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산산조각이 난 조형물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박민준의 눈에는 그게 또렷하게 보였다.
“안 보이면 저리 비켜.”
박민준이 장난치는 줄 알았는지.
피식거린 그녀였다.
“너 지금 날 놀리는 거야? 네가 이런 모습이 있는…. 꺅!”
그런 제시카 로즈를 황급히 옆으로 밀어낸 그였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가오는 검은 연기를 향해, 박민준이 돌도끼를 내밀었다.
내공을 모아서 검은 연기를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휙!
자아가 있는 건지.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을 보인 검은 연기였다.
두렵다는 듯.
더는 그를 향해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멀찍이 떨어져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제시카 로즈를 향해 돌진했다.
“뭐 해 멍청아. 너한테 가고 있잖아. 어서 피해.”
“야.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나보고 뭘 어쩌라고?”
두리번거리며 제자리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그녀를 향해.
박민준이 돌도끼를 던졌다.
검은 연기가 그것마저 피하지는 못했다.
끼이이이!
앞서 괴물이 그랬던 것처럼.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공중에서 마구 몸부림치듯 움직이더니.
땅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제시카 로즈는 그제야 뭔가 있다는 그의 말을 믿게 되었다.
“진짜 뭐가 있긴 하네? 보이지는 않아도, 소리는 들을 수 있어.”
“내가 여태 말했잖아.”
“그래서 이젠 죽은 거야?”
“나도 몰라. 그냥 날 피해서 밑으로 숨은 것 같아.”
“이제 어떻게 하지? 땅이라도 파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는지.
삽질하는 시늉을 하는 제시카 로즈였다.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박민준이었다.
그가 또 뭔가를 봤는지, 갑자기 빽 소리쳤다.
“야. 거기 서 있지 말고 어서 이쪽으로 와.”
“또 왜? 아악!”
제시카 로즈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땅에서 나온 검은 연기가 제시카 로즈의 몸에 완전히 들어가 버렸다.
“빌어먹을.”
미간을 잔뜩 찌푸린 박민준이 돌도끼를 들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제시카 로즈였다.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박민준에게 말했다.
“너처럼 강한 인간이 있는 세상이라니? 이곳은 참으로 재밌구나.”
“너? 다른 세상에서 온 괴물인가? 지금 그 녀석 몸에 들어간 거야?”
“그래. 원래는 네놈의 몸을 빼앗고 싶었지만,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더군. 그래서 아쉬운 대로 이 여자를 차지했지.”
싱글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목에.
척!
돌도끼를 들이민 박민준이 싸늘하게 말했다.
“뒤지기 싫으면 당장 어서 그 안에서 나와라.”
“어디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 이렇게 예쁜 인간 여자라면 분명 너와…. 악!”
건방지게 말하던 그녀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주르륵!
박민준의 돌도끼가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다.
깊지는 않지만, 매우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황이었다.
“넌 인간 남자가 아닌가? 이 미녀와 서로 아는 사이 같은데. 정말 죽이겠다는 거야?”
“왜 아니겠어?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 따윈 전혀 없다.”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네. 너 솔직히 말해봐.”
목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하다니.
‘아프지도 않은 건가? 그나저나 제시카 로즈를 구해? 아니면 그냥 저 녀석과 함께 죽여버려?’
박민준이 마저 목을 잘라버릴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구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녀의 말에 답했다.
그동안 지구에 등장한 괴물은 모두 실체를 가진 괴물이었다.
짐승 같은 모습에 지능도 낮았었는데.
갑자기 저런 놈이 나오다니?
쉽게 죽이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정체를 알아내고, 이전에 열린 게이트와 뭐가 달라진 건지를 밝혀내기로 했다.
“뭘? 솔직히 말하라는 거지?”
“너도 인간이 아니지? 나처럼 마족이냐? 응? 지구에 사는 마족이냐고.”
“그냥 사람이다.”
“지랄. 너처럼 강한 인간이 있다는 말은 내 오천 년 인생에서 들어본 기억도 없어.”
피식.
박민준은 상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네가 오천 년을 살았다고?”
“그래. 인간에게는 말도 안 되게 긴 시간이겠지. 하지만 난 마족 중에서도 젊은 편에 속한단 말이야. 청춘이라고 할까?”
“그렇게 오래 살아놓고 너무 약한 거 아니냐?”
“뭐 이런 개자식이 다 있어. 너 지금 말 다 했냐?”
“아니. 이제 시작이다. 이제부터 내가 질문하고 넌 답한다.”
“미친놈이.”
“아니면 이대로 죽든가.”
“그래 봤자 소용없어. 이 여자가 죽으면 몸을 버리고 빠져나가면 그만이니까.”
“어디 그래 보든지.”
박민준이 손에 힘을 주자, 돌도끼 날이 조금 더 깊게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깊으면 그대로 죽어버릴 상황까지 도달했다.
위기를 느낀 그녀가 몸을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뭐야? 이거 왜 이래? 몸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역시 못하겠지?”
“인간 주제에. 나한테 무슨 수작을 벌인 거야?”
“천마 신공에 잡기술이 좀 있거든. 그걸 응용해 봤지.”
“천마 신공? 그게 이 세계의 신성 마법이냐?”
피식.
상대를 대놓고 비웃은 박민준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너 같은 존재가 왜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거지?”
“차원의 문이 열렸길래, 그냥 심심해서 들어와 본 거야.”
“저 위의 게이트라면 내가 완전히 열리기 전에 닫아버렸을 텐데?”
“똑똑한 줄 알았더니. 역시 인간이 맞긴 하군.”
“뭐?”
“너 내 본체를 봤으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아! 네놈은 검은 연기였지.”
“맞아. 바늘로 찍은 구멍만 있어도 난 얼마든지 거길 드나들 수 있어.”
“자랑이다. 아무튼, 그래서 너 같은 놈이 지구에 또 있을까? 왜 갑자기 너 같은 놈이 지구에 나타난 거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문을 연 건 너잖아? 아니야?”
“내가 아니야.”
“그래? 분명 아주 강력한 존재가 차원의 문을 열어준 것 같았는데.”
“나만큼?”
“그래. 마법은 흔적을 남기는 법. 난 거기서 너만큼 강한 존재의 기운을 느꼈어.”
마족의 말을 듣고.
박민준은 베타를 떠올렸다.
기계 장치를 해체하면서 전원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보조 에너지도 완벽하게 없앴다고 했다.
그런데도 장치가 작동하며 폭주했고, 기어이 게이트가 열렸다.
갈랜드 박사의 말에 따르면, 기존에 지구에서 열렸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크기의 게이트가 열릴 뻔했다나?
박민준이 그걸 막았기 때문에 지금의 마족 정도만 게이트를 통과한 건지도 몰랐다.
“넌 네 세계에서 얼마나 강한 존재지?”
“나? 나는 거의 최강이지. 너도 날 상대해봤으니 잘 알 거 아니야?”
“아주 약해 빠진 놈인 건 잘 알고 있지.”
“젠장. 이거 왜 이래? 내가 이래 봬도 드래곤 헌터라고 불리던 마족이야.”
“드래곤 헌터?”
“그래. 그 마법 쓰는 비만 도마뱀 놈들도 날 보면 피할 정도였다고.”
박민준이 잔뜩 못 미더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몹시 억울했는지.
마족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이 망할 인간 놈아. 내가 약한 게 아니야. 네가 너무 강한 거라고. 그걸 똑똑히 알아두란 말이야. 알았어?”
“그래. 내가 좀 강하긴 하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박민준을 향해.
마족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나한테 더 궁금한 게 없으면, 이제 이것 좀 치워주겠어?”
“내가 왜?”
“왜라니? 여태 열심히 대답해 줬잖아.”
“그래서?”
“야! 이 마족만도 못한 놈아. 이렇게 농락할 거면 차라리 날 죽여라.”
“그래 알았어.”
박민준이 그대로 목을 잘라버릴 기세였다.
깜짝 놀란 마족이 서둘러 소리쳤다.
“아니야~아니라고! 제발 죽이지 마.”
“내가 널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럼. 마족이 얼마나 유용한데. 오랜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와 인간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마법 지식도 있지.”
“지혜는 없는 것 같은데. 그 마법 지식이란 말이 좀 끌리긴 하네.”
“그래. 마법에 관한 건 나에게 뭐든 물어봐도 좋아. 인간들이 모르는 마법까지 내가 아주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심지어 드래곤의 마법도….”
목숨을 구걸하며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시작한 마족이었다.
말이 길어지자 박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본 마족이 말꼬리를 흐리면서 그의 눈치를 봤다.
“아무튼, 날 살려주면 좋겠는데….”
뭔가에 빙의한 상태에서 죽으면 그 안에 있던 마족도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박민준에게 매달린 그녀였다.
박민준도 눈치로 그걸 알아차렸다.
“내가 널 살려줄 수도 있어. 대신”
“대신?”
“내 부하가 돼라.”
“마족인 나보고 인간인 네 부하가 되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100년도 못사는 인간이 어찌 5000년을 산 나를….”
“그래서 싫다고? 그럼 죽어야지 뭐. 잘 가라.”
“아니야! 그냥 좀 고민을….”
“그럼 10초를 세겠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알았어. 알았다고. 네 부하가 될게.”
“말이 좀 짧다? 마족은 부하가 상관에게 반말해도 되나?”
“부하가 되겠습니다.”
“좋아. 그럼 계약을 해야지.”
“계약까지?”
“그게 당연하지. 넌 내가 오늘 처음 보는 마족의 말만 믿고 그냥 놔줄 바보로 보였어?”
“빌어먹을.”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박민준이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도끼를 든 손에 힘을 주는 걸 느끼고.
마족이 서둘러 주문을 외웠다.
“나 릴리드젤 베라 수마 캉무로 떼모는 인간…. 너 이름이 뭐냐?”
“박민준.”
“인간 박민준의 부하가 될 것을 맹세한다. 이를 어기면 내 존재가 영원히 소멸할 것이며, 이 계약은 양측이 파기를 합의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녀의 몸에서 검붉은 빛이 잠시 반짝였다.
박민준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쓸데없는 내용이 붙긴 했지만, 확실히 계약을 이룬 것 같군.”
“당연하지. 내가 이런 계약을 하루 이틀 해본 줄 알아.”
물론, 그때는 마족인 그녀가 갑이고 인간이 을이었다.
지금은 그 반대였고.
그게 불만이라, 릴리드젤 베라 수마 캉무로 떼모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너 이름이 너무 긴데. 앞으로 릴리라고 해라.”
“야!”
“뭐?”
릴리는 그가 아직 자신의 목에서 도끼를 거두지 않은 걸 보고, 슬쩍 꼬리를 내렸다.
“사실 릴리가 제 애칭이 맞습니다. 그걸 아셨군요. 앞으로 그렇게 절 불러주세요. 헤헤.”
“그래. 릴리. 무슨 개 이름 같아서 부르기도 참 좋네. 릴리야. 쯧쯧.”
“네. 난 당신의 부하이니. 어디 네 마음대로 하세요. 힘없는 내가 당해야지 뭐. 어쩌겠어요.”
이미 체념했는지.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씩 웃은 박민준이 드디어 그녀의 목에서 도끼를 치웠다.
“고마워요.”
“근데, 원래 그 몸의 주인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아까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그걸 묻는 거예요? 역시 날 속인 거였군요?”
“어서 대답하기나 해.”
“그냥 몸만 빌려 쓰는 것일 뿐. 나중에 날 계약에서 풀어주면, 이 여자도 다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왜 하필 그 녀석 몸에 들어간 거야?”
“예쁘기도 하고, 몸에 지닌 마력도 상당하더라고요.”
“하긴. 나름대로 S등급이니까.”
“당신은요? 몇 등급이죠?”
“나도 S등급이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이 여자와 당신의 힘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데?”
“그래도 나와 제시카 모두 S등급일 뿐이야.”
“정말 이상한 세상이네요.”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서 상황이 종료되었다.
하지만 인류에게 몹시 불행하게도 그곳에서만 기계 장치가 폭주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