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2화 (11/174)

12화

"어? 이상하네? 방주님의 제자는 두 명이라고 했는데?"

내가 아니다.

걸삼번이다.

장식으로 들고 다니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묻는 녀석이었다.

나와 걸사번까지 의심 가득한 눈으로, 홍설아가 허언증이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쳐다보았다.

아니, 이름은 진짜 이름 맞아?

하지만 홍설아는 옅은 미소로 걸삼번의 물음에 답했다.

"제자 맞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야. 셋째 사형하고 나를 거리에서 주우셨대. 셋째 사형은 워낙 무재가 출중해서 제자로 삼았고, 남자 제자만 셋을 거두다 보니 귀여운 여제자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셔서 나까지 제자로 삼으셨다고 사부님이 말씀해 주셨어."

"그런데 왜 숨긴 거야?"

또 걸삼번이 물었다.

"비걸개로 키우기 위해서."

"아! 그렇네. 그렇다면 처음부터 존재를 숨기는 게 훨씬 좋겠다. 역시 방주님은 대단히 똑똑한 분이신가 봐. 헤헤."

"이름도 방주님이 지어 주신 거야?"

이번엔 내가 물었다.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계속 의심이 들어 찔러 본 거다.

얘가 진짜 허언증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응, 성은 사부님의 본명에서 따온 거고. 이름은 추운 겨울에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나를 길에서 주워서 설아(雪兒)라고 지어 주셨어."

오! 그럴듯하네.

진짠가?

진짠가 보다.

"걸삼십육번… 아니, 셋째 사형 일은… 괜찮아?"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홍설아는 힘찬 목소리로 답했다.

"응,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아. 사형도 내가 계속 슬퍼하는 걸 바라지 않을 거야. 그래서 기운 차리기로 했어. 하늘에서 지켜볼 사형에게 씩씩한 모습 보여 주려고."

홍설아가 힘찬 모습을 보여 주려는 듯, 일부러 과하게 동작을 취한 후 계속 말을 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은 대사형하고 둘째 사형하고는 많이 어색했고 지금도 어색해. 근데 셋째 사형은 진짜 친오빠나 다름없었어. 비걸개 후보로 생활하면서, 너희 몰래 밥도 슬쩍 챙겨 주고 그랬다? 몰랐지? 그리고 우리 사형은……."

걸일번 홍설아의 입은 멈춤이 없었다.

힘차 보이면서도 슬퍼 보였다.

서로에 대해 말하자고 해 놓고, 결국 그녀는 자신이 아닌 사형에 관한 이야기만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음 슬프면서도 감동적인 상황인데, 내가 진짜 미친 건가?

갑자기 걸일번의 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걸일번 허리가 원래부터 저렇게 굵…….

아니, 살짝 통통했었나?

또, 내 시선은 어느새 그녀의 발목에 닿아 있었다.

굵…….

아니, 살짝 튼실한 발목이다.

팔다리도 많이 짧…….

아!

내가 왜 이러지?

한없이 귀엽기만 했던 그녀의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넙데데하게 보이지?

거기에 얼굴이며 손이며 손톱에까지 때가 꼬질꼬질.

휴우.

내가 미쳤거나, 걸일번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내 눈이 심각하게 높아졌을 수도.

보고 싶다, 내 사랑 얇은 발목과 개미허리.

그녀들은 살아 있겠지?

그래야 하는데.

아! 또 눈물이…….

"걸이번?"

"응? 어! 어, 그래."

"괜찮아?"

한참 조잘조잘 말을 하던 걸일번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 괜찮아. 네 얘기 듣고 있잖아. 걸삼십육번이 네 사형이었다니, 좀 많이 놀라긴 했어."

"그렇지? 휴우. 원래 오늘 사형하고 같이 너희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려고 했었는데. 괜찮아! 내가 사형 몫까지 열심히 하면 사형도 하늘에서 기뻐해 줄 거야."

그렇게 다시 걸일번의 사형에 관한 이야기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다음은 누가 말할래?"

걸일번이 나와 걸삼번 그리고 걸사번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걸사번은 먼저 얘기할 것 같지 않고.

나도 좀 그렇고.

눈에 힘을 줘 걸삼번을 노려봤다.

그러자…….

"그럼… 헤헤. 내가 얘기할까? 난 백둔이야. 스물다섯 살."

저, 저 새끼.

나보다 형이었어?

아! 생긴 게 나보다 형이 맞긴 맞는데.

아니, 생긴 것만 보면 형을 넘어 아저씨뻘인데.

내 나이는 밝히지 말까?

저 녀석한테 형이라고 하긴 싫은데.

"원래 개방도였어? 아니면 태어난 후 입방한 거야?"

원래부터 거지였냐?

아니면 나중에 거지가 됐냐?

걸일번은 이 말을 나름 고상하게 표현한 거다.

"여덟 살에 거지가 됐어. 원래 우리 집은 장례를 전문으로 치르는 장례 술사 집안이야. 그러니까 아버지가 장례 술사, 어머니는 보조. 나도 보조."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그래서 나도 거지가 됐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우리 분타주가 거둬 줘서 살 수 있었고, 비걸개까지 됐네. 헤헤."

"부모님은 어쩌다가 돌아가셨는데? 장례 술사면 위험한 일은 없지 않나?"

"그게… 헤헤. 실은……."

뭐야?

저 녀석 평소 같이 웃는데, 왜 내 마음이 다 아리지?

같은 웃음인데 다른 느낌이다.

"흉일(凶日)에는 장례를 치르면 안 돼. 하루 먼저 치르든가 하루를 미루든가, 그렇게 해야 하거든. 그런데 마을에서 무림인들이 싸우다가 사망자가 생겼고, 그 장례를 우리 아버지에게 치르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흉일이었어."

"아버지께서 거부하셨다가 무림인들에게 당했던 거야?"

"아니, 아버지도 나처럼 겁이 많으셨어. 헤헤."

"좋은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라 그런 거야."

"고마워, 걸일번. 아니, 홍설아."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무림인들의 협박을 못 이긴 아버지가 장례를 치르는데, 하필 비까지 마구 쏟아졌지 뭐야. 관을 묻는데,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산사태가 났고, 아버지와 돕던 어머니, 그리고 거기에 있던 무림인들까지 모두 쏟아진 토사에 묻혀서 돌아가셨어. 그날이 불길한 걸 아셨는지, 아버지께서 나를 집에 혼자 두고 가셔서 나만 살 수 있었어."

걸삼번, 아니 백둔.

그는 계속 미소 지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녀석의 슬픈 미소였다.

걸일번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 줬고,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아픔에 공감해 주었다.

그래도 형이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거다.

뭐, 오늘이 지나면 언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음은 누가 말할래?"

걸일번이 걸사번을 쳐다봤지만, 걸사번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걸이번, 네 차례."

걸일번이 방긋 웃으며 나에게 말했고.

뭐, 나도 무슨 엄청난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냥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내가 내 이름도 밝히기 전에 걸일번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걸일번. 너 구걸해 본 적이 있긴 있어? 나는 그게 예전부터 정말로 궁금했어."

"없어."

단호하게 대답했다.

걸일번, 걸삼번, 무심한 척하고 있던 걸사번까지.

좀 전에 걸일번이 방주의 제자라고 했을 때만큼이나 놀란 얼굴을 했다.

거지가 구걸한 적이 없다는 건, 그만큼 놀라운 일이 맞다.

"그런데 걸이번, 헤헤. 너는 더러운 거 싫어하지? 내가 옆에 앉는 것도 싫어하고. 냄새난다고. 그럼 너는 거지 아니야? 거진데 거지는 아니고, 거지가 맞나? 아! 복잡하다. 나도 궁금했어. 헤헤헤."

걸삼번까지 평소 내 행동의 이유가 꽤 궁금했던 모양이다.

걸이번 여행기를 시작하면서, 초반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게 있어서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게 구걸이다.

거지가 더러운 옷과 구걸을 싫어하면 어쩌냐고?

거지라고 다 거지의 삶에 만족해서 거지가 되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나도 다 나름의 사연이 있어서 거지가 된 거다.

더러운 것과 구걸하는 게 정말 싫지만, 또 거지를 안 할 수도 없는 그런 사연이…….

에휴.

아마도 지금, 그 사연을 말해 줘야 할 듯하다.

"우선 내 이름, 나태한."

"와! 이름도 거지랑 어울린다. 헤헤헤."

걸삼번 저 녀석!

방금 같이 슬퍼해 줬던 거 취소다.

하여간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

됐다.

그래도 녀석 덕분에 은근슬쩍 나이는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다.

"하남 신양(信阳) 황천(潢川)이라는 곳이 내 고향이야. 그곳에서 보은무관(報恩武官)을 했어. 시골이지만, 그 지역에서는 제일 잘나가는 무관이었대."

"이름 좋다. 보은(報恩),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잖아."

걸일번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응, 우리 집 가훈도 ‘은혜를 갚아라’야. 내가 구걸하는 것과 더러운 것 그리고 냄새나는 것을 죽는 것만큼 싫어하면서도 거지로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어."

걸일번에 이어 걸삼번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 사연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걸사번은 여전히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도 궁금하긴 했나 보다.

귀를 쫑긋 세우는 게 고스란히 보인다.

사실 소인국에서 무공 전수를 두고 계속해서 고민했던 이유도 우리 집 가훈 때문이다.

11년 동안 비걸개 후보로 지내며 나에게 구걸한 밥을 나눠 준 녀석들이 언제 몇 번 나눠 줬는지 일일이 기억하고, 꼭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고 말이다.

"아버지 얼굴은 너무 어렸을 적이라 기억이 안 나.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어느 날 아버지가 늦은 밤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고, 그러다 시체로 발견되셨대. 그리고 다음 날, 마을의 다른 무관 관주들과 왈패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아버지가 빌린 돈을 갚으라며, 집에서 우리를 쫓아냈대."

"어머! 그거 삼류 왈패들의 뻔한 수작질이잖아!"

걸일번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흥분해 말했다.

"철전 한 닢 없이 거리로 쫓겨난 엄마와 어렸던 나는 굶어 죽을 위기였대. 뭐, 나는 그것 역시 기억 못 하고. 더 무서웠던 건, 거리로 쫓겨난 엄마를 관주들과 왈패들이 집요하게 쫓았다는 거야. 그것도 늦은 밤이 되면 술에 잔뜩 취해서."

"설마……."

걸일번이 불안한 눈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어. 우리 엄마도 나도 아무 일 없었으니까. 그때 우리 마을의 개방 분타, 그러니까 황천 분타에서 도움을 줬어."

그나저나 이 녀석들도 알까?

"혹시 낭만개라고 들어 봤어?"

걸일번과 걸삼번이 동시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표정을 보아하니 진짜로 모르는 얼굴들이다.

"걸사번, 너는?"

안 듣는 척하고 있는 걸사번에게도 답을 꼭 듣고 싶어 직접적으로 물어봤으나…….

"처음 들어 봐."

녀석도 모른다.

음, 낭만개 그 아저씨 뭐야?

총교두하고 교두들은 알고, 얘들은 모르네?

진짜 뭐지?

뭐, 이것도 차근차근 알아보자.

"분타주가 낭만개라는 아저씨였는데, 굶주렸던 우리를 데려가 구걸한 밥도 나눠 주고, 우리 아버지 일도 조사해 줬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걸일번 네 말대로, 잘나가던 우리 보은무관을 시기한 다른 관주들과 왈패들이 짜고 저지른 일이었더라고. 결국 낭만개 분타주가 거지들을 죄다 이끌고 가서 복수해 줬어."

"대단한 고수였나 보다."

"뭐, 내 고향에서는 그렇다고 하는데, 사실 다른 무관의 관주들의 수준이 이류였고, 왈패들이라고 해 봐야 죄다 삼류였으니."

"그랬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입방해서 거지로 쭉 지내 온 거야?"

"응."

"구걸은 어떻게 안 할 수 있었는데?"

"낭만개 분타주가 우리를 많이 배려해 줬어.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분타주가 우리 엄마를 좋아했던 것 같아. 아니, 좋아했어. 그것도 많이."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낭만개라니. 낭만이 가득한 분인 거 같아."

"뭐, 보통 거지와 다르게 많이 엉뚱하긴 하지. 어쨌거나 낭만개 분타주 덕분에 나와 엄마는 구걸하지 않아도 됐고, 대신 엄마는 청소, 빨래, 바느질까지 분타의 일은 죄다 도맡아 했어. 아마 중원 전역의 거지 소굴 중에서 우리 분타가 제일 깨끗했을 거야. 엄마 덕분에."

"와! 신기하다. 거지 소굴이 깨끗하다니. 헤헤."

"응, 정말 깨끗했어. 거기에 우리 엄마가 한 요리 하거든. 거지들이 구걸해 온 밥을 죄다 모아 요리를 하는데, 신기하게도 그게 엄청 맛있었어. 거짓말처럼 양도 두 배로 늘어나고."

"분타 거지들이 엄청 좋아했겠다."

"처음에는 구걸하지 않는다고 몇몇 거지들이 눈치를 줬는데, 엄마가 그렇게 열심히 한 덕분에 나중에는 분타의 모든 거지가 혹시라도 우리 엄마가 떠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떠받들고, 큭큭큭. 어쨌거나 내 어린 시절은 거지였지만, 거지 같지 않게 보낼 수 있었어."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분타에 머물고 계셔?"

"아니. 나 일곱 살 때 역병이 돌았거든. 그때 돌아가셨어."

"어머, 미안."

"아니야, 괜찮아. 행복하게 사시다가, 큰 고통 없이 돌아가셨어. 엄마가 보고 싶을 때가 많지만, 뭐 어쩔 수 있나. 지금은 괜찮아."

"비걸개 후보가 된 건 낭만개 분타주 추천이고?"

"응,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나는 구걸을 안 했거든. 낭만개 분타주 덕분에 그럴 수 있었어. 그러다 분타주가 묻더라고. 거지 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해 보는 건 어떻냐고.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안 된다고 했지."

"왜?"

"말했잖아, 우리 집 가훈.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라! 개방에서 받은 은혜가 하늘보다 높이 쌓였는데, 어떻게 그냥 훌쩍 떠나? 어떻게 해서든 보은을 해야지."

"다른 일을 하면서도 도울 수 있잖아."

"어머니 유언도 있고. 개방의 방도로 훌륭한 거지가 돼서… 에휴, 훌륭한 거지가 돼서 은혜를 갚으라는 유언을 남기셨어. 그래서 내가 거지가 너무 싫은데 또 거지를 안 할 수도 없는 거야."

"아!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였구나."

걸일번과 걸삼번이 동시에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탄성을 쉼 없이 쏟아냈다.

평소 내 이상 행동이 많이 의아하고 궁금하긴 했었나 보다.

내가 저들을 궁금해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니, 내 궁금증보다 나에 대한 저들의 궁금증이 훨씬 컸던 모양이다.

반응들이 그렇다.

아무튼 내가 구걸을 죽는 것보다 싫어하고 더러운 것과 냄새나는 것 역시 죽어라 싫어하면서도, 계속 거지로 살아야 하는 사연은 그러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물어 왔다.

특히 부쩍 늘어난, 아닌 상전벽해라 해도 될 만큼 갑작스레 늘어난 나의 내공.

교두들에게 해 주었던 답변을 고스란히 반복했다.

역시, 교두들에게 통했던 답변인 만큼 이들도 아무런 의심 없이 그저 놀라워만 했다.

"자, 내가 할 이야기는 대충 다 된 것 같고. 걸사번, 이젠 네 차례야."

내가 말했고,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비딱하게 앉은 걸사번을 향했다.

그리고는 곧 걸사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뭐야?

저 새끼, 왜 저래?

나는 물론 걸일번과 걸삼번까지 너무 당황해 뭘 어쩌고 할 사이도 없었다.

"난 내 이야기를 너희에게 말해 준다고 약속한 적 없다."

그 말만을 남기고 그냥 갔다.

아놔!

저 빌어먹을 거지새끼를 그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