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대국민 연설을 위해.
더원이 단상에 올라섰다.
“어제 동맹국 한국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적의 정체는 베타라 불리는 시스템의 운영자이며, 다행히 사망자는 없지만, 우리 미국에서 보낸 기계 장치가 완파되어…. 어?”
마이크에 대고 열변을 토하던 그의 눈에 의문이 엿보였다.
뭔가 서늘한 기운이 뒤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뒤돌아선 순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붉은 복장의 사내였다.
“언제 여기에?”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각하! 위험합니다!”
경호 장비를 들고 더원에게 달려오는 그들보다 적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더원의 등을 찌른 검날이 그대로 복부를 관통하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꺅!
안 돼!
단상 근처에 있던 기자와 일반인들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상처에서 솟구치는 피를 왼손으로 틀어막은 더원이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 오른손을 뒤로 휘둘렀다.
펑!
엄청난 굉음과 함께 빛이 번쩍였다.
너무나도 강렬한 빛 때문에.
아무도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서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중성의 목소리가 주변 가득 울려 퍼졌다.
“나에게 저항하는 자에겐 오직 죽음만 있을 것이니. 이자를 제물 삼아 너희에게 경고….”
“이런 개자식이! 누가 제물이야?!”
더원이 적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재차 공격에 나섰다.
철판도 단숨에 뚫어버릴 기세였는데.
“바로 죽지 않은 건가? 과연 명성만큼이나 대단한 놈이구나. 하지만 나에겐 어림도 없지.”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막아 낸 적을 바라보며, 더원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그렇게 막는다고?”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둘이 몇 번 손을 섞는 사이.
경호원 수십 명이 끼어들어, 그들 사이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각하. 상처가 심하십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끄덕끄덕.
적 앞에서는 당당하더니.
실제로는 많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힘없이 고개를 까닥인 더원이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경호원들과 대치한 붉은 복장의 사내는?
가벼운 손짓만으로 수십 명을 단숨에 제압해버렸다.
그가 뒤늦게 두리번거리며 대통령을 찾았지만, 이미 사라져 버렸으니.
쾅! 쾅!
근처를 박살 내면서 아무렇게나 화풀이를 하고 소리쳤다.
“똑똑히 들어라, 어리석은 인간들아. 나 베타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너희에겐 오직 죽음밖에 없다. 장치니 뭐니 하는 수작을 더는 부리지 말고, 그대로 내 노예로 살면 되는 것이다.”
펑!
붉은 복장의 적이 서 있던 단상으로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검은 연기와 함께.
단상이 박살 나면서 파편이 튀었다.
주변에 있던 다수가 상처를 입은 가운데, 마저 경고한 적이었다.
“이따위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날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니 게이트를 강제로 막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할 것이다. 그걸 명심해라.”
적은 갑자기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
최측근 몇 명만이 그곳에서 더원을 보필하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그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대통령의 전담 주치의였다.
“정말 신기하네요.”
“자상이 심해 보였는데, 지금 확인해보니. 막상 장기와 신경이 모두 멀쩡한걸요?”
“그래도 치료는 해줄 거지?”
“네. 수술할 필요도 없이, 그냥 여기서 상처를 소독하고 실로 봉합만 하면 금방 회복하실 거예요.”
의사가 상처 부위를 실로 꿰매고 있는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붉은 복장의 사내였다.
“아니! 저자가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아까 그냥 사라진 게 아니었나?”
“각하 어서 피하십시오.”
그곳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이었다. 더원만 혼자 담담함을 유지했다.
“다들 진정해. 그만 호들갑 떨라고.”
“하지만 각하.”
“그놈의 각하 소리도 좀 그만하고.”
“네. 알겠습니다. 각…. 하. 죄송합니다.”
자신을 향해 고개 숙인 측근들을 무시하고, 더원이 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왔냐? 근데 너 왜 나한테 별로 아프지 않을 거라고 말한 거냐? 나 지금 엄청 아프다.”
“너 보기보다 엄살이 심하군.”
둘의 대화를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측근들이었다.
“왜 각하께서 저자와 저런 대화를 나누시는 거지?”
“둘이 서로 아는 사이인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재밌다며 웃는 더원이었다.
“하하하. 모두 그만 얼굴 풀어. 저 자식 내 친구야. 자네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네? 하지만 저자는 시스템이라고….”
“베타?”
“네.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저 친구와 내가 모두를 속인 거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더원이 웃음을 그쳤다.
“야. 너도 그만 복면 벗어. 답답하지 않냐?”
고개를 끄덕인 박민준이 가면을 벗더니.
그걸로 이마를 향해 부채질하는 모습이었다.
“저자는 한국의 헌터!”
“박민준이 왜 저기에?”
“저분이 정말 대통령님과 짜고 아까 그런 짓을?”
속았다는 표정을 보고, 더원이 다시 깔깔 웃었다.
박민준이 그런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일을 혹시 너만 알고 있었던 거냐?”
“그래. 덕분에 현실감이 끝내줬지. 아주 재밌었어.”
“미친놈이. 어쩐지 다들 죽자 살자 덤비더니만. 나한테 최신형 미사일까지 쏘면서 말이야.”
더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박민준의 위아래를 훑었다.
“젠장. 그 미사일을 맞은 것 치고는 상처하나 없잖아! 이건 너무 불공평한데.”
“너 일부러 쏜 거냐?”
“그래. 나한테 칼을 맞으라고 했으니까. 너도 좀 당해야지.”
“이거 진짜 또라이네.”
“그걸 이제 알았냐?”
그 사건이 있고 난 뒤로.
전 세계에 베타의 악행을 비난하는 언론 보도도 잇달았다.
“미 대통령이 몇 달 만에 또 습격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범인의 정체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베타라 불리는 시스템에 의해 100명이 넘게 다치고 40명 가까이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연히 거짓방송이었다.
더원을 습격하면서 다친 사람은 많았지만, 그중에 죽은 사람은커녕 중상자 또한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보도되면 기껏 노력해서 꾸민 일의 효과가 떨어질 거라 판단한 박민준과 더원이었다.
그래서 가짜 사망자 명단까지 만들어서 언론에 전달했다.
그 결과.
미국 내에서 베타를 비난하는 전 국민적 여론을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게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급속도로 확장되었는데.
그건 바로 박민준이 주요 선진국으로 날아가 이와 비슷한 일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차이가 좀 있다면, 일부 대통령과 총리 등이 실제로 그의 손에 죽었다는 점이었다.
“놈이 계속 실패만 하면 경각심이 떨어질 테니까. 몇 명은 진짜로 처리해야겠네.”
그렇게 더원이 준 정보와 박민준이 개인적으로 얻은 사실을 종합해서 죽을 만한 짓을 한 놈들 몇 명을 골랐으니.
베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확산한 건 물론이고, 죽어 마땅할 만큼의 비리와 악행을 저지른 지도자가 사라진 걸 덤으로 기뻐하는 여론까지 등에 업을 수 있었다.
박민준이 원하는 대로 베타가 궁지에 몰리고, 새로 제작된 게이트 차단용 기계 장치가 전 세계에 골고루 뿌려질 무렵.
예상치 못한 사건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각성자 가운데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걸 반대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그 대부분이 빌런이었지만, 일부는 선행한다고 알려진 굴지의 유명 헌터 길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온갖 고생을 해가며 우리 길드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올려놨는데. 뭐? 게이트가 더는 열리지 않을 거라고?”
“빌어먹을. 그럼 우리는 뭘 먹고 사나?”
“그건 우리 같은 각성자가 세상에 더는 필요 없어진다는 말과도 같잖아?”
“그걸 그냥 그렇게 둘 순 없지.”
“막아야 해. 세상은 바뀔 필요가 없어. 지금도 아주 재밌잖아? 우리가 이득을 취하고, 부자가 될 수 있으니 말이야.”
그 결과.
여기저기서 기계 장치가 운송 도중 도난당하거나 파괴되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비상이 걸린 미국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미국의 예산은 물론이고, 각 선진국에서 막대한 자금을 받아 기껏 장치를 제작하고 배포하기 시작했는데.
“젠장.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 아무리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지. 괴물이 나오지 않는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울분을 토하는 더원과는 달리.
박민준은 아주 침착했다.
“쓸데없이 징징거리지 마, 지금은 행동에 나설 때다.”
“뭘 어떻게? 그동안 뿌리 뽑지 못한 빌런들은 둘째치고, 일부 헌터들마저 놈들에게 동조한다는 소식뿐인데.”
“그래서 이대로 손을 놓겠다는 건가?”
“그건 아니지.”
“정보를 취합해서 세력이 큰 반란 세력들을 제압한다. 그러면 자질구레한 녀석들은 기가 죽어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다.”
“과연 그럴까?”
“당연하지. 그것도 내가 몇 번 써먹은 수법이니까, 반드시 통한다.”
“언제?”
“예전에 몇 번 써먹어 봤어. 그러니까 날 믿어.”
박민준이 다른 차원에서 무림 맹주가 될 때까지.
그리고 맹주가 된 뒤에 천마의 세력과 정면 대결을 펼치기 전까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적과 싸우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끌어낸 그였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베타를 없애버리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내 말대로만 해. 그럼 지구도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
“알았다. 딱히 다른 방법도 없으니. 네 말대로 하마.”
“당연히 그래야지.”
미국 정보부를 총동원해서 타깃을 몇몇 선정했다.
그 첫 번째는 당연하게도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빌런 조직이었다.
***
미국 시카고.
과거의 영광과는 달리, 지금의 이 대도시는 미국의 모든 사건이 벌어진다고 알려 있을 정도로 치안이 불안했다.
게이트가 열리고, 괴물보다 빌런 때문에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특이한 도시이기도 했으니.
당연하게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빌런 조직도 이곳에 존재했다.
그 이름은 Very Bad Guys.
조직의 명칭부터 명확하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 집단은 최근 게이트 차단 기계 장치를 가장 많이 훔치고, 박살 낸 거로 밝혀졌다.
그곳의 두목 잭 액스가 부하들과 함께 승리를 자축했다.
여자를 부르고, 술을 트럭째로 가져왔다.
“감히, 우리의 사업을 방해하려 들다니. 미국 정부고 뭐고, 우리한테 까불면 X 되는 거야.”
“맞습니다. 회장님.”
“그래. 우리 VBG는 최강이야. 더원이고 뭐고,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이번 기회에 없애버리겠다.”
“그건 좀….”
꽈득!
잭 액스가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부하의 목을 도끼로 쳐버렸다.
S등급이었는지.
그의 무기에 마력이 흘러넘쳤다.
지금의 상황이 평소 일상이었다는 듯.
동료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다시 술을 마시는 녀석들이었다.
잭 액스가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부두목에게 말했다.
“그래서 다음엔 어디라고?”
“시카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
“왜 그래?”
“저기 뭐가 있습니다.”
“어디?”
“저 위 창문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