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안 돼. 그렇지. 앉아. 기다려. 잘했어!"
미친!
개미가, 개미가 말이다.
무슨 훈련 잘 받은 개새끼처럼 바위를 부숴라의 말을 듣는다.
"다들 돌아가 하던 일 해!"
타타타타타타타타탓!
가장 선두에 있던 덩치가 조금 더 큰 개미 한 마리만 남고, 수천 마리의 개미가 모두 돌아갔다.
돌겠다.
진짜 이거 뭐냐고?
"그렇지. 잘했어."
바위를 부숴라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무시무시한 개미가 더듬이를 마구 흔들어 대며 좋아 발광한다.
"자네, 이리 좀 와 보게."
"저, 저요?"
아이씨!
가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쭈뼛쭈뼛 잔뜩 경계하며 바위를 부숴라랑 개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똥. 그렇지, 똥. 아이고, 착해라."
개미가 똥을 싼다.
갑자기 웬 똥?
그런데 젠장.
저 인간이 미쳤나?
개미 똥을 손으로 받는다.
그리고 이내, 그걸 들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난 두 눈을 꼭 감고 버텼다.
결국, 바위를 부숴라는 개미의 똥을 내 온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생긴 것과 다르게 무지하게 꼼꼼한 손길이었다.
"됐네. 이러면 자네가 침입자가 아닌 걸 알 거야. 다시 가자고."
뭐야?
개미 똥이 무슨 호패라도 되는 거야?
정말 난 이상한 세상에 와 버린 듯하다.
* * *
개미와 인간의 공존.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과 수만 마리에 달하는 개미들.
하아!
이젠 뭐 놀랍지도 않다.
그들의 부락, 그러니까 이들이 사는 곳은 바로 개미굴이었다.
내가 소싯적 개미굴을 수십 개 부숴 봐서 아는데, 원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이곳은 엄청나게 넓은 광장까지 존재하는 개미굴이다.
아마도 오랜 세월 인간과 개미가 공존하며, 원래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르게 많은 것이 진화하고 변모한 것 같다.
이곳의 개미는 집을 지키는 개의 역할도 하고,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말의 역할도 하며, 짐을 옮기는 소의 역할까지 하는 모양이다.
지금 내 눈앞에는 그렇게 수천 명의 사람과 수만 마리의 개미들이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펼쳐졌다.
"불타는 머리."
"네, 전사님."
"이 친구 일단 방 하나 마련해 줘. 족장님께는 내가 보고할 테니."
"알겠습니다."
바위를 부숴라는 이곳의 전사, 그러니까 무림으로 따지면 문파의 고수 뭐 이런 건가 보다.
"이봐."
"네."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족장님이랑 원로들께 인사드리자고. 자네가 이곳에서 지내는 데에 별문제는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바위를 부숴라 아저씨."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씩 웃어 준 후 돌아갔다.
나는 불타는 머리의 안내를 따라 임시로 지낼 숙소로 향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개미굴이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잘 꾸며져 있고 아늑했다.
"개미 똥을 묻혀서 별문제는 없겠지만, 처음 온 곳이라 길을 잃을 수 있으니 너무 멀리 다니지는 마세요."
"네, 고맙습니다, 불타는 머리 님."
"고맙긴요, 이따가 저녁 식사 때 부를게요."
"네."
그날 저녁, 포도 한 알과 옥수수 낱알 두 개 그리고 호두 부스러기 약간으로 수천 명의 사람과 수만 마리의 개미들이 배가 터지도록 포식했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 * *
비걸개(秘乞丐), 개방의 비밀 거지다.
무림에서 천하제일 정보통을 논할 때면 언제나 개방을 으뜸으로 쳐 준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거지들이 천하 각지에서 구걸을 하며 얻는 정보의 양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무림에서 정보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고, 우리 개방에서도 더 많은 정보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엄청난 정보의 양에 비해, 그 질이 너무 떨어졌다.
그 틈을 타고 하오문이 등장했다.
기녀들이 이불 속에서 얻어 내는 정보는, 거지들이 거리에서 얻는 정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실로 고급의 것들이었다.
한때 개방이 천하제일 정보통의 자리를 그들에게 내준 것도 다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래서 개방에서도 자구책을 마련했고, 그것이 바로 비걸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거지의 신분을 숨기고 정보를 탐색하는 게 비걸개의 주요 임무다.
그런 이유로 비걸개들은 개방의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드러내지 않는 게 맞다.
나도 분명 타구봉법의 10초식까지 익혔으니 말이다.
아무튼 나를 포함한 비걸개 후보 36인은 개방의 무공이 아닌 혼원귀일신공, 낙백구검, 산백신법을 익혔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지 않는 이상, 타구봉법을 쓸 수 없는 게 우리 비걸개의 철칙이다.
하지만 무공은 분명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지만 비걸개의 주요 임무는 정보의 탐색.
난 그 훈련을 무려 11년 동안 받아 왔다.
하루가 지나 아침이 됐다.
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어제 습득한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첫 번째, 언어.
놀라웠다.
이들의 입 모양과 내 귀, 정확히는 내 뇌가 받아들이는 그들의 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 모양은 분명 다르게 움직이는데, 그 뜻이 정확히 중원의 언어로 내게 전달되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두 번째, 이들은 원시적 형태의 삶을 살고 있다.
문자가 있긴 하지만, 거의 우리 중원의 상형문자에 가까운 문자를 사용한다.
무기와 도구조차 철이 아닌 돌을 깎아 만들어 사용한다.
그래, 이것도 중요하지 않다.
세 번째, 풍요와 피식자.
이곳은 모든 것이 풍요롭다.
사방 천지에 먹을 것이 넘쳐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란 게 없다.
어제, 저녁을 먹으며 슬쩍 물어봤는데.
이들 외에도 인근에 다른 부족들이 살지만, 단 한 번도 전쟁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니, 전쟁이란 단어 자체가 이들에게는 없었다.
‘내 거’, ‘네 거’, ‘빌려줘’란 단어도 없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너무나 평화로운 세상이다.
하지만 신은 한 생명체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이곳에서 인간은 피식자다.
그것도 절대 피식자.
원래 내가 살던 세상.
그곳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불린다.
인간이란 종족의 생존을 위협할 존재는 없다.
인간의 유일한 천적은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사각뿔(피라미드)로 그린다면, 인간은 최하층에 머문다.
세상천지에 살아 움직이는 거의 모든 생명체가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천적이란 뜻이다.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네 번째, 무공.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괴력으로 추론해 보건대 1갑자?
아니, 그 이상이다.
특히 바위를 부숴라의 내공은 최소한 5갑자 이상일 것으로 추론된다.
무림으로 비교하자면, 무슨 무림 10대 고수니 어쩌니 하는 사람과 같은 기운을 몸 안에 품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
젠장할!
지금 내가 맞게 추론하고 있는 건가?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느꼈으니 부정할 수도 없고.
그런데 더 웃긴 건.
이들이 그런 엄청난 내공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제대로 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공은 있지만 무공이 없다.
검법, 곤법, 보법, 심법이란 건 아예 없고, 내공의 운용조차 제대로 하는 것인지 의심이 간다.
아니, 못 한다.
그냥 단순하게 힘을 끌어 올리고 내려치는 게 전부다.
그럼 도대체 그 내공은 어떻게 쌓는 거지?
심법 없이 내공을 쌓는 게 가능해?
내 상식으로는, 아니 무림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투성이니, 이것 역시 부정할 수 없고.
도대체 어떻게 그런 괴력을 쌓을 수 있는 거지?
"이봐! 깼는가?"
"아! 바위를 부숴라 아저씨, 오셨어요?"
"그래, 아침 식사하러 가자고. 식사하고 족장님과 원로님들께 인사드려야 해."
"네, 알겠어요."
이들에 관해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
* * *
쉭!
쉬쉬쉬식!
타타탓!
탓탓탓!
씨앗 껍질 까.
이곳 부락 족장의 이름이다.
그리고 열두 명의 원로들.
그들 앞에서 어제 닭과 병아리들을 상대로 펼쳤던 낙백보를 다시금 펼쳤다.
"헉헉헉! 이게… 헉헉! 낙백보라는 겁니다."
비걸개 후보 시험 때 펼쳤던 것보다 더 열심히, 정말 최선을 다해 낙백보를 연이어 시전했다.
하지만.
"음… 그, 그래. 이만 쉬게."
족장과 원로들의 표정이 영 시원치 않다.
젠장.
헛수고를 한 것 같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이 위력을 알아볼 텐데,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여 줬더니 반응이 그랬다.
미친놈인가?
술에 취했나?
불쌍해 보이는데?
다리가 원래 아픈 거야?
그런 반응들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비실대는 게 힘이 많이 들어 보이는군. 쓰러질 것 같으니 그만 앉게."
"네, 족장님."
"바위를 부숴라에게 자네 사연은 들었네. 당장 갈 곳은 있나?"
"없습니다."
"음, 그렇군. 너무 슬퍼하지 말고 힘내시게. 우리 부족 사람들이 자넬 응원할 거야."
역시 내가 부족 사람들과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럼 이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건가요?"
"허락하다마다. 자네를 우리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 주겠네."
"감사합니다, 족장님."
씨앗 껍질 까 족장과 원로들 모두, 조금 전 이상했던 표정을 싹 지우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기뻐해 주었다.
"저녁에 부족 사람들 모두를 불러 정식으로 자네를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의식을 치르겠네. 그전에 자네에게 새 이름을 주지."
"네? 전 이미 이름이 있는데요."
"그 이상한 이름 말인가? 어허,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영 아니라서. 자네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니, 받아들이게."
"네."
"비실대다 쓰러져."
"네?"
"자네가 닭과 병아리들의 공격을 피하며 보였다는 신기한 걸음걸이에 대해 들었네. 그래서 조금 전에 확인차 그걸 다시 보여 달라고 한 거고."
어째 좀 불안하다.
"기운이 없구먼. 자네 심장에서 아무런 기운도 느끼지 못하겠어. 부상을 입어서 다 사라진 건가? 그러니 비실비실하며 걸은 거고, 그게 운이 맞아떨어져 닭과 병아리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나? 내 말이 틀리나?"
아!
그걸 그리 해석하다니.
돌겠네.
무공을 기초부터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그나저나 기운을 심장에 쌓는다니, 그건 또 뭔 소리야?
됐다, 포기할 건 포기하자.
"네, 그게 뭐……."
"하하! 됐어. 그러니 자네 이름은 오늘부터 비실대다 쓰러져야. 어때? 딱 어울리지 않나? 하하하!"
족장과 원로들 모두 즐거워한다.
이름을 이렇게 지으면, 붉은 머리가 검은색이 된 것처럼 나도 기운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됐다.
이곳에 머물게 해 주는 게 어딘가.
감내할 건 감내하자.
* * *
"비실대다 쓰러져, 반가워요."
"비실대다 쓰러져, 잘 왔어요. 힘내세요!"
저녁에 큰 잔치가 열렸다.
부족 사람들 모두가 모여 부족의 일원이 된 나를 축하해 주는 자리였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모두가 크게 웃는 즐거운 잔치였다.
물론, 나는 기운이 하나도 없다.
빌어먹을 이름 때문이다.
너무 쉽게 인정해 버린 것 같다.
이런 이름으로 어디 장가나 가겠냔 말이다.
"이봐, 비실대다 쓰러져."
"네, 바위를 부숴라 아저씨."
"자네 여기서 새 출발 하려면, 미리미리 배우자감도 물색해 놓고 그래야지?"
"그, 그게……."
엇?
갑자기 없던 기운이 샘솟으려 한다.
"내가 우리 부족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을 소개해 주겠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정말? 그럼 없던 일로……."
"아이쿠! 그래도 사나이가 한번 말을 뱉었으면… 하하하!"
바위를 부숴라가 씩 웃는다.
그런 후 뒤를 돌아 크게 손짓을 한다.
부족 최고의 미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심장이 콩닥콩닥.
아!
내가 연애란 걸 해 봤어야지.
걸일번을 3년 동안 좋아하면서, 좋아한다는 말은커녕 내색도 못 했는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떨린다.
쿵!
쿵!
와!
심장 소리가 요동을 친다.
엇?
아닌데?
이거 내 심장 소리 아니다.
쿵!
쿵!
지진인가?
그것도… 아니다.
뭐지?
갑자기 불안하다.
쿵!
쿵!
쿵!
이거… 이거 말이다.
"자, 소개하지. 우리 부족 최고의 미녀. 큰 바위 얼굴과 옆으로 굴러가야."
정확히 몸과 머리의 비율이 2대 1인 여인.
그리고 달걀을 옆으로 누인 것과 흡사한 체구의 여인. 두 여인이 나를 보며 수줍게 웃는다.
"안녕하세요, 비실대다 쓰러져 님."
"아, 네. 안, 안녕하세요."
X팔!
하루빨리 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전에.
중원으로 돌아가기 전.
내가 바위를 부숴라, 저 인간 꼭 죽이고 여기 뜬다.
* * *
누가 그랬다.
우리 무림인이 평생 수련해 쌓을 수 있는 내공의 양은 1갑자라고.
그 기준을 언제 누가 왜 그렇게 정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금의 무림에서는 그것이 내공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 전, 나를 축하해 주는 잔치가 열리고 있을 때 이곳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나도 아이가 태어난 곳으로 향했다.
갓 태어난 아이는 그 기운을 숨길 수 없어서 산모는 개미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아이를 출산한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일단 그들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갓 태어난 아이에게서 엄청난 양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흡사 걸일번과 걸사번이 내공을 모두 끌어 올려 적을 상대로 싸울 때와 비슷한 양의 기운이었다.
반 갑자, 30년 치의 내공이다.
그리고 나는 곧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의 아이들은 모두 태어날 때 저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바위를 부숴라에게 많은 것을 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토대로 밤새 이곳의 내공에 대해 분석했다.
불타는 머리, 큰 바위 얼굴, 옆으로 굴러가를 비롯한 지학(志學, 15세)에서 약관(弱冠, 20세)의 청년들, 3, 4갑자.
바위를 부숴라와 열두 명의 원로들, 10갑자.
씨앗 껍질 까 족장, 16갑자.
삼재기공조차 없는 이 세상.
단순히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 약관의 나이에 3, 4갑자, 60세의 나이에 10갑자.
정확히 무림의 열 배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이곳, 이 세상.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이 새로운 세계.
이곳의 대기가 머금고 있는 기운이 내가 살던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밀도가 높다는 것을.
그래서 떨렸다.
만약, 만약 내가 제대로 된 심법.
개방에서 사사받은 혼원귀일신공(混元歸一神功)으로 축기를 하면 얼마나 많은 내공을 쌓을 수 있을지.
나는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혼원귀일신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