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4화 (13/174)

14화

멀뚱멀뚱.

껌뻑껌뻑.

나와 조금 전 숲속에서 똥을 싸고 온 사내.

둘이 아무도 없는 산길에 나란히 앉아 대화도 없이 그냥 눈만 계속 껌뻑거렸다.

어색한 침묵이 한참이나 이어진 후.

"하필 그때 똥이 마려워… 어험, 미안하네. 많이 아픈가?"

"아니요, 뭐. 그냥, 괜찮습니다."

다시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수석 수료라며?"

"아, 네. 그게 운이 좀 따라 줘서."

"하아! 살다 살다 비걸개 수석 수료생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날이 오는군. 반갑네. 난 개이번일세."

"아, 네. 반갑습니다."

"자넨 걸이번 맞지? 나도 자네 정보 받고 많이 놀랐어. 나랑 같은 이번(二番)이라서, 하하하! 처음 시작에 좀 오해가 있었지만, 이것도 인연 아닌가? 한번 잘해 보자고."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아까 왜 그냥 맞고만 있었나? 무공도 익히지 않은 일반 여인에게."

"그게… 비걸개 선배님이신 줄 알고 그랬습니다. 제가 암구호를 틀려서 혼나나 하는 생각도 했고요. 무엇보다 이번 임무가 철검방(鐵劍幫)의 일꾼으로 잠입해 동태를 파악하는 일이라, 무공을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임무 수칙 때문에 그랬습니다."

"아! 그렇지. 뭐, 음, 그래."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개이번이다.

정말 이건 또 무슨 인연인가 싶다.

난 걸이번, 선배는 개이번.

그나저나 개이번도 분명 철검방의 일꾼으로 잠입해 있다고 임무지(任務紙)에 적혀 있는데, 입고 있는 옷은 비단으로 만든 무복이다.

허리에 검까지 차고 있고, 얼굴에는 개기름이 좌르르 흐른다.

내가 임무지를 잘못 봤나?

아닌데.

첫 임무라 읽고 또 읽어 외운 수준인데.

음, 뭐야?

"들었겠지만, 첫 임무는 그냥 실습이야. 알지?"

"네, 그런 수준의 임무라 들었습니다."

"임무는 무슨. 이번 임무의 가장 핵심이 뭔가?"

"네, 흑철광산(黑鐵鑛山)에서 현철(玄鐵)이 채광되는지 파악하고, 또 만약 현철이 생산되면 이를 가공하고 유통하는 철검방(鐵劍幫), 철마방(鐵馬幫), 흑오회(黑烏會)에서 사파나 마교 혹은 새외로 빼돌리는지 감시하는 것입니다."

"그래, 맞아. 그거야. 그리고 말이야, 내가……."

"……?"

"이 일만 10년을 해 왔어. 계속 철검방에 머물며, 낮이고 밤이고 눈에 불을 켜고 살피고 또 살폈다고. 그런데 진짜 문제가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현철이 없어. 거, 50년 전에 한 번 와르르 나온 이후, 한 번도 현철이 생산된 적이 없단 말이지. 상급의 철은 여전히 엄청난 양이 쏟아지지만, 그것의 유통이 황법이나 무림맹의 맹규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또 방에서 우리에게 내린 임무에도 그것에 관한 내용은 없고."

"아… 그렇지요."

"현철이 안 나는데, 뭘 감시하겠나? 안 그런가?"

"네, 그렇기는 하네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게."

"현철이 50년 동안 생산되지 않았는데, 왜 방에서는 개이번 선배님을 계속 이곳에 머물며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일까요?"

"오! 예리한 질문이군. 그건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지. 자네 현철의 값이 얼마인지 아나?"

"같은 무게의 황금과 같다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그렇게 비싼 게 현철이야. 하지만 값이 그렇지, 실제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현철은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거라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검 한 자루를 만들 때, 손톱만큼의 현철만 섞여도, 서로를 죽여 가며 차지하고 싶은 보검이 된다네."

"네,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거야. 50년 동안 현철이 생산되지 않았어도, 그게 언제 또 나올지 모르거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만약 50년 전처럼 수백 근의 현철이 나오고, 그게 또 사파나 마교로 넘어간다고 생각해 보게. 아! 끔찍하지, 끔찍해."

"그렇군요."

"그래서 이게 뭐다?"

"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뭔지 아냐고?"

"음, 혹시 있을 정마대전이나 정사대전을 대비하는 중차대한 일?"

"큭큭큭. 틀렸어."

"그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

"꿀보직. 큭큭큭."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부러워하지는 마. 자네도 언젠가 나처럼 좋은 자리 하나 꿰차게 될 테니까, 하하하! 이만 가자고! 실습이고 꿀보직이고, 왔으면 임무는 수행해야지, 안 그런가?"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 * *

사실 어렸을 적부터, 그러니까 비걸개 후보가 된 순간부터 꿈이 있었다.

부잣집으로 잠입해 그곳에서 한 자리 떡 차지하고, 평생 눌러앉는 거.

한마디로 비걸개 최상의 극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첫 임무는 일꾼이다.

철검방이 부자이긴 한데, 철검방이 부자지 그곳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부자는 아니지 않겠나.

그래도 구걸하지 않아도 되고, 또 깨끗한 옷도 입고, 더러운 멍석 위에서 자지 않아도 되니 설레고 기뻤다.

"그런데 여긴 어디죠?"

"빤히 보면서 뭘 묻나? 포목점 아닌가?"

"그러니까 포목점에는 왜?"

횡산 아래에 있는 횡산촌.

철광을 생산해 먹고사는 마을이다.

그런데 확실히 상급의 철이 많이 나오긴 하는 모양이다.

여느 도읍 못지않게 사람도 많고 활기가 넘친다.

그 넘치는 사람들 속, 나는 개이번을 졸졸 따라갔고, 당연히 철검방으로 향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나를 데리고 온 첫 번째는 포목점이었다.

"내 이름."

"조룡."

"네 이름."

"왕삼."

"맞아, 실수로라도 틀리면 안 돼. 그리고 뒤에 형님 자를 붙여. 내 고향에서 온 동생이라고 사람들한테 이미 말해 뒀으니."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긴 왜 왔는지 아직 말씀을 안 해 주셨습니다."

개이번이 나를 위아래로 살핀다. 그런 후.

"임무 활동비 얼마 받았나?"

"철전 80닢."

"지금 얼마 남았나?"

"철전 두 닢."

"쯧쯧. 하여간 나도 거지지만, 우리 개방도 너무하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목숨 걸고 임무 수행하러 가는 비걸개들한테, 겨우 철전 80닢이 뭔가? 그래도 물가가 올라 그런지, 스무 닢 더 줬네. 10년 전에 나는 철전 60닢 받았는데."

개이번은 내가 물은 말에 답하는 대신, 딴소리를 했다.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는 슬쩍 나를 살핀 후.

"자네 융통성이 뭔지 아나?"

"네."

"이곳에서 10년 동안 임무를 수행하며 최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나는 임무를 효율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네."

"……."

"그러기 위해서는 융통성이란 걸 발휘해야 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음, 쉽게 말해 주겠네. 자넨 일꾼이 아닌 무공 교두로 철검방에 들어가게 될 거야. 철검방의 아이들에게 삼재검법을 가르치는 일이지. 문제없겠지?"

삼재검법을 가르치는 일은 당연히 문제 될 게 없다.

내 수준이 아무리 하급이라도, 아이들에게 그 정도도 못 가르치겠나?

하지만 그건 비걸개의 임무 수칙을 어기는 일이다.

"표정이 왜 그래? 말했잖아. 임무를 수행할 때는 융통성을 발휘해야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그게 제가 포목점에 온 이유, 또 일꾼이 아니라 교두로 철검방에 잠입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직접 겪어 봐야 알 텐데. 이봐, 걸이번."

"네, 선배님."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건 현장 책임자로서 내리는 명령이야. 그리고 내가 왜 이러는지 보름, 아니 딱 열흘만 지켜봐.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될 테고, 또 나에게 무지막지하게 고마워할 테니까."

잠시 고민해 봤지만, 이곳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래도 개이번은 이곳에서 10년 동안 무탈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 않나.

"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하하! 좋아. 바로 그거라고. 들어가지. 어이, 왕 서방! 나 왔네."

"아이고, 우리 조룡 대협 오셨습니까?"

나는 포목점에서 비단으로 만든 무복을 무려 다섯 벌이나 맞췄다.

* * *

"여, 여긴……?"

"글자 못 읽나?"

"어머! 조룡 대에에에에혀어어어업!"

"오빠 왔어!"

"오빠아아앙!"

"조룡 오빠, 너무 안 와서 나를 잊은 줄 알았잖아. 아잉."

"어제도 왔었는데 뭔 소리냐, 앵월아? 하하하! 뭐 해, 왕삼이? 어서 들어가자고."

개이번이 나를 데리고 간 두 번째 장소는 기루다.

곧바로 진수성찬이 차려졌고, 짙은 화장의 기녀가 무려 네 명이나 들어왔다.

잠시 후, 나는 철검방과 철마방의 소방주까지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개이번은 철검방, 철마방의 소방주들과 호형호제하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 * *

철검방에 잠입한 지 닷새가 지났다.

개이번이 약속했던 대로 나는 이곳의 아이들에게 삼재검법을 가르치는 교두로 들어오게 됐다.

개이번은 철검방에서 상당한 대접을 받는 교두다.

나이 많은 대교두가 따로 있으나, 실질적 권한은 개이번이 모두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광산촌임에도 돈과 인구, 물자가 넘쳐나는 곳이라 그런지, 산골의 무문이라 하기엔 무인의 숫자도 상당히 많다.

철검방 800명, 철마방 1,200명, 흑오회는 무려 1,800명이나 된다.

이건 뭐, 거의 대도읍의 큰 문파와 비교해도 수적인 면에서는 꿀릴 게 없을 정도다.

개이번을 비롯한 최고수들의 경지가 고작 일류 무사 수준이라는 게 그들과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곳은 보면 볼수록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유한 동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많은 무력을 모으고 있고. 개이번이 철검방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이유도 그것에 있었다.

개이번은 자신의 권력과 인맥을 통해 확실히 엄청난 정보를 모으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비걸개의 임무 수칙을 너무나 많이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첫날을 제외하고 그를 몇 번 보지도 못했다.

간혹 볼 때면 언제나 술에 취해 있고, 도박장에서 도박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긴 맞는 건가?

그리고 나는, 오늘이 첫 번째 보고를 올리는 날이다.

난 먹이 묻은 붓을 들고 한참이나 고민했다.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를 두고 말이다.

만약 내가 현 상황을 모두 솔직히 기록해 보고한다면, 개이번은 그 즉시 총타로 소환될 테다.

비걸개 지위를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큰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그가 10년 동안 거둔 성과가 있지 않겠는가?

만약 내가 개이번을 좋게 꾸며 거짓 보고를 올리면?

발각될 경우 내가 비걸개 지위를 박탈당하고 벌을 받게 될 것.

아! 어쩌지?

확실히 지역의 핵심 인물들과 가깝게 지내며, 효과적인 방법으로 정보를 습득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직 닷새밖에 지나지 않아서, 확신하기는 어렵고.

며칠 더 기다려 봐야 하나?

융통성?

그걸 발휘해야 하나?

아니면 원리 원칙대로?

두 시진째 고민 중이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개이번이 어제 내게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무언가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땐, 주위를 둘러보게. 가장 좋은 건 자신의 현재 모습을 보는 것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태어나 처음 갖는 내 방이다.

커다랗고 포근한 침상도 있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탁자도 있다.

탁자 위에는 문방사우 말고도 다과까지 준비돼 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전신을 볼 수 있는 동경 앞에 섰다.

비단옷이 좋긴 좋다.

내가 이렇게 훤칠했나 싶다.

확실히 옷이 날개다.

그리고 품속에 있는 전낭을 꺼내 그 내용물을 확인했다.

은자란 게 이렇게 생긴 거였어.

은자의 무게는 이 정도였고, 이것들이 여럿 모이면 반짝반짝 예쁜 빛을 발하기도 하고.

휴우, 결정했다.

난 총타에 올릴 보고서를 빠르게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비걸개가 총타에 정보를 보고하는 일은 쉽다.

길거리의 거지를 통하면 된다.

그렇다고 아무 거지에게나 주면 안 된다.

개방의 방도여야 한다.

이를 구분하는 것 역시 쉽다.

허리에 매듭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확실하다.

매듭이 없는 무결제자의 경우에도 구걸할 때는 개방의 방도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긴다.

또 타구봉법을 익혔던 손의 흔적이라던지,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나 말투에도 방도끼리만 알 수 있는 암호 같은 게 있다.

그것도 다 통하지 않을 때는…….

"방도요?"

그냥 아무 거지나 잡고 물어보면 된다.

"무슨 방도?"

"개방 방도냐고요."

"그렇소만……?"

"이름은?"

"행동이 느려터져 다들 만만개(慢慢丐)라 부릅니다."

"이곳 분타와 분타주는?"

"횡산이니 횡산 분타고, 횡산 기슭의 무너져 가는 관제묘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분타주는 누가 철광이 나는 마을의 거지 아니랄까 봐 구걸하는 그릇을 철 밥그릇으로 들고 다녀서 철완개(鐵碗丐)라 부릅니다. 근데 누구쇼?"

"총타로 전할 보고요. 분타주에게 즉시 전하시오."

땡그랑.

철전 몇 닢과 함께 보고서를 그의 구걸 그릇에 넣었다.

그러자…….

"헤헤. 헤헤. 아이고, 공자님! 복 받으실 겁니다! 헤헤. 하하하!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연신 큰절을 하며 기뻐하는 거지였다.

됐다.

보고서는 내 손을 떠났다.

판단은 총타의 몫이리라.

개이번이 임무 수칙을 어겼지만, 10년 동안 제대로 임무를 수행한 것 또한 사실.

총타가 알아서 판단하겠지.

난 그렇게 거지에게 보고서를 넘긴 후 빠르게 자리를 떴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다.

* * *

"이보쇼! 이보쇼!"

철검방으로 돌아가는 길. 웬 거지가 다급히 달려오며 나를 불러 세웠다.

"누구요?"

"누구긴. 보면 모르오? 거지지."

"무슨 일이오?"

"일단 갑시다."

"어디로요?"

"분타주, 철완개 분타주가 급히 그쪽을 찾습니다."

"왜요?"

"혹시 총타에 무슨 보고 같은 거 올렸소?"

"그렇소만?"

"나도 자세한 건 모르나, 무슨 문제가 생긴 듯하오. 그러니 일단 빨리 갑시다."

무슨 일이지?

일단 가 보면 알겠지.

난 빠른 걸음으로 달리듯 걷는 거지를 따라 이곳 섬서 유림 횡산의 개방 분타로…….

어?

이 길이 아닌데?

웬 으슥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에 산적들이… 아니, 삥이라도 뜯으려는 듯 산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거지들이 가득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리고 그 중심에 이곳의 분타주 철완개가 아까 내가 만만개라는 거지에게 전한 보고서를 한 손으로 들고 씩 웃으며 살살 흔들어 대고 있고, 바로 그 옆에는 개이번이다.

놈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너 걸음 앞으로 나와.

"자네, 비걸개가 그토록 안전하다는 첫 임무를 수행하다 죽는 이유가 뭔지 아나?"

아! X팔.

엿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