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3화 (12/174)

13화

"잠깐!"

놈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칠까 하는데, 걸일번이 다급히 불러 세웠다.

"뭐지? 난 나에 대해 말해 준다고 한 적 없다고 했는데."

여전히 우리를 등진 채, 고개만 살짝 돌려 답하는 녀석.

하여간 말 대가리같이 생긴 놈이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해요.

"하지만 우리 모두 자신에 대해 말했잖아."

불러 세운 건 걸일번이지만, 내가 따지듯 말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걸사번이다.

냉소까지 흘리며.

"난 그러라고 한 적도 없어."

"빌어먹을 거지새끼."

"훗."

욕지거리를 했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이었다.

아놔, 저 새끼를 진짜 죽여? 말아?

"잠깐만, 걸사번. 정말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 그것만 말해 주면 안 될까?"

걸일번이 다시 나섰다.

자리를 뜨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꾸하지도 않는 걸사번.

다시 걸일번이 말을 이었다.

"일전에 사형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 왜 제왕검을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그랬더니 사형이 그러더라. 제왕검은 어차피 남궁세가에 돌려줘야 하는 물건이라고. 쓰지도 못할 검을 왜 선택하겠냐고. 너도 분명 그랬잖아. 남궁세가에 돌려줄 거라고. 그런데 왜 선택한 거야?"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걸사번 녀석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걸일번은 물론 나와 걸삼번까지 순간 궁금함에 침 넘기는 소리까지 죽이며 걸사번의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결국, 걸사번의 입이 열렸다.

"내 이름 정도는 말해 줄 수 있다."

뭔 개소리야?

그래도 뭔가 엄청나게 고심한 끝에 이름을 알려 준다니, 우선 듣고 보자.

그 빌어먹을 대단한 이름이 뭔지.

"내 이름은 남궁무검이다."

놈은 그 말만을 남기고 진짜 자리를 떠나 버렸다.

어?

근데, 뭔가 좀…….

아, 이게 뭐지?

저 새끼, 남궁 씨였어?

아!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네.

거지긴 거진데, 성은 남궁 씨고, 다른 보물 다 제치고 제왕검을 선택했고.

아! 뭐야?

첩자야?

그럴 리는 없는데.

진짜 뭐냐고?

아! 재수탱이는 끝까지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그렇게 가 버렸다.

* * *

"걸삼번!"

"넵! 헤헤."

이른 아침, 교두들이 한 명씩 불러 임무를 전달했다.

성적 꼴찌 걸삼번부터 임무를 받았고, 작별 인사고 뭐고 할 사이도 없이 이곳을 떠나 버렸다.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순서대로 임무를 받아 떠난 후, 마지막으로 내가 남았다.

그렇게 총교두가 있는 더러운 움막으로 들어갔다.

"받아라."

"이게 임무입니까?"

"그렇다. 장소, 상황, 임무, 수칙 등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비걸개의 첫 번째 임무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거의 실습이나 견습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로 쉽고 안전한 임무다. 단……."

"네."

"아무리 쉬운 임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네, 물론입니다."

"또,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던 중 사망하는 비걸개가 언제나 있었다. 방심하지 마라. 언제라도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알겠나?"

"네, 총교두님."

"……."

"……."

잠시 총교두와 나는 서로를 보며 눈만 껌뻑껌뻑, 그냥 그렇게 있었다.

"끝…인가요?"

"그렇다. 뭐, 더 다른 거라도 바랐나? 서로 끌어안고 눈물이라도 흘리며 작별 인사라도 해 줄 줄 알았나?"

"아닙니다. 네, 뭐. 그럼 저도 임무를 수행하러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잠깐."

뭐야?

끝났다며?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끝났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임무에 관한 내용은 끝이다. 다만 너는 임무를 마친 후 갈 곳이 있다."

살짝 떼었던 엉덩이를 다시 더러운 멍석 위에 붙였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총타."

"총, 총타요? 총타에는 제가 왜……. 아! 내공 때문이군요?"

"그렇다. 네 내공에 대해 총타에 보고를 했고, 소환령이 내려왔다."

"가면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설마 산 채로 제 몸을 해부하고 그렇지는 않겠죠?"

"쯧쯧. 그걸 농이라고 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나도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나쁜 일은 아닐 테니, 겁먹을 필요 없다. 물론, 임무 중 죽으면 다 헛된 일이 될 테니, 꼭 살아서 총타로 가 보도록."

"네, 총교두님."

"그래, 그럼 가 봐라. 무운을 빌겠다."

"네, 그럼 저는 이만……. 그런데 총교두님."

"……?"

"우리 개방 총타는 어디에 있어요?"

* * *

가끔 이런 소리를 듣는다.

개방의 총타가 하남 개봉(開封)에 있는 거 아니냐고.

응, 아니다.

개방과 개봉.

어감이 좀 비슷해 일부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지어내는데, 아니다.

거지에게 집이 어디 있겠는가?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더 높은 거지의 조건을 요구하는 게 개방이다.

그래서 방주도 장로들도 집도 없고 절도 없고 돈도 없다.

그러면 총타는 없다는 건가?

응, 그것도 아니다.

방주가 부르고 장로들이 모이면 그곳이 바로 총타다.

한 마디로 유형화된 총타가 아닌 유동적이고 상징적인 게 바로 개방의 총타라, 이 말씀이다.

그러면 개방에는 진짜 집도 절도 없냐?

그것도 또 아니다.

개방 역사만 1,000년이 훌쩍 넘는다.

그동안 모아 놓은 정보만 해도 기와집 수십 채에 다 보관하지 못할 분량이다.

거기에 거지들이 주워 모은 무공들은 또 얼마나 많겠나?

또 무공 말고도 이것저것, 거지들이 좀 많이 주워 오고 그걸 또 다 보관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작금에 이르러 중원 전역에 안가 비슷한 개념의 비밀 분타가 수백, 수천 개 존재한다고 알려진다.

비밀 분타의 위치와 관련 정보는 개방에서도 특급으로 취급하는 비밀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비밀 분타의 소재와 무엇을 보관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전부를 파악하지 못하게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이는 개방의 장로들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며, 유일하게 방주만이 중원 전역의 비밀 분타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다른 건 대충대충 해도 정보에 관해서는 나름 굉장히 철저하게 관리하는 거지들 되시겠다.

음, 그런데 걸일번이 왜 저기에 있지?

우리 비걸개 비밀 수련장이 있는 이름도 없는 산을 막 내려왔을 때.

그곳 산기슭의 좁은 길에 걸일번이 쭈뼛쭈뼛.

어? 나를 봤다.

그러고는 반갑게 손을 흔든다.

얼굴은 왜 빨갛게 물들어 있는데?

"걸이번."

"안 갔어? 왜 여기 있는 거야?"

"너… 너를 기다렸어."

"나? 나를?"

아! 뭔가 싸하다.

이 분위기, 이거 말이다.

알 것 같은데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될 그런 묘한.

걸일번 홍설아의 볼은 더더욱 새빨개지고.

몸은 또 왜 그렇게 뱀처럼 배배 꼬는데?

"사실……."

말하지 마.

제발, 제발 부탁이니 말하지 말아 줘.

"사실 알고 있었어."

"응? 뭘?"

아! 난처하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

"네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

울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런데 얼굴은 어색하게 웃어야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예전엔 맞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 얼마나 고심하고 또 용기를 내어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상처 주지 말아야 하는데.

걸일번!

나 사실혼 관계로 함께 사랑했던 여인이 둘이나 있었다고!

내 마음속에는 얇은 발목과 개미허리만이 있다고!

그녀들과 헤어진 지 반년도 안 됐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어!

그리고 너… 허리 너무 굵어.

목 놓아 외치고 싶었지만, 뭐 결국 삼켜야 했고.

"그래서… 많이 생각해 봤는데, 만약… 그러니까 만약 네가 정식으로 고백하면… 생각해 볼게."

응, 그러지 마.

"사귀는 거. 네가 고백하면, 나도 신중하게 생각해 볼게."

고백은 지금 네가 하고 있잖아!

아! 울고 싶다.

부끄럽게 용기를 내어 또 설레는 얼굴로 저리 말하는 그녀에게 모진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덥석!

그녀의 양어깨를 꽉 잡았다.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걸일번 홍설아.

응, 눈 감지 마.

그거 아니야.

"걸일번! 아니, 홍설아!"

"응? 어."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게슴츠레 반쯤 감았던 눈을 번쩍 뜨는 그녀.

"알고 있었구나. 맞아, 너를… 정말 좋아했어."

"진짜 그랬구나……."

"그런데!"

"어?"

"나, 나 말이야!"

"어."

"나 정말 멋진 비걸개가 될래. 엄마에게 약속한 그대로, 또 우리 집안의 가훈처럼. 훌륭한 거지가 돼서 우리 개방에서 받은 은혜를 두 배, 세 배, 열 배로 갚고 싶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어? 어… 응. 지금은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미안. 정말 너를 좋아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내 마음… 이해해 줄 수 있지?"

눈에 힘까지 꽉 쥐며, 그녀를 노려보듯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러자, 그녀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마구 섞여 쏟아진다.

제발, 울지는 마.

제발.

"응! 그래. 너무 멋지다. 나도 사실 그래야 하는 거 알고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나와 사형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이제는 내가 두 사람 몫을 해야 하는데. 깜빡하고 있었네. 고마워, 걸이번. 나도… 나도 너처럼 훌륭한 거지가 돼서 방에 은혜를 갚고, 사부님께도 자랑스러운 제자가 될게."

다행이다.

울면 어쩌나 했는데, 힘을 내며 결의를 다지는 걸일번이었다.

"그래, 걸일번 너도! 그리고 나도! 꼭 훌륭한 거지가 되자!"

"응! 그래. 우리 함께 훌륭한 거지가 되는 거야!"

그렇게 걸일번과 헤어질 수 있었다.

잘한 거겠지?

설마, 내가 떠난 뒤 혼자 울고 그러지는 않겠지?

아! 심란하다.

뭔가 개운치 않고, 뭐 그랬다.

됐다.

그토록 갈망하던 비걸개가 됐다.

첫 번째 임무가 아무리 수월해도, 완벽하게 완수하자.

일단은 임무에만 집중하는 거다.

* * *

섬서 유림 횡산.

임무를 수행하러 오는 데에만 보름이 소요됐다.

그나마 나는 하남에서 섬서까지, 가까운 거리다.

비걸개 절반 이상은 아직 목적지에 도착도 못 했으리라.

그나저나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다.

배가 고파 죽기 직전이네.

비걸개가 되면 임무 진행비 좀 넉넉히 줄 줄 알았더니.

에휴.

거지 옷 다 벗어 버리고, 시전에서 가장 싸구려 무명옷을 사 입었더니 받은 철전의 절반이 사라졌다.

또 이곳까지 오며 아끼고 아껴 끼니만 간신히 때웠는데, 남은 철전은 두 닢이 전부다.

됐다.

일단 임무에 투입되면 그곳에서 의식주는 해결된다.

구걸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감사하게 생각하며 임무에만 집중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활동하고 있는 선배 비걸개와 접선을 해야 한다.

총교두의 말마따나, 첫 번째 임무는 거의 실습 겸 견습.

선배 비걸개가 이미 활동하고 있는 임무지로 투입돼, 선배가 활동하는 것을 보고 배우며 실전 감각을 익힘과 동시에 임무를 수행하는 거다.

그나저나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횡산 동쪽 끝자락 아랫마을로 이어지는 외딴 산길의 아름드리나무 아래.

아! 저기 있다.

어?

근데 여자네?

선배 비걸개가 여자였어?

뭐, 걸일번도 여자인데, 선배라고 여자가 없으리란 법도 없지.

난 선배 비걸개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데 대놓고 인기척을 내며 다가가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는 선배 비걸개다.

뭐지?

아!

그렇지.

접선 암호.

상대의 신분을 파악하기 위해 암호가 필요하다.

"어험, 어험. 어깨가 널찍한 게 장군감이 따로 없소이다. 하하하!"

오! 반응이 있다.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선배 비걸개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누나가 지금 실연당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거든? 좋은 말로 할 때 가라."

어?

어!

와!

대박!

조금 전 닭살 돋았다.

역시 선배는 다르구나.

암구호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읊는다.

아니, 이건 읊는 수준이 아니다.

표정 연기에 실제 분위기까지 살벌하다.

아! 그렇구나.

이렇게 하는 거였어.

뭐든 하나라도 허투루 하면 안 돼.

아무리 암구호라도, 혼신의 힘을 다해 극사실주의로 연기해야 하는 거야!

그래!

오늘 또 하나 배웠다.

그럼 바로 다음 암구호로 나도 최선을 다해서.

양손을 허리춤에 올려놓고, 배를 살짝 앞으로 들이민 후에, 만면에 미소까지 지으며, 호탕하게!

"어디 시원한 계곡물에 가서 함께 옷이나 훌러덩 벗어 던지고, 등이나 서로 밀어 줄까? 하하하!"

"이런 변태 새끼……. 에휴. 참자, 참아. 또 사고 치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몰라. 야! 마지막 경고다. 그냥 가라."

오, 대박!

단순한 암구호를 주고받는 건데, 방금 눈빛!

살아 있었어.

진짜로 나를 죽일 것 같은 눈빛이었어.

암구호가 살짝 틀리긴 했지만, 분명 사실주의 연기를 위한 것일 거야.

역시 선배가 다르긴 확실히 다르구나.

그렇다면 나도 더 열심히 마지막 암구호를!

얄밉게 웃고, 혀까지 날름거리며.

"서로 때를 밀어 주다가, 똥꼬에 낀 콩나물을 발견하면, 발견한 사람이 먹는 거다! 푸하하하하하!"

퍽!

퍽퍽!

퍼퍼퍼퍼퍽!

"개새끼야! 죽어! 죽어, 변태 새끼! 내가 그냥 가라고 했지!"

퍽퍽!

퍼퍼퍼퍼퍽!

퍽퍽퍽!

"누나가! 착하게 좀 살려고! 응! 노력 중인데! 죽어! 변태, 죽어! 변태 새끼!"

퍽퍽퍽!

퍼퍼퍼퍼퍼퍽!

선배 비걸개가 왜? 왜 나를 때리고 사정없이 발로 밟는 거지?

암구호를 틀렸나?

그리고 그때.

바스락 바스락.

아름드리나무 뒤의 수풀 사이로.

뭔가 나왔다.

사내다.

웬 사내가 숲속에서 똥이라도 쌌는지, 바지춤을 엉거주춤 올리며 수풀을 헤치고 나오다가 걸음을 딱 하고 멈추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쓰러져 눈물, 콧물을 흘리며 여인에게 마구 지르밟히고 있는 나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아, X팔!

뭔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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