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지구에 열리는 게이트가 양자역학의 관점에서는 역 블랙홀이라더라.”
“뭐라고?”
“나도 잘 몰라. 그냥 박사들이 나와 더원에게 말한 내용이야.”
“그래서 게이트를 막으면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건데?”
“기계 장치가 발산하는 에너지가 게이트를 차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스템까지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라더라.”
“시스템을 무력화해?”
“그래. 시스템이 정지되면서 각성자의 능력이 사라진다는 거지.”
베타라 불리는 운영자 또한 게이트가 막히면서 동시에 힘을 잃게 된다는 게 박사들이 주장하는 이론이었다.
“확실한 거냐? 네가 말한 일을 실행하려면 예산과 인력이 엄청나게 필요할 텐데?”
“나도 몰라. 어차피 게이트가 열리는 건 막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장치를 예정보다 더 많이 만들어서 지구 전체를 동시에 방어하자는 계획을 세운 거야.”
“흠.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과연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위해서 돈을 쓸 나라가 있을까?”
“우선 더원이 상당 부분을 책임지기로 했어.”
“미국에서 나선다고?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그건 무리일 텐데.”
“알 게 뭐야. 가능하니까 자신 있게 말한 거겠지.”
“그런가? 역시 미국은 미국이구나.”
“아무튼, 너도 좀 무리해서라도 예산을 편성해봐.”
“야. 요즘 경기가 얼마나 안 좋은데. 그런 일에 나랏돈을 쓴다고 하면 내 지지율이 폭락할걸?”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들면 되지.”
“어떻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아냐?”
“그거야 당연히 잘 알지. 정치의 기본이잖아…. 가 아니라. 아무튼, 나도 안다.”
“그래. 그 방법을 쓰는 거야.”
“어떻게?”
***
갑자기 잡힌 대한민국 대통령의 긴급 기자회견 현장.
자세한 사항을 전혀 모른 채.
기자들이 이곳에 삼삼오오 모여서 의견을 나눴다.
“긴급 기자회견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지?”
“그러게? 딱히 별일도 없었잖아?”
“혹시 뉴욕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 때문일까?”
“그건 미국이고, 여긴 한국인데. 서로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 사건의 주범이 한국을 노리는 걸 수도 있잖아.”
크크 흠.
“모두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대통령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굳은 표정의 대통령이 마이크가 있는 단상으로 걸어 나왔다.
“어라? 이지원이 왜 같이 나오는 거지?”
“옆에 국장도 있는데?”
그 뒤에는 한국 게이트 관리국장과 세계 최연소 S등급 헌터인 이지원 부국장도 함께했다.
그 두 사람이 대통령의 좌우로 배경처럼 섰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대통령 송지학입니다. 오늘 이렇게 긴급 기자회견을 연 이유는 바로 게이트가 열리는 걸 막는 장치를 드디어 우리 한국에도 다음 달 도입할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웅성웅성.
앞서 미국이나 뉴 유니온이 발표한 것보다 상당히 앞당겨진 일정이었다.
“비록 프로토타입이기는 하지만 이미 충분한 검증을 거쳤으며, 미국에서도 몇 대밖에 없는 그 장치를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제공해 주기로 했습니다. 저기 있는 게 바로 그 기계 장치….”
쾅!
대통령석 근처에서 작은 폭발음이 들렸다.
게이트를 막는 기계 장치가 터진 거였다.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대통령을 사방에서 감싸며 보호했다.
게이트 관리국 국장이 날카로운 눈매로 주변을 살폈다.
이지원도 황급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스르륵.
처음부터 단상 앞에 있었다는 듯.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정체불명의 한 남자였다.
불길해 보이는 붉은색 옷을 입고, 얼굴에는 악마 형상이 떠오르는 징그러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국장이 나서서 그에게 소리쳤다.
“넌 누구냐? 감히 각하의 목숨을 노린 거냐?”
“노예들 주제에. 감히 내 일을 망치려 들었으니. 모두의 앞에서 저놈을 죽이고 나의 위대함을 보여주겠노라.”
“개소리. 아무리 봐도 미친놈 같은데. 내가 당장 그 입을 다물게 해 주겠다.”
국장의 말이 딱딱해서 어딘가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걸 이상하게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름대로 A등급 각성자인 국장이라서 그런지.
적에게 달려드는 그의 기세가 대단했다.
거대한 덩치를 앞세워서 당장이라도 정체불명의 적을 박살 낼 듯 보였는데.
와드득!
너무 허무해 보일 정도로 쉽게 적에게 제압당해버린 국장이었다.
붉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그의 왼팔을 단숨에 부러뜨리고, 마저 이마를 쳐서 기절시켜버렸다.
“안 돼! 국장님!”
쓰러지는 그를 보고, 이지원이 빽 소리치며 달려들었는데.
“헬파이어!”
주문을 외친 적이 손을 앞으로 내밀자, 거대한 불길이 이지원을 덮쳤다.
놀란 이지원이 가까스로 피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빈틈이 생겼다.
그걸 노리고 달려든 적에 의해 그녀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당해버렸다.
국장과 부국장이 쓰러진 상황에서 더는 대통령을 지켜줄 사람이 없어 보였다.
경호원들이 서둘러 대통령을 피신시키려고 했다.
그 전에 적이 그들의 앞길을 막고, 다시 마법을 부렸다.
“슬립!”
주문을 외고 손을 내젓자, 모든 경호원이 거의 동시에 잠들어버렸다.
위기의 상황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국 4대 헌터 길드 중 두 곳이 이곳에 나타났다.
백호 길드와 주작 길드였다.
두 길드 장이 힘을 합쳐서 적과 싸우는 동안.
다시 몸을 일으킨 이지원이었다.
그녀가 합세하자 3대 1의 대결이 되었고, 막강한 적도 더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점점 늘어나는 헌터들을 보고, 적이 돌연 이렇게 소리치고 모습을 감췄다.
“크윽. 박민준이란 놈과 먼저 싸우지 않았다면, 이런 놈들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놈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깊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그분은 지금 어딨는 거지?”
“지금은 잠시 물러나지만, 곧 다시 돌아오마. 그땐 나 베타가 너희를 모두 끝장낼 것이다. 그러니, 그 장치를 작동할 생각도 하지 마라. 그건 오직 죽음만 재촉할 뿐이니.”
거짓말처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적이 사라지고.
몇 초 뒤.
박민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처를 입은 것처럼.
그의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다.
오른팔도 다쳤는지.
힘없이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빠르게 주위를 살핀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젠장. 내가 늦었나?”
이지원이 이젠 살았다는 얼굴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박민준 씨! 괜찮으세요? 대체 그 꼴이 다 뭐예요?”
“이 근처에서 베타란 놈을 만났다. 다짜고짜 날 죽이려고 들기에 한 판 붙었는데. 중간에 갑자기 사라지더군.”
“그랬군요. 그자가 여기에도 나타났었어요.”
“그런 것 치고는 제법 멀쩡한 것 같은데? 죽은 사람은 없나?”
“아저씨. 아니 박민준 씨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난 여기 있지도 않았는데?”
“당신과 싸우면서 그자도 큰 상처를 입었었나 봐요. 우리와 싸우다가 불리한 걸 느꼈는지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랬군. 아무튼, 나도 혼자 상대하기 버거운 놈이었는데.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다.”
박민준의 말을 듣고.
이지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계 최강 최고 레벨을 가진 당신에게도 힘든 상대였다고요?”
“그래. 스스로 베타라고 불리는 걸 듣고, 바로 깨달았다.”
“뭘요?”
“놈은 지구에 게이트를 열고, 각성자를 탄생시킨 시스템 그 자체라는 걸.”
“설마요?”
“왜 아니겠나? 우리가 시스템을 뭐라고 부르지?”
잠시 뜸을 들이던 이지원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놀라서 소리쳤다.
“베타? 헉! 아까 그자가 정말 시스템을 칭하는 베타라는 건가요?”
“그래. 확실하다. 최강 헌터라고 자부하는 날 이렇게 몰아붙일 수 있는 건 오직 시스템의 운영자인 그놈뿐일 거다.”
분하다는 듯 말하는 그를 향해.
이지원이 다급하고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요.”
“적의 협박에 굴할 순 없지.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서 더욱 강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 자원을 아끼지 말고, 끝까지 적과 싸워 이겨낼 것이다.”
뭔가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앞서 있었던 적의 등장과 격렬한 전투 때문일까?
오히려 그의 말이 이곳에 모인 기자를 비롯한 모두의 가슴속에 불을 지폈다.
그건 이지원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두 손을 불끈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요. 저도 대통령님과 당신을 돕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어요.”
“훌륭하다. 우리가 모두 힘을 합친다면 그 어떤 적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큰 희생이 따르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요. 희생 없는 승리도 없다잖아요.”
이 대화를 끝으로 상황이 종료되고.
긴급 기자회견장도 잠정 폐쇄되었다.
***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다이어트 콜라를 마시는 대통령이었다.
그의 앞에 게이트 관리국의 국장과 부국장.
그리고 백호 길드와 주작 길드의 길드장이 앉아 있었다.
박민준은 어디를 갔는지, 이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콜라 한 캔을 단숨에 들이켠 대통령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를 끄고, 힘차게 손뼉을 쳤다.
짝짝짝.
“다들 아주 훌륭했습니다.”
국장이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팔은 진짜로 부러졌기 때문에 깁스를 한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각하께서도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제 평생 이보다 더 완벽한 연기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가 불편한 팔을 가지고, 억지로 손뼉을 치려다가 고통을 느꼈다.
얼굴을 와락 구겼다가 슬쩍 대통령의 눈치를 봤다.
“자네 팔은 좀 괜찮은가? 그 녀석이 별로 아프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엔 팔이 부러지면서도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가 억지로 움직인 까닭에 아픔을 느꼈을 뿐.
가만있으면 딱히 팔이 부러진 줄도 모를 정도였다.
“그럼 다행이고. 그나저나, 박민준은 어디 간 거야? 왜 안 보여?”
이지원이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는 미국으로 곧장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전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설마 아무것도 못 들으셨어요?”
“아! 그…. 그랬지. 내가 깜빡했네.”
누가 봐도 전혀 모르던 눈치였다.
박민준이 그에게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떠나 버렸으니.
‘또 제멋대로 가버린 거야? 나한테 미리 말 좀 해 주면 어디 덧나냐? 인마!’
속으로 툴툴거리는 대통령을 향해.
주작의 운찬 길드장이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베타 시스템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긴 한 겁니까?”
백호의 길드장 주희철도 그게 내심 궁금했었는지.
대통령을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그가 뭐가 기분이 좋았는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그놈 말로는 그렇다고 하네. 그리고 참고로 그 일을 제일 친한 친구인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준 거였다네.”
“그렇군요. 박민준 씨와 대통령께서 서로 친구이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 녀석과 친구를 할 수 있겠나?”
대통령의 말에서 조금 허세 같은 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의 말을 반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대가 한국의 최고 권력자여서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박민준을 만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었으니.
“그건 그렇지요. 그분처럼 자아가 높은 사람하고는 아무나 친구가 될 수 없을 겁니다.”
“맞습니다. 각하니까 모두를 자기 밑으로 내려다보는 그분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거겠지요.”
“하하하. 자네들이 그 친구와 날 아주 잘 파악했군.”
대통령이 박민준의 친구인 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던 그때.
당사자를 태운 비행기가 한국을 벗어났다.