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2갑자의 내공과 극에 달한 분노까지, 나의 모든 것이 담긴 검강.
걸삼십육번과 구조원들 모두를 죽인 그 무시무시한 마두 후공마가 단 한 방에 육편이 되었다.
"어?"
쓰러졌던 걸일번이 반격을 위해 일어섰다가 얼음이 되었다.
막 검을 휘두르려던 그 자세 그대로.
온몸이 꽁꽁 언 상태로.
눈은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고 입은 쩍 하니 벌리고. 놀라도 무지막지하게 놀란 모양이다.
그런데 걸일번이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예전에는 내가 정신을 잃고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예뻤는데.
뭐, 상황이 상황이니.
그래도 걸일번은 걸삼번에 비하면 형편이 나은 상황이다.
바보 걸삼번도 선 상태 그대로 입을 찢어질 듯 벌렸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녀석 오줌을 지린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재수탱이 걸사번.
재수 없는 놈이지만, 언제나 냉철함을 유지하는 놈이다.
놈이 웃거나 놀라는 모습을 지난 수년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새끼.
"끄어어어어어어어어억!"
눈알은 튀어나올 것 같고, 턱은 이미 빠져 버렸는지 쩍 벌린 입을 다물 줄 모른다.
거기에 더해 놈은 너무 놀라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세 사람, 1년 만에 다시 보는 세 사람의 모습은 그랬다.
그리고 나는…….
"형님! 엉엉엉! 바위 형님! 엉엉엉! 형니이임! 엉엉엉엉!"
죽은 후공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근처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돌아왔다.
무림이다.
* * *
"엉엉엉. 엉엉엉. 바위 형님! 엉엉엉."
난 계속, 정말 오랜 시간 커다란 바위를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내 뒤에서 소리가 들려온 것도 한참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흑흑흑. 사형……. 흑흑."
걸일번이 서글프게 우는 소리였다.
그런데 사형?
걸삼십육번이 사형이었어?
음… 이름을 비롯한 서로의 신분을 숨긴 채 비걸개 훈련을 받아 왔으니,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잠시 후.
"일단, 일단 이곳을 정리하고 본진으로 돌아가자. 가서 보고부터 해야 해."
걸사번이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그렇게 걸사번과 걸삼번이 현장을 수습했다.
육편이 된 후공마의 시신에선 수급만 따로 챙겼다.
몇 조각으로 분리된 걸삼십육번의 시신도 정성껏 모아 임시로 만든 들것에 모셨다.
"걸… 어험, 걸이번."
걸사번 녀석이 나를 부른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게, 예전과 다른 느낌…….
"이제 그만… 그만 가야 하는데……."
이 새끼 쫄았다.
"형님! 엉엉엉. 바위 형님! 엉엉엉. 제가… 엉엉. 꼭 돌아갈게요. 엉엉엉!"
난 뒤에서 쭈뼛 선 상태로 기다리는 걸사번을 무시한 채, 다시 커다란 바위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오열했다.
내가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세 사람은 그런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아! 그게 아니라 날 미쳤다고 생각하는 걸까?
됐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바위를 부숴라 형님이 꼭 살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반드시 돌아간다.
* * *
"저기다!"
"여깁니다!"
우리가 후공마의 수급과 걸삼십육번의 시신을 들고 한 식경 정도 움직였을 때.
수십 명의 거지 떼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신법까지 펼쳐 빠르게 달려왔다.
총교두를 비롯한 교두들과 나머지 비걸개 후보들이다.
"이 시신… 이게……."
"맞습니다. 걸삼십육번."
"후공마 안두창의 짓이냐?"
"네, 그렇습니다."
아까 놀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걸사번이 평소의 그 냉철한 표정과 음성으로 총교두의 질문에 답을 했다.
총교두는 놀람과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른 교두들과 비걸개 후보생들도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누구는 분노에 떨고 또 누군가는 이름조차 모르지만, 수년간 함께 어려운 수련을 함께했던 걸삼십육번의 죽음을 애도했다.
하지만 총교두는 노련한 거지다.
아니, 노련한 고수다.
그는 재빨리 복수를 결심했다.
"후공마는 어느 방향으로 도주했지?"
역시나 걸사번이 답했다.
"도주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주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그가 아직 이곳에 있다는 말이냐?"
곧바로 교두들과 후보생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걸사번의 입에서 미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총교두와 이들은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걸삼십육번을 죽일 정도의 고수라면, 우리 1조 전원이 덤벼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정말 행운에 행운이 겹친다고 하여도,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후공마를 처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리 물은 것이고, 자존심이 상한 걸사번이 미세한 한숨을 내쉰 것이다.
결국 걸사번은 대답 대신 커다란 나뭇잎과 넝쿨로 둘둘 만 그것을 총교두에게 건넸다.
"이게… 무엇이냐?"
"후공마 안두창의 수급입니다. 시신은… 천참만륙이 되어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총교두의 눈이 크게 떨렸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모두가 크게 놀란 모양이다.
결국 총교두가 약간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고수의 도움이 있었더냐? 그분이 누구……."
"총교두님."
걸사번이 말을 끊었다.
총교두의 눈빛이 더욱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그런 눈빛이었고, 모두가 그렇게 숨 넘기는 소리까지 죽이며 걸사번의 입에 집중했다.
결국…….
"후공마는 저희 1조가 처리했습니다. 정확히… 걸이번이 휘두른 검에 몸이 통째로 터져 죽었습니다."
"아……."
"말도 안 돼."
"걸이번이?"
"허어!"
여기저기서 이해할 수 없다는, 그렇지만 걸사번의 말이기에 또 믿지 않을 수도 없다는 그렇게 놀람과 복잡한 심경이 한데 섞인 탄성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총교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이냐? 걸이번이?"
"네, 그렇습니다. 저와 걸일번이 대적하려 했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후공마는 총 타에서 보내온 정보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 강했습니다. 저와 걸일번이 위급했던 절체절명의 순간 걸이번이 나섰고. 단 1수에 후공마를 처치해 버렸습니다."
"아……."
"허어."
"어……."
또다시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총교두의 목소리는 더욱 떨려만 갔다.
그가 다급한 목소리로 걸사번에게 물었다.
"걸이번은? 후공마를 처리한 걸이번은 지금 어디에 있나?"
"저기… 저기에……. 휴우."
걸사번이 손을 뻗어 나를 지목했고 총교두와 교두들, 그리고 모든 후보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해 쏠렸다.
"엉엉엉! 형님! 엉엉엉! 바위 형님! 바위 형님! 엉엉엉!"
난 바위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 * *
오래전 화전민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산간의 어느 마을.
그 다 무너져 가는 움막 같은 집들 사이로 그나마 제일 멀쩡해 보이는 집.
그 앞에서 나는 대기 중이다.
낮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 위함이다.
가장 먼저 걸일번이 총교두를 비롯한 교두들과 면담을 가졌다.
안에서 나누는 대화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2갑자가 훌쩍 넘는 내공 덕분에 오감 역시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안 들리는 척하고 있다.
걸일번은 확실히 걸삼십육번과 어떤 깊은 관계였던 것 같다.
그녀는 후공마와 싸울 당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면담을 가진 건 걸삼번.
평소의 어수룩했던 모습과 달리, 꽤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낮에 있었던 일을 총교두와 교두들에게 설명한 후 면담을 마쳤다.
바지에 오줌을 지린 것까지 모두 말한 걸삼번이었다.
그다음은 걸사번.
걸삼번이 했던 것보다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을 이었다.
나의 내공에 관한 언급도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1갑자는 되지 않을까 싶다는 그의 말에 총교두와 교두들은 동시에 놀란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게 걸사번의 면담이 끝나는가 싶었을 때, 의외의 말들이 들려왔다.
"그런데 걸삼번은 왜 바위를 끌어안고 그렇게 서글피 울었던 것인가? 그것도 바위에게 형님이라고까지 하면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까지는 그런 이상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갑작스레, 그러니까 후공마를 처치한 후 갑작스레 그런 행동을 보여 저도 크게 당황했습니다."
"짐작 가는 바도 없나?"
"그게… 이건 제 개인적인 추론입니다만……."
"참작해 들을 테니 솔직히 말하게."
"네, 총교두님. 어떤 이유에서든 갑자기 늘어난 내공 때문에 주화입마에 걸린 게 아닌가 의심해 보았습니다."
"음, 역시 그렇군."
뭐야?
이 인간들 날 미친놈 취급하는 거야?
하아! 돌겠네.
그때.
움막집 앞마당의 더러운 나무 밑동에 앉아 면담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땅 위의 작은 돌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작고 평범한 조약돌일 뿐이다.
그런데 바닥에 있는 그 조약돌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검은색 조약돌이다.
바위를 부숴라 형님의 친절한 아내 무지개 끝자락,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럽고 예쁜 딸 연못의 흰 꽃.
그리고 장난꾸러기지만 나를 가장 잘 따랐던 아들 검은 돌 던져.
다들 살아 있을까?
그들을 생각하고 있자니, 다시금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다시 오열을 쏟아 냈…….
벌써 끝났나?
"걸이번, 네 차례다. 교두님들께서 기다리신다."
"어? 엉. 알았어."
난 서둘러 눈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훔치고, 걸사번이 나온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 * *
눈빛부터, 응 그렇다.
미친놈 보듯 한다.
어색한 분위기 속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고 시간이 꽤 지나 총교두가 본론을 꺼냈다.
"지금까지 무공을 숨겼나?"
잠깐이지만 생각해 둔 게 있다.
"정확히 말하면 무공을 숨긴 게 아니라 내공을 숨겼습니다. 아니, 숨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갑작스레 내공이 늘었는데, 이걸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습니다."
총교두와 교두들이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뭐, 어쩌라고?
소인국에 갔다 왔다고 하면 진짜 미친놈 취급받지 않겠나?
"내공… 휴우, 그래, 내공이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늘 수 있었던 건지 말해 줄 수 있나?"
"물론이지요."
"어떻게 된 일인가?"
"구변단을 복용했습니다."
"구, 구변단?"
* * *
소림사에는 대환단이 있다.
무당파에는 태청단이 있다.
화산파에는 자하신단이 있고. 저 멀리 마교라는 곳에도 대마령단이라는 영약이 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우리 개방에는 구변단이 있다.
먹을 것도 없는 거지가 무슨 영약인가 싶겠지만, 여기에도 다 사연이 있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말이 좋아 일방(一幇)이지, 개방은 거지들 모임 아니겠는가?
먹고 죽으려 해도 없는 게 찬밥 덩어리인데, 언감생심 어디 영약을 바라겠는가?
그런데 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고 하면.
일백몇 년 전에 우리 개방의 한 장로가 개를 키웠다.
개고기라면 환장하는 거지들이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 거지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 장로도 그런 거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장로가 깊은 산중에서 우연히 만년 산삼을 한 뿌리 발견했다.
보통 거지들은 영약이고 뭐고, 먹을 게 있으면 일단 먹고 보자는 주의다.
그래서 매년 영약을 잘못 처먹고 그 기운을 소화하지 못해 죽는 거지만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된다고 한다.
아무튼 그 장로는 그래도 개방의 높은 직책까지 한 양반이라 생각이란 게 좀 있었나 보다.
먹을까 말까, 팔아 버릴까 아니면 총타에 보고할까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만년 산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곧바로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식처럼 키우던 그 개새끼에게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던 것.
개새끼도 만년 산삼의 기운을 다 소화하지 못해, 엄청난 기운을 뿜어대면서도 또 낑낑거리며 죽을 위기였다.
장로는 생각이고 뭐고 없이, 곧바로 개를 품에 안고 만리추풍신법(萬里追風身法)까지 펼쳐 당대의 의선을 찾아갔다.
의선에게 개새끼를 치료해 달라고 울고 불며 애원했다.
의선은 이리 말했다.
"이 개를 죽여 영약을 만든다면 소림사의 대환단에 버금가는 최상의 영약을 만들 수 있소."
하지만 거지 장로는 단번에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의선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고 한다.
"한낱 미물의 생명을 지키려는 당신의 모습에 크게 탄복했소. 당신의 개를 치료해 살리는 것은 물론, 100년간 이 개를 통해 개방에 큰 선물을 드리겠소."
장로의 개새끼는 살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의선은 약속한 대로 개방에 큰 선물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다른 구파와 오대세가에는 있지만, 우리 개방에는 없었던 영약이란 놈이었다.
이름하여 구변단(狗便丹).
개똥으로 만든 영약이다.
이게 한 알이 아니다.
계속해서 만들 수 있다.
과정은 이렇다.
만년 산삼을 처먹은 개새끼의 똥과 오줌 백일 치를 모은다.
그리고 그걸 다시 100번 찌고 100번 말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여기에 의선이 우리 개방에만 알려 준 특별한 약재들을 섞어 환단으로 만들면 완성이다.
1년에 세 개 반의 구변단을 만들 수 있고, 한 알당 최소 5년에서 많게는 10년 치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문파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 개방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거지 장로는 수십 년 전 죽었지만, 만년 산삼을 처먹은 개새끼는 그때의 의선이 장담했던 대로 100살까지 살다가 몇 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거지들의 본거지, 개방의 총타에서 개가 죽었는데 잡아먹지 않고 장례까지 치러 준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아무튼 그 장로와 개새끼 덕분에 총타에는 현재까지 수십 알의 구변단이 남아 있고, 우리 비걸개 후보생들 사이에서도 1등에게는 상으로 구변단이 주어진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 *
"자네가 어떻게 구변단을 구해서 복용할 수 있었단 말인가? 총타에 아는 인맥이라도 있는가?"
총교두가 살짝 노기 낀 음성으로 물었다.
위협이다, 거짓말하면 혼날 수 있다는.
거짓에는 분명한 대가가 따른다는 위협이고 협박이며, 경고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몸을 잔뜩 웅크렸다.
어깨까지 들썩들썩.
"이봐, 걸이번. 지금 내가 구변단에 관해 묻고 있지 않……. 이봐! 걸이번! 걸이번? 자네 우나?"
"흑흑. 바위… 바위 형님! 엉엉엉. 검은 돌! 엉엉엉엉!"
아까 마당에서 주웠던 그 검은 조약돌. 그것을 품에서 꺼내 두 손에 꼭 쥐고 구슬피 울고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