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뉴 유니온의 페이 회장이 숨겨놓은 장치가 작동했으니.
일찍이 인류가 본 적 없는 크기의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괴물은 거대했다.
대부분이 무려 8등급이었다.
파괴력 또한 비교할 수도 없었는데.
6등급이나 7등급은 녀석의 새끼처럼 보일 정도였다.
“엄청난 크기다. 여태까지 저런 놈은 본 적이 없어.”
“갑자기 8등급 괴물이라도 나타났다는 건가?”
“지구에 종말이라도 찾아온 거야?”
그런 상황에서 각국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S등급 각성자를 다수 지닌 헌터 강국은 그나마 저지선을 만들어 시민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괴물에게 휘둘려서 통째로 망해버릴 지경이었다.
국가가 붕괴하는 건 물론이고, 인류가 존폐 위기에 선 것이다.
아포칼립스.
말 그대로 세계 종말이 코앞으로 다가온 듯 보였다.
***
미국의 주도하에 세계 정상급 특별 긴급회의가 열렸다.
각국의 지도자는 물론이고, 게이트와 괴물에 일가견이 있는 최고 전문가들이 초대받았다.
“그동안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나 봅니다.”
“괴물이 너무 강력해서 바로 처치하지 못했습니다. 겨우 녀석의 활동 범위를 넓히는 것만 억제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당신네 나라는 그래도 S등급 헌터를 보유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도 우리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단 말입니다.”
각자가 자국의 사정을 떠들며 어수선하던 그때.
“미안합니다. 내가 조금 늦었습니다.”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타난 미국이 대통령이었다.
더원을 보고 모두가 하나둘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회의장이었지만, 오히려 내부의 열기는 아까 서로의 사정을 토로할 때보다 더 뜨거웠다.
‘우릴 이렇게 불렀으니 무슨 대책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더원이잖아.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더원이 담담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비어있는 많은 자리를 보고,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절반도 참석하지 않았다니. 유례없는 상황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건….”
더원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워낙 조용한 터라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불쑥.
손을 들고 말하는 남자였다.
“미국의 대통령께서 지금의 사태를 막을 방법이 있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날 포함해서 여기 모인 모두 한시가 바쁜 몸이니 어서 그 방법을 말해주십시오.”
더원은 자신에게 당돌하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누군가 했더니. 한국의 대통령이었군. 박민준에게 듣고 그런 질문을 한 거겠지요?”
“그렇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더원이었다.
“좋습니다. 나 또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배경인 줄 알았던 하얀 벽에 세계 지도가 나왔다.
화면 가득한 지도 위에는 붉은색 점이 잔뜩 찍혀 있었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부터, 지구에 이런 나라도 있었나 싶은 곳까지.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다.
자국의 위치를 알아본 지도자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아! 저긴 우리나라에서 게이트가 열린 지역인데?”
“새로운 괴물이 있는 지역을 표시한 거였군.”
“저걸 다 파악하다니. 역시 미국이야. 정보력이 대단하군.”
“위치를 안다고 달라질 건 없지 않나? 8등급 괴물을 어떻게 죽일지나 알고 싶은데.”
웅성거림 속에서.
크크 흠.
더원이 헛기침하며 주의를 끌었다.
“저걸 보고 이미 깨달은 분이 있겠지만, 더 확실하게 내가 직접 설명하도록 하지요.”
그의 손끝이 시카고를 가리켰다.
“이번의 대격변 중 한 곳만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시카고?”
“네. 우연히 그곳에 있던 한국의 헌터 박민준이 게이트가 완전히 열리는 걸 막고, 그 안에서 나온 괴물을 처리했습니다.”
“그건 우리도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혼자 전 세계에 출몰한 괴물을 전부 죽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꾸 끼어드는 남자를 향해, 더원이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느 나라에서 온 지도자인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말할 때는 좀 닥치고 있으십시오. 질문은 내 말이 다 끝나고 받을 겁니다.”
박민준과 있을 때는 장난기 많고, 가벼워 보이는 더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이는 카리스마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연신 끼어들던 남자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 더원이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분 때문에 순서가 꼬였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와 박민준이 나서서 전 세계에 퍼진 8등급 괴물들을 사냥할 겁니다.”
이번엔 아무도 끼어들어 말하는 이가 없었다.
대신 작게 들리는 웅성거림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박민준과 더원이라고 해도 8등급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아니, 놈과 싸울 수 있다고 해도, 그걸 쓰러뜨리는 일은 더욱 어려울 텐데.
“핵미사일도 통하지 않는 놈을 무슨 수로 막는다는 말인가? 미국의 대통령께서는 놈들을 직접 상대해보셨소?”
영국 총리의 말에 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 마리를 상대해 봤습니다. 제법 강하긴 하지만, 박민준의 도움 덕분에 어느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원이 말을 아꼈지만, 사실은 박민준의 도움이 아주 컸다.
며칠 전, 디트로이트에서 8등급 괴물을 상대했었는데.
그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녀석의 몸에 압사당할 뻔했다.
기존에 그가 상대했던 괴물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괴물이었으니.
때마침.
박민준이 나타나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 분명한 더원이었다.
극적으로 살아난 뒤에, 더원이 그와 대화를 나누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였다.
더원과 박민준이 나서서 출몰한 괴물을 죽이겠다고 약속하고, 그 대가로 각국에 더욱 적극적인 협조를 얻어낸다.
그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게이트 차단 장치를 전부 작동시키고 게이트가 더 열리는 걸 막으면?
그땐 고립된 베타를 찾아내서 박민준이 놈을 상대하고, 끝장낸다는 계획이었다.
“아무튼, 사냥의 시작은 당연히 내 조국인 미국과 박민준의 한국이 될 겁니다. 그 뒤엔 상황을 봐서 순서대로 찾아가겠습니다.”
“미 대통령님과 박민준 씨가 정말 괴물을 죽일 수 있습니까? 믿어도 되는 겁니까?”
“못 믿으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마지막 질문을 한 지도자가 침통한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나와 박민준의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여러분의 협조를 받아낼 차례 같군요.”
이번에는 제법 큰 소란이 일었다.
“우리에게 대가를 받고, 괴물을 사냥하겠다는 겁니까?”
피식.
비웃은 더원이 그를 똑바로 보며 답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박민준과 내가 서로의 자국만 지키겠다고 하면? 그땐 당신이 뭘 어쩔 건데?”
대놓고 비꼬며 반말하는 그를 마주하면서도, 상대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과 자국이 처한 상황을 그제야 깨달았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지요. 그저 국민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꼴을 지켜보는 수밖에.”
“내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박민준과 내가 괴물을 모두 사냥할 겁니다. 대신!”
마지막에 힘주어 말한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눈을 일일이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사냥하는 동안 또 게이트가 열리는 일은 막아야겠지요? 아니면 내가 시지푸스처럼 될지도 모르는데.”
신을 속인 죄로, 끊임없이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굴려야 했던 시지푸스의 이야기처럼.
신 같은 존재인 베타에 대항해 싸우는 상황에서, 더원과 박민준이 괴물을 죽여도 문제다.
게이트가 또 열리고 괴물이 계속 튀어나온다면?
끊임없이 의미 없는 사냥만 반복해야 한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이었다.
이번엔 모두가 그걸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게이트 차단장치의 배급과 작동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 역시 미국과 박민준이 나서서 대부분 처리했습니다. 이젠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시카고 빌런 집단을 시작으로 며칠 사이에 대형 조직을 괴멸시킨 박민준과 미국의 특수부대였다.
그래서 이젠 크게 방해받거나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으니까, 내가 이렇게 귀찮음을 무릅쓰고 말하는 거겠지요?”
“어서 말씀해주십시오.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
회의가 끝나고 더원이 박민준과 화상 통화를 했다.
“여기 일은 네 말대로 진행됐다.”
“당연히 그래야지.”
“수고했다는 말 정도는 해줄 줄 알았는데.”
“고생은 내가 하고 있지 않나?”
“그건 그렇지. 하지만 나도 싸우는 게 더 편하고 좋아. 여기서 이러는 게 얼마나 신경 쓰이고 귀찮은데.”
더원이 회의장에서 떠들던 시간에도 박민준은 현장에서 괴물과 싸우고, 빌런들을 처리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새로 계약한 마족의 힘을 빌려서 게이트 차단장치의 성능을 크게 개선할 수 있었다.
인류의 과학.
다른 차원의 금속.
마족의 마법.
이 세 가지가 합쳐져 기존보다 더 강력하고 범위가 훨씬 넓은 장치를 만들어 냈으니.
“지구에 열리는 게이트를 차단하면, 그 영향이 시스템에도 분명히 미칠 거야.”
“응. 나도 들어서 알아. 각성자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 시스템이니까.”
기계 장치의 힘으로 지구가 시스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대신 부작용도 존재했다.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각성자들 또한 그 모두 힘을 잃게 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다만, 그런 사실을 알리면, 기존 빌런은 물론이고, 선한 헌터들도 크게 반발할 수 있으니.
그걸 외부에 철저하게 숨기고, 일을 진행할 참이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더원이 불안한 표정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데 너 정말 괜찮겠어. 힘을 잃으면 어떻게 8등급 괴물을 상대할 건데?”
더원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힘을 포기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존재하는 8등급 괴물은 어떻게 상대하고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더원의 어깨를 짓눌렀다.
전 세계 지도자를 모아서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본인이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그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박민준이 확신에 찬 말투로 통화를 이어나갔다.
“걱정하지 마. 나한테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뭔데? 베타 시스템 없이 괴물을 상대할 방법이 뭐냐고.”
“언젠가 내가 말한 적이 있지 않나?”
“뭘?”
더원은 정말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너도 알다시피, 난 과거에 다른 차원을 다녀왔어. 그것도 무려 20년 동안 말이지.”
“어…. 설마?”
“그래. 베타 시스템이 차단되어서 힘을 빼앗겨도, 나에겐 또 다른 대안이 있단 말이지.”
“그렇구나. 네가 다녀온 다른 차원의 시스템이 남았으니까. 그걸로 8등급 괴물들과 싸우면 되겠구나.”
“그래. 내가 지구에 다시 돌아왔을 당시에 잠시나마 알파 시스템의 힘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었어.”
박민준이 눈앞에 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 더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네가 다녀온 세상에도 8등급 괴물 같은 녀석들이 많았어?”
“아니. 그런 괴물은 없었지. 그건 존재는 나도 지구에 돌아와서 처음 봤어.”
“그래? 그럼 네가 알파인지 뭔지 하는 시스템의 힘을 회복해도 확신할 수 없다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