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해를 등지고 서 있는 까닭에 실루엣만 볼 수 있었다.
“박쥐?”
“저렇게 큰 박쥐가 세상에 어딨겠냐?”
잭 액스와 부두목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지붕을 대신하는 창이 박살 났다.
높은 곳에서 훌쩍.
뛰어내린 뭔가가 소리도 없이 바닥에 내려섰다.
A등급 각성자만 되어도 할 수 있는 동작이었지만, 잭 액스는 불안함을 느꼈다.
침입자의 모습이 악마 가면을 쓴 붉은 복장의 사내였기 때문이었다.
악당이라고 해도 뉴스를 멀리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정보를 얻기 위해 눈과 귀를 항상 열어두었으니.
그가 상대를 바로 알아봤다.
“베타? 근데 그 복장은 다 뭐지? 그새 취향이 바뀐 건가?”
잭 액스의 말을 듣고, 박민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원래 이곳의 쓰레기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베타와 아는 사이인 건가?’
시스템의 현신을 알고 있다는 말투 때문에 당장 손을 쓸 생각을 버렸다.
대신 침묵하며 상대가 먼저 말하기를 유도했다.
잭 액스는 전과는 다른 살기와 분위기 때문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TV의 영향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베타가 맞다고 확신했다.
‘미 대통령을 혼자서 죽이려고 할 놈은 베타밖에 없지.’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박민준에게 다가갔다.
“TV를 보니까, 아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던데.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야.”
이번에도 박민준이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운이 좋다고 여겼다.
‘그 가짜 연기를 TV에서 보고, 날 그놈이라 착각하다니. 이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운이 좋군.’
한편, 그의 침묵을 긍정이라고 받아들인 건지.
잭 액스가 부하들을 향해 뒤돌아섰다.
손을 살짝 흔들어 무기를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상대가 시스템이라면 그딴 건 통하지도 않을 테니까.
‘굳이 저놈을 자극할 필요는 없지.’
떨떠름한 얼굴로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하는 부하들을 뒤로하고.
그가 박민준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다신 볼 일이 없을 거라더니. 이렇게 또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
“여전히 재수 없군. 이번에도 뭔가 정보를 줄 생각이라면 고맙게 받아주지. 하지만 나에게 뭔가 시킬 생각이라면 당장 꺼져.”
그의 말을 통해 박민준은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놈 혼자서 기계 장치를 빼돌리고 망가뜨린 게 아니었구나. 베타 녀석이 뒤에 있었던 거야.’
박민준은 자신이 직접 이곳에 찾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베타와 이들이 연결되어 있다면, 놈이 있는 장소도 알 수 있을 터.
‘이 녀석들을 생포하고, 블랙 존슨을 불러야겠군.’
계속 침묵하는 상대를 보고.
잭 액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날 무시하는 거냐? 네놈 덕분에 이득을 좀 보긴 했다만, 그렇다고 내가 만만한 놈이 아니…. 억!”
굵은 목소리로 폼을 잡으며 말하던 잭 액스가 돌연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가뜩이나 빨랐던 박민준의 동작이 이전보다 더욱 빨라졌다.
그래서 옆에 있던 그 누구도 두목 잭 액스가 복부를 한 대 얻어맞고 제압당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두목. 아니 회장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부두목이 그를 살피러 다가서다가 중간에 혼자 쓰러졌다.
그리고 후두두두둑.
박민준의 시야에 닿는 모두가 거의 동시에 기절해버렸다.
그는 이미 천마 신공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뒤였다.
‘정말 가공할 마공이다. 단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대를 일시에 제압할 수 있다니.’
하긴 그러니까, 시스템인 베타가 천마를 두려워했던 거겠지만.
박민준도 상대를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샘솟았다.
실내에 있던 모두를 제압했다고 생각했는데.
박민준이 잭 액스의 소지품을 뒤지는 순간.
벌떡.
멀찍이 떨어져 있던 놈의 부하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려 들었다.
‘내 기술이 통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당했는데 그걸 벌써 풀어내고 움직인 건가?’
둘 다 뭐가 되었든 간에.
도망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잡아서 확인하면 되는 일.’
박민준이 오른손을 길게 앞으로 내밀었다.
허공을 움켜쥐는 동작을 취하자.
열심히 도망치던 사람이 딱 멈춰 섰다.
실제 자신의 등이라도 잡힌 것처럼, 허우적거리더니.
그대로 박민준을 향해 끌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자주 사용하던 허공섭물이었지만, 이번에는 더욱 강력했다.
앞서 도망칠 수 있었던 상황과는 달리 꼼짝 못 하고 그의 손에 잡혀버렸다.
덥석.
그가 상대의 목 뒤를 움켜쥐고 얼굴부터 살폈다.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기에 천마신공을 이겨낸 건가?
그것부터 확인할 생각이었는데.
“너였냐?”
“빌어먹을. 그렇게 열심히 숨어다녔는데. 이런 데서 잡히다니.”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다.
그리고 박민준이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탁.
깊게 눌러쓴 모자를 치우자, 탐스러울 정도로 풍성한 붉은 색의 긴 생머리가 쏟아져나왔다.
“제시카 로즈.”
“그래. 날 잡으려고 한국에서 이런 시궁창 같은 곳까지 날아온 거야?”
“너 때문이 아니다.”
“그냥 얻어걸렸다고? 젠장. 그럼 더 열 받잖아. 재수가 없으려니. 별일이 다 있네.”
그녀가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박민준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두려운 마음이 든 걸까?
태연한 말투와는 달리, 몸을 살짝 떨기도 했다.
피식.
그게 살짝 비웃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렇게 웃어? 뭐가 웃긴 건데? 난 네가 하나도 두렵지 않거든.”
“그럼 왜 숨어있었던 거냐? 존슨이 널 계속 찾아다녔다고 하던데.”
“그건…. 네가 뉴 유니온의 조직원을 잡아 죽인다는 소문 때문에.”
“그게 내가 두렵다는 말과 뭐가 다른 거지?”
기억을 읽는 그가 찾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겼다.
그것도 모자라, 빌런 집단에 숨어, 삼류 악당 노릇까지 했으면서 여전히 입을 놀리다니.
박민준의 말에 정곡을 찔린 그녀가 드디어 할 말이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좋아.”
“뭐가 좋다는 거야?”
“존슨이 널 만나고 싶어 하니까. 그에게 데려다주마.”
“날 죽이지 않겠다는 거야?”
“당연하지. 네 눈에는 내가 살육에 미친 놈처럼 보이나?”
“아니.”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가 박민준의 오른팔을 톡톡 건드렸다.
“날 죽이지 않을 거라면서, 이건 왜 이러는 건데? 그만 놔주겠어?”
“놔주면 또 도망치려고?”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 이젠 네 손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어.”
씨익 웃은 그가 목을 놓아주자마자.
그녀가 잭 액스를 죽여버렸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 나라고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아?”
“지금 바로 정당한 이유를 말해야 할 거다. 아니면.”
“아니면 뭐? 날 다시 죽이겠다고?”
“그래.”
“그럼 그 이유를 바로 말해주지. 난 일찍 죽기엔 너무 예쁘고 젊으니까.”
자신을 노려보는 박민준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멍청한 놈은 모르겠지만, 베타가 잭 액스를 만날 때 내가 훔쳐보고 있었어.”
“뭐?”
“계속 부하 노릇만 할 순 없잖아. 그래서 건수를 잡으면 내가 대장을 하려고 했지.”
그렇게 잭 액스를 감시하던 중.
베타가 찾아왔다.
박민준이 익히 예상했던 대로, 놈은 베타와 거래를 했다.
게이트를 막는 기계 장치의 위치를 공짜로 알려 줄 테니.
그걸 훔치고 파괴하라는 거였다.
“그때 놈에게 무슨 주문을 걸었어.”
“주문?”
“어. 널 발견하면 자신에게 알리도록 하는 주문이라고 들었어.”
“그럼 녀석이 여기로 온다는 건가?”
“글쎄.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 놈을 죽을 죽였으니까 괜찮을지도 모르지.”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그녀를 향해, 박민준이 차갑게 말했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군.”
“왜?”
“난 놈이 무섭지 않아. 오히려 죽이기 위해 찾아다니던 중이었지.”
“진짜? 그렇다면 정말 미안해. 대신 너에게 다른 줄 다른 정보도 있어.”
베타가 잭 액스에게 지구의 것이 아닌 무기를 전달했다.
“무기?”
“그래. 널 죽일 수 있는 무기라고 했어.”
박민준이 잭 액스의 몸을 뒤졌지만, 딱히 무기라 부를 만한 건 없었다.
유용한 정보 따위도 전혀 없었고.
의구심이 가득한 박민준을 향해.
그녀가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거대한 상자였는데.
그걸 본 박민준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의기양양하던 제시카 로즈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냥 나무 상자일 뿐이잖아? 딱히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 없는데?”
“안을 확인해보면 알 거야. 베타가 반드시 너와 대적하는 순간에만 열어보라고 했거든.”
“봉인 같은 거라는 말인가?”
“아마도? 너 같은 인간이 저걸 보고도 수상함을 못 느꼈으니. 봉인이 맞는 것 같은데?”
고개를 끄덕인 박민준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뜯어냈다.
약간의 저항이 느껴졌지만, 뚜껑 부위가 너무 쉽게 박살 났다.
“봉인도 아니네. 그냥 나무일 뿐이야.”
“그래? 그래도 어서 확인해봐. 나도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무척 궁금했거든.”
그렇게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박물관에서 날 볼 법한 돌도끼였다.
구석기나 뭐 그런 것보다는 훨씬 정교해 보였다.
뭐 그래 봤자 돌을 갈아서 만든 날 부위와 나무 손잡이를 대충 가죽으로 엮은 모습이었으니.
제시카 로즈가 얼빠진 표정으로 변했다.
“겨우 저거야? 신도 죽일 수 있다더니? 원시인이나 쓸 법한 무기 아니 장난감 같은데.”
박민준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딴 걸로 날 죽일 수 있다고?”
“그래. 보기엔 무척 허접하지만, 정말 무서운 무기일 거야.”
“그런가? 저걸로 맞으면 아프긴 하겠네. 무식하게 생겨서 말이야.”
돌날 부분의 크기가 30cm 정도인 게, 일반적인 도끼날보다 아주 크긴 했으니.
박민준이 돌도끼를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묵직한데? 하지만 역시 아무런 느낌이 없어.”
보통 전설 급 무기를 잡으면, 신성력이라거나, 마력 같은 게 바로 느껴져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냥 무식한 돌도끼였을 뿐.
금방 흥미를 잃은 박민준이 도로 상자 안에 집어 던졌다.
“어어. 그 귀한 걸 그렇게 막 다루는 거야?”
“개뿔. 필요하면 너나 가져.”
제시카 로즈가 황급히 상자로 다가갔다.
안에 든 도끼를 들고, 조심히 살폈다.
하지만 그녀도 금방 실망했는지.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건 그냥 돌도끼네. 다리 건너에 있는 박물관에 기증하면 딱 맞겠어.”
“그렇지? 그딴 건 그냥 버려두고, 녀석들이나 데리고 여길 떠나는 게 좋겠다.”
“그래. 내가 도울게.”
“그러든지.”
박민준이 빌런들을 정리하기 위해, 등을 돌리는 순간.
제시카 로즈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양.
싸늘하고, 어두운 기운을 뿜어냈다.
박민준의 등을 향해.
손에 든 도끼를 그대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쾅!
금방이라도 박민준의 등을 둘로 쪼개 버릴 듯한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걸 피해버린 박민준이었다.
허공을 가른 도끼가 그대로 바닥 콘크리트만 박살 냈다.
당황한 제시카 로즈가 재차 도끼를 휘둘렀다.
그 전에.
탁!
빠르게 손을 움직인 박민준이 그녀의 손에서 도끼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그는 그대로 상대의 머리통을 둘로 나눠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시카 로즈의 눈빛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 죽일 마음을 버렸다.
도끼를 그에게 빼앗긴 뒤로.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멍청하게 서 있던 제시카 로즈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그녀가 다시 정신 차렸다.
“뭐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질문하는 그녀를 향해.
박민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기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역시 이게 문제라는 건가?”
박민준이 도끼를 흔들며 중얼거리는 걸 보고, 제시카 로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또 왜 들고 있어? 아무 쓸모도 없는 거라면서?”
“진짜 그렇다고 생각해?”
“아니야? 그럼 아까는 왜 그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