 뭐라고 했던 그 녀석 말이다.
비걸개 훈련생 때, 구걸한 음식을 가장 많이 나눠 줬던 그 녀석.
걸십이번이 왜 여기에 있지?
아!
녀석도 이곳으로 임무를 받았나 보다.
그런데 내가 있는 철검방도 아니고, 철마방도 아닌 흑오회의 무사 복장을 하고 있다.
허리에 도까지 차고 있고. 흑오회로 잠입한 건가?
일꾼이 아닌 무사로?
흑오회는 칼 좀 휘두르고 주먹질 좀 해 봤다면, 개나 소나 무인으로 받아 준다고 하니.
무인으로 잠입하는 게 쉬워서 그랬나?
모를 일이다.
엇!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녀석은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우리 비걸개의 규칙 때문이다.
임무 수행 중 절대 다른 비걸개를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그런데 왜지?
분명 이곳은 10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개이번이 정보도 제대로 수집하고 있는데.
총타에서는 왜 걸십이번을 이곳으로 보낸 것일까?
흑오방에도 다른 선배 비걸개가 있었나?
그건 모를 일.
개이번도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일단, 녀석을 만나 봐야겠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걸십이번과 접촉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