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내가 상대한 무림의 노괴들을 네가 직접 봤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걸?”
“늙은 괴물들이라니? 거긴 괴물이 없다면서?”
“대신 사람의 피를 탐하는 강시라든가, 그런 놈을 만든 혈마 같은 늙은이가 있었지.”
그들은 박민준이 지구에 돌아와 상대했던 7등급 괴물보다 더 강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알파 시스템하에서 곤륜파의 거의 모든 무공을 극성으로 익힌 박민준은 그들보다 더 강했다.
“내가 베타의 힘을 잃더라도, 충분히 강해. 전혀 문제없다고.”
“8등급 괴물을 이길 정도로?”
“그래.”
“베타는? 너도 알다시피 놈의 힘은 장난이 아니라고. 절대적인 확신이 필요해.”
이번엔 박민준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이 두려워하는 건 천마 신공을 익힌 그였다.
베타 시스템이 준 능력을 잃으면, 자연히 그때 익힌 천마 신공 또한 상실해 버릴 터.
‘내가 곤륜파의 무공만으로 놈을 제압할 수 있을까?’
다행히 과거의 그가 천마를 상대할 당시보다 월등하게 강해진 상태였지만, 그것 역시나 베타 시스템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붙어봐야 안다는 말인데.’
지구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시간을 더 끌 것인가?
박민준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베타를 잠시 놓친 사이, 녀석은 전 세계에 숨겨져 있던 페이 늙은이의 장치를 모두 찾아내서 강제로 작동시켜 버렸다.’
그런데 거기다 시간을 더 주면?
‘지금은 그나마 내가 녀석을 감당할 수 있지만, 여기서 또 시간을 주면 그땐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이왕이면 박민준과 인류에게 좀 더 유리함이 있을 때.
녀석과 최후의 대결을 펼치는 게 나을 것이다.
여전히 못 미더운 표정을 보이는 더원을 향해, 그가 사실대로 말해줬다.
“싸움의 승패는 베타 녀석과 붙어봐야 알 것 같아.”
“역시 너도 확신이 없다는 거군. 그렇다면 이번 계획은 뒤로 미루고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
“아니. 놈에게 더 시간을 주면 안 돼.”
“어째서?”
“내 생각도 그렇고, 릴리도 녀석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걸 느끼고 있으니까.”
“릴리? 제시카의 몸에 들어가 있다는 마족 말이야? 그 여자가 베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
“맞아. 릴리 말로는 베타가 지금 몸을 숨기고 있는 건 내가 더 강하기 때문이래. 하지만 지금도 녀석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지.”
“빌어먹을. 그럼 어쩔 수 없잖아.”
“그래. 그냥 확 저질러 버리는 수밖에.”
더원은 예정대로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
인류의 최종 무기가 된 박민준이 초월적 존재인 베타 시스템을 이기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난 여전히 불안하고, 확신이 서지 않지만, 친구인 너를 믿어보겠어.”
더원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피식.
그를 본 박민준이 왼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우리가 설치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면 베타도 시스템의 힘을 지구에서 사용할 수 없을 거야.”
“확신해?”
“아니. 갈랜드 박사 말로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라. 최소한 그게 아니더라도 녀석의 힘이 약해지긴 할 거야.”
“그럼 다행이긴 한데. 아무튼, 너무 큰 짐을 너 혼자 지게 해서 미안하다.”
“너답지 않게 별말을 다 하는군.”
“젠장. 죽지 마라. 그리고 반드시 이겨라.”
“그래. 이젠 결말을 볼 시간이다.”
단호하게 말한 박민준이 빙글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며, 더원은 미안함과 함께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함을 느꼈다.
‘언젠가 이런 시간을 맞이한다면….’
인류의 미래를 걸고 싸우게 된다면, 그리고 그 대표를 한 명 뽑는다면, 그건 당연히 내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건 더원의 몫이 아니었다.
‘어쩐지 저 녀석이라면 뭔가 해줄 것 같다. 힘내라. 친구.’
***
각국의 협조에 힘입어.
앞서 빌런들의 대대적인 습격으로 중단되었던 기계 장치의 보급이 신속하게 이뤄졌다.
다만 이전과 다른 작동법이 필요했는데.
그건 바로 전기가 아니라 마력석과 인간의 피로 작동한다는 점이었다.
마족인 릴리의 마법 지식이 더해진 장치는 예전보다 몇 배나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또한, 기존 장치는 과부하로 인해 몇 년을 주기로 교체해줘야 했지만, 마법으로 개선된 지금은 그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도 새로운 장치가 설치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박민준 일행도 그곳에 모두 와 있었다.
“내가 5000년간 쌓은 마법적 지식이 총동원되었으니. 앞으로 100년은 거뜬할 거야. 관리만 잘하면 150년도 문제없을걸?”
사람들 앞에서 크게 떠들며, 칭찬을 바라는 모습의 릴리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박민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그게 다야?”
“그럼 뭘 더 바라?”
릴리가 박민준에게 다가가 귓속말했다.
워낙 작은 소리로 말해서 주변의 그 누구도 엿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민준의 다음 행동을 통해 뭔가 말도 안 되는 얘길 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너하고 내가? 그럴 일은 절대 없어.”
“그렇게 내가 싫어?”
“닥쳐. 우선 넌 인간도 아니잖아.”
“세상에. 네가 종족 차별자인 줄 이제 알았네. 실망이야.”
헛소리를 내뱉는 그녀를 무시하고.
박민준이 명령조로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기계 장치에 걸린 마법이나 발동시켜.”
“알았어. 하면 될 거 아냐. 근데 좀 상냥하게 말해 주면 안 돼?”
그녀가 대꾸도 하지 않는 박민준을 째려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에휴. 인간 같지도 않은 남자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그녀가 주문을 말하는 동안, 기계 장치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 잔뜩 모아둔 피가 빨려 들어갔다.
역겹고 비릿한 냄새와 함께.
그로테스크한 광경이라, 몇 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통령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참지 못하고 박민준에게 속삭였다.
“저거 정말 괜찮은 거야? 어쩐지 불길한데.”
“걱정하지 마. 저 녀석은 나와 종속계약을 맺어서 절대로 배신할 수 없어.”
“그럼 다행이고.”
대답을 듣고도 잔뜩 찌푸린 그의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릴리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콰과과과광!
기계 장치가 부서질 듯한 굉음이 연이어 크게 울려 퍼졌다.
“저거 터지는 거 아니야?”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속에서.
박민준과 릴리만이 침착함을 유지했다.
요란을 떨던 기계가 잠잠해지고.
번쩍.
이번엔 검붉은 빛의 기둥이 장치 위로 치솟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그 빛이 구름을 파고들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그 어떤 소음도 없었다.
빛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끝난 건가?”
“그래. 내 주문을 통해 전 세계에 연결한 장치가 제대로 작동했어. 마족인 내가 아니었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인간들은 진짜 날 향해 제물이라도 바쳐야….”
자화자찬하는 그녀를 무시하고.
박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는 그를 보고, 릴리가 빠르게 말했다.
“왜 그래?”
“너 설마 못 느끼는 건가?”
“뭘? 아! 이런!”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르르르르르.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진인가?”
대통령의 말을 릴리가 반박했다.
“멍청한 인간아. 이건 지진이 아니야.”
“그럼 뭔데? 그나저나 예쁘게 생긴 처자가 말버릇이 고약하네.”
“닥쳐. 멍청아. 지금 너 따위를 상대할 때가 아니야. 그런 말 할 시간에 도망이나 쳐.”
그가 박민준을 바라봤다.
끄덕.
“릴리 말이 맞아. 최대한 멀리 도망쳐. 어서 서둘러.”
“알았어. 친구야. 그럼 뒤를 부탁한다. 내가 멀리서 응원할게.”
피식.
대통령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 지은 그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검까지 꺼내 든 그가 릴리를 향해 말했다.
“싸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넌 저 친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여기서 피신시키도록 해.”
“그럼 나야 좋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릴리는 빈말이라도 같이 싸우겠다는 얘기 따윈 꺼내지 않았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운 하나하나가 자신 못지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족의 도움을 받아 모두가 안전하게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혼자 남은 박민준이 평소답지 않게 긴장한 얼굴로 숨을 골랐다.
‘베타 녀석. 날 죽이려고 아주 작정하고 덤비는군.’
한국의 주변 나라에 있던 8등급 괴물들이 전부 이곳으로 몰려왔으니.
그 수가 무려 다섯.
빌딩보다 더 큰 녀석들이 박민준을 사방에서 포위하며 나타났다.
박민준은 괴물들을 상대하고 난 이후를 생각했다.
‘저놈들을 죽이고 나면 베타 녀석이 나타나겠지.’
그러니, 최대한 힘을 아껴서 괴물을 처리해야 한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전투 준비를 하던 그때.
눈앞에 알림이 떴다.
[예상한 상황으로 인해 잠시 시스템이 종료됩니다. 상황이 종료되는 대로 다시 실행될 겁니다. 정상화 될 때까지 시스템이 부여한 모든 능력을 사용하실 수 없다는 점을 유의해 주십시오.]
긴 알림을 다 읽기도 전에.
박민준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각성자에게 반응이 왔다.
“각성하면서 얻었던 힘이 사라진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기계 장치가 작동하고 나서 이러는 것 같은데?”
“설마? 그 장치가 게이트를 차단하면서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친 건가?”
“그런 얘기는 사전에 듣지 못했는데?”
전 세계의 각성자가 힘을 모두 잃고, 혼란을 겪는 상황에서 박민준 혼자 다른 걸 보고 있었다.
바로 알파 시스템의 복구였다.
[귀하에게 적용되었던 시스템이 차단되었습니다. 당신의 몸에 저장된 알파 시스템을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알파 시스템이 내 몸에 저장되어 있었다고?”
하긴 그러니까 베타 시스템하에서도 곤륜파의 무공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거겠지.
이전에 지구로 돌아왔던 박민준이 그랬던 것처럼.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1, 2, 3...]
엄청 느리게 올라가는 숫자를 보며, 평소답지 않게 조급함을 느낀 그였다.
괴물들이 이제 몇 걸음만 더 내디디면 박민준을 짓밟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베타 녀석. 이럴 줄 알고 지금 날 노린 거였구나.’
그는 지금 당연하게도 베타 시스템에서 익힌 천마 신공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파 시스템에서 극성으로 배운 곤륜파의 무공 또한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베타로 이전된 그 무공을 다시 불러와서 알파 시스템으로 적용한 뒤에야 그의 마음대로 쓸 수 있을 터.
그러니 그는 지금 조금 강한 일반인에 불과하단 말이었다.
‘시간이 필요해. 무슨 방법이 없으려나?’
답답한 마음에 그가 바람의 정령 왕자라도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망할. 정령 소환도 베타 시스템에서 익힌 거라 사용할 수 없구나.’
그렇게 별다른 수가 없는 상황에서.
기어이 그의 코앞까지 도착한 괴물들이었다.
무려 8등급이나 되는 놈들 앞에 선 단 한 명의 인간은 참으로 작아 보였다.
“그냥 피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버는 수밖에.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문 그가 혼자 힘으로 괴물과 싸우려던 그때.
멀리 뭔가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