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이번 여행기-11화 (10/174)

11화

순간!

총교두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그 순간.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또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는, 몇몇은 의심 가득한, 또 억울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눈빛.

특히 재수탱이 걸사번은 눈빛으로 나를 향해 피의 검강을 마구 쏘아 대고 있다.

아니,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저들이 얼마나 놀랐건, 나만 하겠는가?

진심으로 너무 놀라 모두가 쳐다보고 있음에도, 걸음을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내가?

왜?

어떻게 수석이야?

"걸이번!"

"아, 네. 네!"

총교두가 재차 나를 호명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쭈뼛쭈뼛 걸어 앞으로 향했다.

내 뒤통수로 다른 비걸개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쏘아보면 어쩔 건데?

그나저나 진짜 어떻게 내가 수석이지?

"어험, 다들 많이 놀랐을 것이다. 마지막 성적을 내면서 나나 다른 교두들이나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 어떤 시험과 임무의 공과를 점수로 매긴다고 하여도, 후공마를 처치한 일에 압도적인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총교두가 근엄한 눈으로 후보생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물론 교두들 모두 비걸개 시험의 채점 원칙에 따라 만장일치로 결정한 사항이다. 이번 비걸개 수석은 걸이번이다."

총교두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한 녀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뭔가?"

"질문 있습니다. 걸이번의 공이 큰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는 실력보다 운이 따라 주어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총교두가 인상을 살짝 구긴 후 답했다.

"운도 실력이다. 무림에서 눈먼 칼에 맞는 일은 매일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고, 마찬가지로 눈먼 칼로 적을 베는 일 역시 함께 일어난다. 기연이란 것 역시 운이고, 그 또한 운이 따라 주는 자의 몫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운이고 실력이고를 떠나, 걸이번이 후공마를 처치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걸이십육번 녀석이다.

저 녀석도 성적이 꽤 좋았기에 내심 기대를 했었나 보다.

그나저나, 총교두의 말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다들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대신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시기, 질투, 억울함, 분노 등등.

거지새끼들이 뭔 놈의 욕심이 저리도 많은지.

순간 오기가 생겼다.

툭.

목에 걸려 있던 행운석 목걸이를 툭 끊어 손에 쥔 후 걸이십육번을 향해 내밀었다.

다들 뭐 하는 짓인가 하는 눈으로 나를 의아하게 보았다.

나는 상관하지 않고 걸이십육번에게 말했다.

"바꿀래?"

비걸개 최종 시험 전, 놈이 고른 선물은 피사수투(皮絲手套).

권법가들이 손에 착용하는 장갑형 무기인데, 피사수투는 무림에 알려진 수투들 중에서도 상상(上上)급에 속하는 신병이기다.

보검을 맨손으로 잡아 막을 만큼 질기고, 그 재질이 매우 얇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수투를 착용했는지도 모를 정도다.

걸이십육번은 성적이 좋아 피사수투를 선택할 수 있었다.

"바꿀 거냐고?"

내가 재차 행운석을 내밀며 걸이십육번을 향해 물었고. 놈은 주먹을 불끈 쥐고, 또 인상을 와락 구기며 나를 노려본 후 대꾸 없이 뒤로 물러났다.

다들 어이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내가 후공마를 처치한 게 행운이 따라준 것이란 말은 철석같이 믿으면서, 그것이 행운석 때문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다.

뭐, 인간이 원래 그렇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됐다.

나에게는 다행이다.

다른 비걸개들이 나의 수석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한 총교두가 다시 한번 나섰다.

"걸사번."

"네, 총교두님."

총교두의 부름에 걸사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의외다.

가장 아쉬워하고 화를 낼 줄 알았던 녀석이었다.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눈의 실핏줄이 터져 악귀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봤는데 지금은 매우 평온한 얼굴이다.

그 짧은 시간 마음을 다스렸나 보다.

은근 무서운 녀석이다.

"자네가 차석이다. 수석과 자네의 점수에는 큰 차이가 없다. 자네도 아쉽나? 걸이번을 수석으로 인정하지 않는가?"

모두는 걸사번이 자신들의 마음을 속 시원히 대변해 주길 바랐나 보다.

그런 간절한 눈빛이 걸사번에게 쏠렸고.

"교두님들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이를 부정한다면 결국 방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이는 비걸개는 물론 한 명의 당당한 무인으로서 실격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걸이번의 수석 임명을 인정합니다."

캬아! 새끼.

진짜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네.

뭐야?

아침에 뭘 잘 못 먹었나?

저 인간, 왜 저래?

걸사번의 교과서 같은 말에 아무도 이의를 표하지 못했다.

총교두와 교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냥 물러서면 내가 재수탱이라 부르지 않았겠지.

"다만! 비걸개 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하면, 운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또한 맞는 말이다. 걸이번은 걸사번의 충고를 명심하도록."

"아, 네."

그렇게 임명식이 다시 진행되었다.

나는 모두의 부러움과 시기, 질투, 분노 속에서 당당히 수석 임명과 타구봉법 전반결 후초식을 받았고, 총교두가 직접 내 허리에 삼결의 매듭까지 묶어 주었다.

차석은 걸사번.

3등은 걸일번이다.

아마도 후공마를 처치한 점수가 걸일번에게도 후한 점수로 매겨졌나 보다.

다만, 바보 걸삼번은 이번에도 꼴찌였다.

후공마와 싸울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감점 처리됐다고.

그렇게 기나긴 임명식이 마무리됐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무림에 나가 임무를 수행할 때 절대 서로를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 최악의 경우, 동료가 눈앞에서 죽더라도, 너희는 서로 모르는 사이여야 한다. 알겠나?"

"넵!"

"좋다! 이로써 비걸개 임명식을 마치겠다. 개방의 위대한 비걸개가 된 걸 축하한다."

"와아아아아아!"

"첫 번째 임무는 내일 아침 개별적으로 전달하겠다. 내일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그때까지 동료들과 마지막 밤을 즐기도록. 특별히 너희를 축하하기 위해 술과 고기를 잔뜩 준비했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라."

"와아아… 아아… 어?"

술과 고기를 배가 터지도록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목이 터져라 환호하던 비걸개들의 함성이 점차 줄어들었다.

교두들이 들고 온 음식을 보자 그리된 것이다.

에휴, 누가 거지 아니랄까 봐.

우리를 위해 준비했다는 음식 역시 어디서 구걸해 온 거고, 평소보다 양이 많긴 하지만, 어느 한 명 배가 터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됐다.

배만 대충 채우고, 타구봉법이나 빨리 봐야겠다.

* * *

마지막 밤이라 그런지 다들 시끌벅적하다.

술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다들 술이 아닌 분위기에 취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할 일이 많다.

나를 반겨 줄 동료도 몇 명 없고.

그래서 홀로 조용히 타구봉법을 살폈다.

비급을 너무 빠르게 훑어 이게 어려운 건지 쉬운 건지 감을 잡기도 쉽지 않았다.

다시 몇 번 빠르게 훑은 후 비급을 앞섶 안쪽 깊은 곳에 갈무리했다.

그런 후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다.

확실히 후공마를 처치한 것은 운이다.

만약 지금의 내가 그와 붙는다면, 그는 내 내공과 경지를 순식간에 파악했을 테고, 그에 맞는 방법으로 나를 상대했을 것이다.

당연히 죽는 건 나였을 테고.

걸사번의 말마따나 행운만으로는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실력을 키워야 한다.

소인국에서 얻은 내공과 소인장기공, 그리고 이제는 타구봉법의 전반결까지 손에 쥐었다.

남은 일은 피나는 노력뿐이다.

그러면 될 테다.

또 다른 한 가지.

소인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바위를 부숴라 형님이 마지막 순간 개미핥기의 혀에 붙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이곳으로 넘어왔다.

형님이 죽는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가 희망을 거는 건, 당시 부족 사람들이 똘똘 뭉쳐 삼재진을 펼쳐 제대로 개미핥기를 상대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꼭 돌아가고 싶은데.

바위를 부숴라 형님과 부족 사람들을 꼭 다시 만나고 싶은데.

여전히 방법을 모르겠다.

행운석은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하고 있다.

딱 한 가지.

내가 소인국으로 갈 때, 번쩍.

소인국에서 이곳으로 돌아올 때도 번쩍.

행운석이 번쩍였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게 왜 번쩍였는지를 몰라서 문제지.

됐다.

비걸개는 개방의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일단 임무를 받고 밖으로 나가면, 9대 방주였던 행운개부터 조사를 좀 해 봐야겠다.

"걸이번, 여기 있었네?"

"어? 너희가 여긴 왜?"

걸일번, 걸삼번, 거기에 걸사번까지?

혼자 있는 나를 일부러 찾아온 모양이다.

"왜긴 왜야? 총교두님이 그러셨잖아. 내일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지 모른다고. 같은 조가 된 건 3년이지만, 거의 10년 가까이 동료였는데. 마지막 날 정도는 함께 보내 줘야지."

걸일번이 미소와 함께 그리 말하며,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걸삼번도 맞은편에 앉고, 걸사번 이 새끼는 왜 온 거야?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팔짱을 끼고 고개까지 딴 곳으로 돌리며 삐딱한 자세로 자리에 앉는다.

억지로 함께해 준다는 뭐 그런 느낌?

하여간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다.

근데 이렇게 함께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지?

"걸이번."

"응, 걸일번."

"오면서 걸삼번하고 얘기했는데, 우리 자기 이름 말하는 거 어때?"

"이, 이름? 하지만 자신의 신분은 비밀에 부치는 게 규칙이잖아."

"그건 후보생 때나 그런 거고. 지금은 정식 비걸개잖아. 이제 우리에게 해당하는 규칙이 아니야."

"그, 그런가?"

"비걸개 출신 중에 총타에서 꽤 높은 자리에 앉은 분들 있는 거 알지?"

"응, 많이 들어 봤어."

"그분들이 총타까지 가서 서로의 신분을 숨길까?"

"그렇진 않겠지."

"맞아, 우리 중 누가 큰 공을 쌓아 총타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되면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어. 천하의 거지 모두가 그 이름과 출신을 알게 될 거라고."

"그렇긴 하겠다."

"그럼 내가 먼저 얘기할까?"

처음이다.

동료의 진짜 이름을 듣는 게.

나는 물론, 매일 헤헤거리기만 하던 걸삼번까지 잔뜩 상기한 얼굴로 걸일번의 작은 입술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난 홍설아라고 해. 나이는 스무 살."

아! 나보다 한 살이 많았구나.

처음 듣는 동료의 이름과 나이가 신기하기도 했고, 심경이 묘했다.

그러자 걸일번, 아니 홍설아의 미소도 더욱 짙어졌다.

아마 그녀도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이 꽤 설렜던 모양이다.

"나에 대해 궁금한 거 없어? 뭐든 다 말해 줄게."

"음… 너무 갑작스러워 뭘 물어봐야 할지 생각이 안 나네. 평소에는 궁금한 게 많았는데."

사실이 그랬다.

하지만 완벽한 사실은 아니다.

난 걸삼십육번과 그녀의 관계가 궁금하다.

하지만 걸삼십육번이 죽었을 때 너무나 슬피 울었던 그녀를 생각하니,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홍설아가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묻지도 않은 말을 해 주었다.

"그럼… 내가 그냥 얘기할게. 사실… 나… 방주님의 제자야."

"방, 방주? 설마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방주님 아니지?"

"맞아, 그 방주. 우리 개방의 방주님. 사부님의 네 제자 중 네 번째, 막내 제자야. 그리고… 먼저 하늘로 간 걸삼십육번은 사부님의 세 번째 제자, 내 바로 위의 사형이야."

개방의 방주 걸왕 귀행개(鬼行丐).

50만 방도의 방주라는 중책에도 불구하고, 그 행적이 워낙 신출귀몰하고 묘연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나저나 걸일번, 아니 홍설아가 방주의 제자였다고?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에 계속해서 딴 곳만 보며 관심 없다는 듯 행동하던 걸사번까지 고개를 돌리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그래서 그랬던 거였군.

걸삼십육번이 죽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안위마저 고려하지 않고 미친 듯 검을 휘두르며 후공마에게 달려들었던 것.

또 죽은 걸삼십육번을 향해 계속해 사형이라 부르며 흐느꼈던 것까지.

이제야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그녀의 행동들이 모두 이해가 갔다.

그런데 잠깐!

어라?

아닌데?

방주에게는 분명 제자가 두 명밖에 없다고 했는데.

이건 내가 아니라 천하의 거지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뭐야?

걸일번 쟤, 허언증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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